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글쓰기, ‘많이 쓰면 늘 것'이라는 함정
X 기자
metax@metax.kr | 2025-08-26 07:00:00
"글쓰기 연습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라는 내 질문에, 내게 글쓰기 코칭을 받는 분들 중에는 종종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은 그냥 쓰다 보면 늘지 않을까요?"
"요즘은 AI한테 맡겨서 쓰고 있어요.”
이 대답은 얼핏 들으면 합리적이고, 또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말처럼 들린다. 손을 자주 움직이면 문장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지고, AI의 도움을 받으면 그럴듯한 글이 금세 눈앞에 나타난다. 실제로 SNS에 짧은 감상을 적거나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는 데는 이런 방식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문장이 매끄럽다고 해서, 그것이 곧 ‘좋은 글쓰기 실력의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글이 다듬어진 문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읽히는 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글은 단순히 쓰는 행위를 넘어, 독자가 끝까지 읽고, 무언가를 얻고, 마음에 오래 남는 경험을 해야 비로소 살아 있는 글이 된다.
글쓰기를 요리에 비유하면 이 차이는 금세 드러난다.
즉흥 요리와 글쓰기의 착각
만약 어떤 사람이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매번 냉장고를 열어 무작정 양파, 마늘, 고추장을 꺼내 들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이것저것 집어넣는다. 불은 세게 올렸다가 갑자기 줄이고, 간은 손에 잡히는 대로 넣는다. 그렇게 조리한 음식이 때로는 뜻밖에 괜찮은 맛을 낼 수도 있다. 친구들이 모여 앉아 “오, 이거 의외로 맛있네?” 하고 놀라며 박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히 얻어 걸린 맛’일 뿐이다. 오늘은 적당히 맞았지만 내일은 너무 짜고, 모레는 싱거우며, 그 다음 날은 아예 먹기 힘들 수도 있다. 맛이 일정하지 않고, 다시 재현할 수도 없다. 그 사람은 여전히 요리사라기보다 ‘즉흥적인 요리를 즐기는 아마추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반면, 요리사의 길을 진지하게 걷는 사람은 전혀 다르다. 그는 양파를 썰 때 흘러나오는 매운 향 속에 숨은 단맛을 알고, 익히면 그 단맛이 어떻게 농축되는지 이해한다. 고기를 굽기 전에 온도를 맞추고, 기름이 몇 도일 때 가장 바삭하고 고소한 튀김이 나오는지 실험한다. 심지어 수비드 요리가 왜 저온에서 오랜 시간 조리되어야 하는지, 그 안에서 단백질이 어떤 방식으로 변성되는지까지 과학적으로 공부한다. 단순히 “맛있다”와 “맛없다”라는 감각적 결과만 보지 않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원리와 전통, 맥락을 탐구하는 것이다.
글쓰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착각이 흔하다. “많이 쓰면 언젠가는 늘겠지.” 그러나 글도 요리와 같다. 단순한 반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매번 기분 내키는 대로 쓰다 보면, 오늘은 읽히지만 내일은 밋밋하고, 모레는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 글이 나온다. 결국 독자에게는 늘 “맛이 제각각인 글”만 남게 된다.
글은 요리처럼 연구와 이해, 전략이 필요하다. 글이 독자에게 어떤 맛을 줄지, 어떤 향을 남길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독자들이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재현 가능한 ‘레시피 있는 글’이 완성된다.
독자를 위한 ‘레시피’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누가 이 음식을 먹을 것인가’다. 아이에게 차려줄 밥상이라면 자극적인 향신료를 빼고, 부드럽고 쉽게 삼킬 수 있는 재료를 고른다. 반대로 어른들이 모인 자리라면 복합적인 풍미와 깊은 여운을 고려해 조리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음식이라면 맛뿐 아니라 그릇의 색감, 음식이 놓인 자리,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까지 신경을 곱게 쓴다. 요리는 언제나 먹는 이를 중심에 두고 시작된다.
글도 똑같다. 글은 결국 누군가가 읽어야 완성된다. 아무리 진심을 담았더라도, 독자가 두세 줄 읽다가 덮어버린다면 그 글은 실패다. 글은 나 혼자 감탄하며 즐기는 자화상 같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대화다. 대화가 되려면 상대의 상황과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글쓴이는 글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이 글은 누구를 위한 글인가?
그들은 지금 어떤 문제와 욕구를 갖고 있는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시간을 붙잡을 것인가?
글을 읽은 독자가 마지막 문장을 덮을 때, 어떤 감정을 안고 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 글은 아직 요리로 치면 ‘손님 없는 주방’에 불과하다.
