"AI가 법의 문을 두드린다"...日 최고재판소, ‘AI 사법 참여’ 가능성 언급

X 기자

metax@metax.kr | 2025-05-09 07:00:18

AI가 법정에 등장했을 때 우리가 마주할 고민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어디쯤 와 있을까?

“AI가 사법 판단에 관여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2025년 5월 3일, 일본의 헌법기념일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마사키 유키히코 일본 최고재판소장은 사법계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발언을 남겼다. 그는 인공지능(AI)이 사법 판단에 일부 관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며, 전통과 권위의 상징인 법정에 기술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문을 두드리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가능성의 열람을 넘어, 일본 사법부 최고위 인사가 AI의 역할을 공식 언급한 첫 사례다. 특히 행정 절차뿐 아니라 재판 판단 과정에도 기술을 도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법 시스템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한다.

물론 이마사키 소장은 신중론도 함께 내비쳤다. 그는 보안, 신뢰성, 저작권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전면적인 도입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가 문서 분류, 판례 분석, 기록 요약 등 행정 실무 영역에서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다.

이번 발언은 일본이 추진 중인 사법 디지털 개혁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일본 정부는 2026년 5월까지 개정 민사소송법을 전면 시행할 계획이다. 이 개정안은 민사소송의 절차 전면 IT화를 핵심으로 한다. 소장 제출부터 판결 송달까지 모든 과정이 온라인으로 처리되며, 소송 기록 역시 전자화가 원칙으로 확정됐다.

이마사키 소장은 이를 두고 “법률 접근성과 분쟁 해결 기능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중요한 진전”이라 평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디지털 기반이 갖춰질수록, 그 위에 AI가 자연스럽게 올라탈 가능성도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AI가 법정에 등장했을 때 우리가 마주할 고민도 적지 않다.

예컨대, AI가 제안한 결론을 판사가 수용했을 때 오판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학습 데이터가 사회 구조의 불균형을 반영해 편향된 판단을 낼 가능성은 없는가? 법률이 다루는 감정과 맥락, 즉 ‘사람다움’은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부분이다.

이마사키 소장도 이런 우려를 의식한 듯,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는 자세는 변함이 없어야 하며, 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와 종합적 판단 능력은 법관에게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법이 단지 규칙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재단하는 감성적·윤리적 판단의 총체임을 시사한다.

그는 형사 재심 제도 개편 논의와 관련해서도 언급했다. 과거 사건을 돌아보며 운영상의 교훈을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며, 이는 AI가 오판 가능성을 분석하거나 재심 요건을 보조하는 역할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어디쯤 와 있을까?

2025년 4월, 한국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사법부 인공지능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재판 시스템에 AI 기술을 어떻게 도입할 수 있을지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같은 해 3월에는 판사들이 중심이 되어 ‘사법에서의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해당 가이드라인은 기술 도입에 앞서 윤리적 기준과 법적 책임, 기술 안정성 등을 정리함으로써, 제도적 준비를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국회도 빠르게 움직였다. 2024년 12월, ‘AI 기본법’이 본회의를 통과했고, 국회입법조사처는 AI 기술의 공공 활용에 따른 사회적 영향과 대응 방안을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국회도서관은 ‘국회회의록 빅데이터 서비스’를 통해 AI 관련 논의 추적이 가능한 데이터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AI가 사법 판단에 관여할 수 있다”는 취지의 공식 발언은 없다. 일본처럼 최고 사법 수장이 공개적으로 AI의 사법 참여 가능성을 열어둔 전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는 기술 도입보다는 법적·제도적 기반을 면밀히 다지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마사키 소장의 발언은 결국 법의 본질을 되묻는 질문이었다. AI는 법률 서비스의 접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온전히 감당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법의 마지막 이름은 여전히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AI가 법정에 들어설 수는 있어도, 법의 자리에 설 수 있을지는 아직 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설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 문을 누가, 어떻게 여는가에 따라 미래 사법의 윤곽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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