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가, 무임승차인가”...공공 자산의 이름으로 이익을 쌓는 사람들
X 기자
metax@metax.kr | 2025-06-05 07:00:44
글로벌 이미지 플랫폼에서 ‘무료 사용’, NFT 거래소에서는 수천만 원.
같은 고흐의 그림이, 어떤 곳에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공공재’고
또 다른 곳에서는 ‘디지털 희소 자산’으로 팔린다.
이것이 지금, 퍼블릭 도메인의 민낯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자유, 언제부터 탐욕의 신호탄이 되었나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은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된 창작물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한 제도다. 저작자의 사망 후 70년이 지나면 해당 저작물은 법적으로 ‘공공의 자산’으로 전환된다. 고흐, 세잔, 세익스피어, 베르디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제도는 시민 누구나 창작물을 향유하고, 문화 자산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공공성의 회복을 지향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자유'가, 때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법 상태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수년간 퍼블릭 도메인 이미지를 활용한 상업 콘텐츠, 밈(meme) 콘텐츠, NFT 기반 전유 사례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생성형 AI 모델의 학습 데이터로 광범위하게 활용되면서 원작자 이름, 시대적 맥락이 삭제된 ‘탈맥락 이미지’로 소비되는 일이 다반사다. 공공재를 무임승차하듯 ‘내 것처럼’ 쓰는 디지털 자본주의의 풍경이 이 지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웃으며 소비되는 고흐와 베르메르, 사라지는 맥락과 존엄
인터넷 밈과 상품 광고, 이미지 배너 속에는 퍼블릭 도메인 예술작품들이 무분별하게 활용되고 있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피자 프로모션 이미지로,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는 패션 브랜드의 홍보 모델로 재가공된다.
정보의 자유로운 확산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원작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역사적 맥락과 작품의 미학적 깊이는 그만큼 빠르게 휘발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활용이 “예술의 장식화, 감상의 소비화”를 초래한다고 경고한다. ‘작가를 모르는 미술 감상’이 일상이 된 지금, 문화자산은 더 이상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라, 단지 시각적 ‘배경’으로만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NFT와 AI가 촉발한 사유화의 질주: 예술은 누구의 것인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퍼블릭 도메인이 디지털 자산화, 나아가 사유화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소장 중인 명화 5점을 초고해상도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해 NFT로 발행했다. 이 NFT는 박물관장 미하일 피오트로프스키의 친필 사인 영상까지 포함해 “디지털 소유권”을 주장했고, 고가에 낙찰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https://www.binance.com/en/support/announcement/detail/2bebd933495c4fe6aac535a5b2f27bf8
원본 작품은 공공 박물관에 있지만, NFT 소유자는 ‘해당 이미지의 희소성’을 기반으로 자산 가치를 부여받는다. 누구의 것도 아니어야 할 퍼블릭 도메인이, NFT를 통해 ‘누구의 것’으로 등록되는 순간이다.
더 나아가, 일부 콘텐츠 플랫폼은 퍼블릭 도메인 이미지에 워터마크를 입힌 뒤, 유료 콘텐츠로 재포장해 판매하고 있다. “무료였던 예술”이 “프리미엄 에셋”으로 재등장하는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경계 없는 자유가 만든 무책임의 시대
물론 모든 퍼블릭 도메인 활용이 문제는 아니다. 창의적 2차 저작물, 공공 교육 콘텐츠, 소외계층의 예술 접근 기회 등 긍정적 효과도 크다. 그러나 최근의 사용 흐름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퍼블릭 도메인을 권리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법적 보호가 끝난 예술이라 할지라도, 창작자의 인격과 명예는 지켜져야 한다.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14조 제2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저작자의 사망 후에도 그 저작물 이용은, 생존 시 인격권을 침해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특정 예술가의 작품 스타일을 본떠 정치적 조롱이나 혐오표현에 활용하거나, 창작자의 철학과 반대되는 상품에 결합시키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창작자의 정신은 존중되지 않고, 작품은 맥락 없는 장식물로 휘발된다.
퍼블릭 도메인은 책임이다
우리는 퍼블릭 도메인을 ‘공짜로 얻은 자유’로 여겨왔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윤리다.
