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만 반도체 협정, 규칙의 전쟁
이든 기자
metax@metax.kr | 2026-01-23 09:00:00
보조금에서 관세·투자로 전환
미국과 대만이 반도체·AI·에너지 협력을 묶은 무역·투자 연계형 합의를 발표하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방식이 또 한 단계 진화했다. 이번 합의의 본질은 투자 규모 그 자체보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가”를 기준으로 관세와 시장 접근 규칙을 설계했다는 점에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CHIPS Act가 어떤 정책이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CHIPS Act는 2022년 미국이 제정한 반도체 산업 육성법으로, 미국 내 반도체 제조 역량의 장기적 붕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은 1990년대 세계 반도체 생산의 30% 이상을 차지했지만, 최근에는 10% 미만으로 비중이 급감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대규모 보조금과 세액공제, 연구개발 지원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도록 유도해 왔다. CHIPS Act의 핵심은 ‘재정 지원을 통한 리쇼어링’이었다.
그러나 CHIPS Act가 본격 집행되면서 한계도 분명해졌다. 보조금은 재정 부담이 크고, 지급 이후 기업의 장기적 입지 전략을 완전히 통제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반도체를 국가안보 자산으로 인식하는 미국의 시각이 강화되면서, 보다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통제 수단이 필요해졌다. 이 지점에서 미국은 보조금 중심 정책에서 한 단계 나아가, 무역 규칙 자체를 산업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번 미·대만 합의는 그 전환을 상징한다. 대만 기업의 최소 2,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를 전제로, 대만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 상한을 15%로 설정하고, 반도체 분야에서는 미국 내 신규 공장을 건설하는 기업에 대해 생산능력과 연동된 무관세 수입 혜택을 부여하는 구조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공장 건설 기간에는 계획 생산능력의 최대 2.5배까지, 가동 이후에도 1.5배까지 관세 없이 수입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점에서, 투자와 관세가 하나의 규칙으로 결합됐다.
이는 CHIPS Act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CHIPS Act가 “공장을 지으면 돈을 준다”는 유인책이었다면, 이번 합의는 “공장을 지으면 시장 접근을 열어주고, 짓지 않으면 불리해질 수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관세와 시장 접근성은 기업의 수익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단기 보조금보다 훨씬 강한 압박이 된다.
산업·지정학적 측면에서 이번 합의는 미국이 반도체를 단순 제조업이 아닌 국가안보 핵심 인프라로 재분류했음을 보여준다. 대만의 최첨단 파운드리 역량을 미국 산업 생태계 내부로 구조적으로 끌어들이고, 동맹 공급망을 규칙으로 고정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이는 효율과 비용 중심이던 기존 글로벌 분업 체계와는 다른 논리다.
이번 합의가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정책 당국에 주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반도체 경쟁력은 더 이상 기술력이나 공정 미세화에만 있지 않다. 투자 위치, 법인 구조, 관세 적용, 무역 규칙까지 포함한 지경학적 설계 능력이 수출 경쟁력의 일부가 됐다. CHIPS Act가 보조금 경쟁의 출발점이었다면, 미·대만 합의는 그 다음 단계로, 공급망 재편의 무기가 ‘돈’에서 ‘규칙’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결국 이번 미·대만 반도체 협정은 하나의 선언에 가깝다. 반도체 패권 경쟁은 이제 공정을 누가 앞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시장 접근의 규칙을 설계하느냐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보조금의 시대는 지나가고, 무역 규칙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 META-X.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