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로딩 중입니다
광화문덕 기자
metax@metax.kr | 2025-07-12 10:17:00
이른 아침이었다.
밤새 에어컨을 틀어놓았지만,
공기는 이미 더위에 굴복해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창문 틈으로 스며든 열기는
벌써 하루를 살짝 지쳐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하늘은 희뿌연 수증기를 머금은 채
어중간한 색으로 뿌옇게 가라앉아 있었고,
커튼 사이로 쏟아진 빛은
금빛이라기보단 눅눅한 온기에 가까웠다.
나는 이불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로딩이 완료되지 않은 세계처럼,
몸은 아직 현실에 완전히 접속하지 못한 채 둥둥 떠 있었다.
기지개를 켜기 전, 문득 스친 생각 하나.
“혹시 나는... NPC는 아닐까?”
NPC(Non Player Character)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정해진 동선, 정해진 말, 정해진 역할.
그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있지 않다.
‘오늘도 잘 지내셨나요?’ 같은 대사는
감정이 아니라 코딩된 반응으로
매크로처럼 반복된다.
내가 살아가는 하루는,
어쩌면 그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알람,
닳아버린 칫솔모,
창문 틈으로 들이치는 뜨거운 햇살을 피하듯
빠르게 욕실로 향하고,
익숙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출근길.
회사 앞 카페에 들러
늘 먹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고르고,
점심은 구내 식당에 들러 먹는다.
무의식의 자동 반복.
그리고 퇴근 후,
무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타인의 삶에 끼어들듯 넘겨보는 피드들.
나는 과연 ‘살아 있는’ 플레이어일까.
아니면 그저 그 자리에 배치된 또 하나의 장식일까.
하루가 또 그렇게 로딩된다.
‘미션: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기.’
지하철은 늘 같은 색이다.
불 꺼진 창문엔 피곤한 내 얼굴이 비쳤고,
바닥엔 어젯밤 뉴스 알람처럼 축 처진 발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 무언가를 향해 이동 중이다.
얼굴 위엔 말없이 흐르는 HUD(Head-Up Display)가 있다면,
그 안엔 아마 이런 문구들이 적혀 있지 않았을까.
‘하반기 실적 보고서 제출까지 D-2’
‘애인과 다툼, 어젯밤 차단됨’
‘아버지의 검사 결과 기다리는 중’
‘다이어트 시작 3일 차 실패.’
나는 그들 사이에서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오늘은... 무슨 이벤트가 발생하려나.”
게임 속 이벤트는 플레이어를 위한 것이다.
성장이나 보상, 혹은 서사를 위해.
하지만 현실 속 이벤트는 늘 예기치 못한 충돌처럼 찾아와
내 계획을 뒤흔들곤 한다.
에어컨이 고장 나서 사무실 전체가 찜통이 된 날,
고객사 회의 중 PPT 파일이 열리지 않아
마른침을 삼키며 프린트를 찾아 꺼내든 순간,
혹은
조용히 퇴사를 전해온 동료의 마지막 커피 한 잔.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들.
어깨에 닿은 낯선 사람의 팔꿈치,
기분이 나빠 보였던 상사의 한마디,
점심시간에 들은 누군가의 이혼 소식.
모두가 계획엔 없던 일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오늘 하루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점심 무렵,
태양은 정수리 위로 완전히 떠올라 있었다.
빛이 아니라 뜨거운 압력이었다.
그늘은 짧았고, 아스팔트는 눈앞이 아득해질 만큼 열기를 뿜었다.
그 속에서 나는,
커피를 들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공원 벤치 아래 그늘은 짧았고,
철봉 아래서 놀던 아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폭염을 무시하는 플레이어라도 되는 양
멈추지 않고 웃었다.
그러다 아주 사소한 이벤트가 일어났다.
앞서 걷던 사람이 핸드폰을 떨어뜨렸고,
나는 무심결에 그것을 주워 건넸다.
“고맙습니다. 요즘은 이런 일도 흔치 않네요.”
그 말은
마치 게임 속 퀘스트 완료 알림처럼
나의 마음 한 귀퉁이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덕분에 오늘 하루가 조금 특별해졌네요.”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지만
그 순간, 나는 작은 확신 하나를 얻었다.
NPC는 저런 따뜻한 대사를 갖지 않는다.
루틴은 깨졌고, 이벤트는 발생했고, 나는 선택했다.
NPC는 저런 따뜻한 대사를 가지지 않는다.
루틴이 깨졌고, 이벤트가 발생했고, 나는 선택했다.
퇴근 후,
하루 종일 내리쬔 태양에 지친 몸을 씻기기 위해
샤워기 아래에 섰다.
등에 떨어지는 물줄기는
오늘 하루를 천천히 지우는 것 같았다.
나는 NPC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장면은
끝내 씻겨 내려가지 않고
마음 어딘가에 새겨져 남는다.
“형, 나 진짜 죽다 살아났어.”
“이번 주말 결혼식 꼭 와줘.”
“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
삶은 늘 누군가의 목소리로 도착한다.
이벤트는 문자나 알림이 아니라,
사람의 숨결과 체온이 담긴 목소리로.
나는 그것들을
수락 버튼을 누르지 않고도 받아들이고,
때로는 무거운 마음으로,
때로는 들뜬 표정으로
‘퀘스트’라 이름 붙인 하루들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어떤 미션은 혼자선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럴 땐,
다른 플레이어와 함께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우연처럼 등장해
서로의 체력을 회복시켜주고,
경험치를 나누고,
때로는 가방 속 아이템 하나를 건네며
다시 걸어간다.
그렇게 인연은 등장한다.
NPC가 아니라,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플레이어로서.
우리는 파티를 맺고,
각자의 체력을 확인하며,
때로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렇게 인연은 등장한다.
우연히, 그러나 필연처럼.
어쩌면 삶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오픈월드 게임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미리 스토리를 알 수 없고,
정답은 늘 바뀌며,
퀘스트는 레벨업할수록 점점 복잡해진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퀘스트에 ‘수락’을 누른다.
서버 접속 중...
그리고 로딩이 끝나는 순간,
나는 다시 살아간다.
한 번뿐인, 나라는 캐릭터로.
땀에 젖고, 때로는 웃으며.
이름도, 마음도, 서사도 나인 채로.
오늘도, 잘 살아보자.
나는 NPC가 아니라
플레이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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