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AI 초강국 도약의 갈림길에 서다
X 기자
metax@metax.kr | 2025-09-24 11:00:22
영국의 인공지능(AI) 산업이 세계 3위 규모로 성장하며 글로벌 기술 경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있다. 2024년 기준 영국 AI 시장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했고, 유럽 내에서는 가장 큰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향후 10년 동안 연평균 22~27%의 고성장을 이어갈 것이란 전망이 잇따르고 있어, 영국은 지금 분명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
시장전문조사기관들의 분석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어떤 곳은 2024년 영국 AI 시장을 약 3억 달러 규모로, 또 다른 곳은 33억 달러 규모로 추정한다. 이는 정의와 범위에 따라 편차가 발생하는 것이지만, 중요한 점은 모두가 22~26%대라는 높은 성장률에는 이견이 없다는 사실이다. 응용 AI 시장은 2035년까지 89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엣지 AI와 대화형 AI 역시 각각 22.8%, 24.8%의 고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헬스케어, 금융, 제조 등 전통 산업 전반에서 AI가 빠르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AI 산업의 경제적 기여도는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2024년 영국 내 AI 관련 기업들의 총 매출은 239억 파운드로 1년 만에 68% 증가했고, 총부가가치(GVA)는 118억 파운드로 103%나 늘었다. AI 관련 일자리도 같은 기간 33% 증가해 8만 6천여 개에 달했다. PwC 분석에 따르면 AI와 머신러닝만으로도 2035년까지 영국 GDP를 2.98% 끌어올려 약 793억 파운드의 추가 성장을 이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NHS가 AI 도입으로 연간 최대 120억 파운드를 절감할 수 있다는 추정은 AI가 특정 기술 산업을 넘어 국가 전반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촉매제임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성장세 뒤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지원과 글로벌 자본 유치가 있다. 영국 정부는 세계 최초로 AI 안전성 정상회담을 열고, AI 보안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 2030년까지 국가의 컴퓨팅 역량을 20배 확장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놓았다. AI 성장 구역을 지정해 민간 투자를 유치하는 것도 핵심 전략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도 잇따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향후 4년간 300억 달러를 투입해 영국 내 최대 규모의 슈퍼컴퓨터를 구축할 예정이고, 구글은 50억 파운드를 들여 데이터 센터와 딥마인드 연구개발을 지원한다. 엔비디아는 AI 스타트업 생태계에 20억 파운드를 투자하고, 12만 개의 GPU를 영국 전역에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투자는 영국이 선택한 ‘친혁신적’ 규제 기조의 성과이자, 동시에 기술 주권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숙제를 남긴다. 미국과 체결한 ‘기술 번영 협정’은 대규모 투자를 불러왔지만, 영국을 미국 기술의 “최고 고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영국의 AI 생태계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24년 기준 5,800개 이상의 AI 기업이 활동 중이며, 그중 90%는 중소기업이다. 런던과 남동부에 기업이 집중되어 있지만, 맨체스터와 에든버러 등 지역 거점도 빠르게 성장하며 전국적 확산이 이뤄지고 있다. 앨런 튜링 연구소와 13개 주요 대학이 협력하는 연구 네트워크는 학술적 기반을 단단히 다져주고 있다.
그러나 기회와 함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첫 번째는 컴퓨팅 인프라와 에너지 병목이다. 슈퍼컴퓨팅 접근성 부족과 높은 전력 비용은 AI 산업 확장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두 번째는 인재난이다. 멀티모달 AI 전문가의 수요는 공급을 5:1 비율로 초과하고 있으며, 인건비 상승과 인력 부족은 산업 전반의 성장을 제약한다. 세 번째는 AI 도입 격차다. 기업 리더의 절반 이상이 공식적인 AI 전략을 갖고 있지 않아, 같은 기업 안에서도 AI를 사용하는 인력과 그렇지 않은 인력 사이의 생산성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마지막은 규제 불확실성과 지정학적 종속 문제다. 유럽연합이 강력한 규제 프레임워크를 구축하는 반면, 영국은 분산적이고 가벼운 규제를 택하고 있어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
결국 영국이 AI 초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첫째, 전력과 컴퓨팅 인프라 확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둘째, 단순한 인력 수급 문제가 아닌 ‘기술 역량의 빠른 전환’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국가적 규모의 재교육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AI 도입 격차를 줄여 사회 전반에 생산성 향상을 확산시켜야 한다. 넷째, 규제 체계를 정비해 혁신과 신뢰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정부에는 중앙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공식 규제 기구의 설립과 ‘AI 기회 액션 플랜’의 속도전이 필요하다. 기업에는 명확한 AI 전략 수립, 사내 아카데미와 외부 파트너십을 통한 인재 강화, 그리고 인간-AI 협업 시스템을 통한 차별화 전략이 요구된다.
향후 5~10년, 영국 AI 산업의 성장 경로는 이 과제들을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프라와 인재, 규제의 균형이 맞춰질 경우 영국은 유럽을 넘어 세계 AI 표준을 주도하는 초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반대로 이를 놓친다면, 외자에 의존한 단기 성장 뒤 기술적 종속이라는 그림자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영국은 AI 산업혁명의 황금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그 황금기를 실제로 거머쥘 수 있을지는, 영국이 기술적 주권과 혁신 생태계를 동시에 지켜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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