예술 작품은 단지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남긴 사유의 흔적이며, 시대와 사회, 고통과 희망이 응축된 하나의 ‘말’이다.
그 말을 왜곡하거나, 상품처럼 점유할 수는 없다. 퍼블릭 도메인의 자유는 책임을 전제로만 유지된다.
공유지의 비극을 피하려면, 우리는 이제 예술에 ‘값’을 붙이는 대신 ‘맥락’을 되살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퍼블릭 도메인의 자유, 이제는 ‘제도적 윤리’가 필요하다
공유지 보호를 위한 4가지 정책 제안
퍼블릭 도메인을 둘러싼 오용과 사유화 논란이 확산되면서, 단순한 법적 범주를 넘어선 사회적 책임 논의가 요구되고 있다. 공공 자산으로서의 창작물을 존중하고, 디지털 시대의 공유 가치를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정책 방향을 제안한다.
① 출처 명시 및 맥락 보존을 위한 자동 병기 시스템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의 가장 흔한 오용 중 하나는 원작자의 정보와 작품 맥락을 삭제한 채 무분별하게 활용하는 사례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공공 이미지 데이터베이스나 콘텐츠 플랫폼에서 퍼블릭 도메인 자료를 사용할 경우 ▲예술가 이름, ▲창작 연도, ▲작품 설명을 자동으로 병기하는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 이는 ‘출처 표기’를 단순 권장사항이 아닌 플랫폼 설계 단계에서부터 기본값(default)으로 내장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등 공공기관 주도의 API 표준화 사업으로도 연계할 수 있다.
② 퍼블릭 도메인 활용 윤리지침 마련
공공 기관, 온라인 플랫폼, 민간 콘텐츠 제작자 등 다양한 주체가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를 활용하면서 그 기준과 한계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퍼블릭 도메인 활용 가이드라인’을 정부 차원에서 제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윤리 준수 원칙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예술적 무단 편집, 명예훼손 우려, 정치적 이용 금지 등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면, 창작자와 이용자 간 갈등을 줄이고 신뢰 기반의 디지털 공공재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
③ 상업적 활용 시 수익 일부의 공공문화기금 환원
NFT, 생성형 AI 학습, 유튜브 영상 콘텐츠 등에서 퍼블릭 도메인 이미지는 종종 수익 창출의 핵심 도구로 활용된다. 하지만 해당 수익이 원작자에게도, 사회적 공익에도 연결되지 않는 구조는 ‘공유지의 사적 전유’라는 비판을 낳는다. 이에 따라 상업적 활용 시 일정 수익을 문화진흥기금이나 창작자 후원 펀드 등에 기부하도록 하는 ‘공공기금 환원 모델’이 검토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퍼블릭 도메인 기반 NFT 발행 시, 거래 금액의 1~3%를 자동 기부하는 스마트계약 설계 방식이 대표적이다.
④ Web3와 AI 기술 설계에 ‘공유 윤리’ 반영
퍼블릭 도메인의 새로운 위협은 기술의 확장 속도와 무관하지 않다. Web3 기반 토큰화, AI 모델의 무비판적 학습 구조는 공공재를 무한히 소비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 구조는 미비하다. 향후 기술 설계 단계에서부터 ‘공유 기반 알고리즘 거버넌스’를 적용하는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학습 데이터로 활용된 퍼블릭 도메인 콘텐츠의 원작자를 표시하거나, 자동 요약 콘텐츠에서 출처를 병기하도록 하는 기술적 프로토콜이 그 사례다. 이는 기술을 ‘사유화 도구’가 아니라 ‘공유 설계 플랫폼’으로 전환시키는 핵심 지점이 될 수 있다.
공공의 문화, 공공의 윤리로 지켜야 한다
퍼블릭 도메인은 단지 법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창작을 모두가 함께 기억하고, 존중하자는 사회적 약속이다.
지금 그 약속은 흔들리고 있다.
‘자유’를 팔아 사유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공유지를 가장 먼저 침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사용하는 그 이미지는, 정말 공공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이름을 지운 채, 당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인가.
공공의 자유에는 공공의 윤리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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