생각해보라. 혼자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때는 대충 해도 괜찮다. 국물 맛이 짜든 싱겁든 그저 배만 채우면 된다. 그러나 누군가를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할 때는 달라진다. 메뉴를 고민하고, 상차림을 준비하며, 상대방이 좋아하는 취향을 떠올린다. 글쓰기도 바로 이와 같다. 나 혼자 끄적이는 메모라면 즉흥적이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독자에게 읽히는 글, 나아가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가야 하는 글이라면 반드시 ‘레시피’를 짜야 한다.
글은 독자를 위한 레시피다. 나만의 재료와 기법으로 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상대방이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글쓴이가 아무리 감동받으며 써 내려갔더라도, 독자가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맛있게 읽히지 않는 글은 나 혼자 먹고 끝나는 음식과 다르지 않다.
글은 상품이다
생각해보면 글쓰기는 가게를 운영하는 일과도 닮아 있다.
가게 주인이 되고 싶다고 해서 아무 상품이나 진열한다고 장사가 되는 건 아니다. 가게를 열었다면, 어떤 상품을 중심에 둘지, 그 상품이 지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인지, 오프라인에서 팔아야 할지 온라인에서 팔아야 할지, 또 어디서 어떻게 팔아야 가장 잘 팔릴지를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포장, 가격, 마케팅 방식까지 세밀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손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물건을 늘어놓는 것”과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은 결국 하나의 ‘상품’이다. 내가 쓰고 싶은 마음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만 쏟아내는 것은 개인의 일기장에서는 괜찮다. 그러나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된다”는 태도는 위험하다. 독자의 시선, 취향, 그리고 그들이 글에 투자할 시간까지 고려해야 비로소 ‘판매되는 글’이 된다.
예를 들어 블로그 글이라면 검색 키워드와 독자의 관심사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검색을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글을 끝까지 읽고, 다시 방문한다. 책을 내겠다고 한다면, 단순히 내 이야기를 묶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 속에서 어떤 필요를 충족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답을 찾고 있는지, 어떤 주제에 목마른지를 정확히 짚어내야 한다.
글은 결국 ‘시장’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시장은 냉정하다. 독자들이 공감하지 않는 글은 금세 잊히고, 아무리 공을 들였더라도 반응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면, 시장을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기획된 글은 오래 회자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따라서 글쓰기를 진지하게 하고 싶다면, 글을 “상품으로서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글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세상과 연결되는 문이 되는 순간이다.
‘많이 쓰면 는다’의 함정
물론 글을 많이 쓰는 경험은 필요하다. 글쓰기는 결국 손끝의 노동이기 때문에, 손을 움직이지 않고는 절대로 늘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치 요리사가 매번 즉흥적으로 재료를 넣고 불을 올리면서 “언젠가 실력이 늘겠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는 결코 늘지 않는다. 오히려 습관적인 시행착오만 반복될 뿐이다.
그렇다면 실력이 쌓이는 순간은 언제일까? 바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다.
“왜 이 글은 중간에 독자가 흥미를 잃고 떠났을까?”
“왜 어떤 문장은 쉽게 읽히는데, 다른 문장은 걸리듯 막혔을까?”
“왜 이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내가 감동받았던 글은 어떤 방식으로 나를 붙잡았을까?”
이 질문들에 성실히 답하려는 순간, 글쓰기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성찰과 분석의 훈련이 된다.
글쓰기의 성장 곡선은 직선이 아니다. 단순히 쓰는 양을 늘린다고 꾸준히 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다 보면 제자리에서 맴돌거나, 나쁜 습관만 굳어진다. 성장의 곡선이 꺾여 다시 위로 솟아오르는 순간은, 자신이 쓴 글을 돌아보고 해부할 때 찾아온다. 문장의 호흡을 점검하고, 글의 구조를 뜯어보며, 어떤 단어가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기록하는 과정 속에서 실력이 자란다.
많이 쓰는 것 자체는 토양에 불과하다. 그 위에 성찰과 분석이라는 비료가 더해져야만 열매가 열린다. 결국 글쓰기의 열쇠는 ‘양’이 아니라 ‘방식’에 있다. 생각 없이 쓴 천 편의 글보다, 성찰 속에서 다듬어진 열 편의 글이 더 큰 성장을 만든다.
글쓰기도 체계적인 접근 필요
나는 글쓰기 코칭을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글도 요리처럼 연구와 기획이 필요해요"
요리사가 신메뉴를 내놓기 위해 수십 번의 시도를 반복하듯, 글쓴이도 한 편의 글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읽고, 문장을 고치고, 구조를 다시 짠다. 때로는 실패한 시도에서 더 큰 배움을 얻고, 예상치 못한 조합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은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결국 그것이 글을 ‘작품’으로 완성시킨다.
좋은 글은 단순히 영감에서 나오지 않는다. 순간의 번뜩임은 불씨일 뿐이다.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큰 불로 타오르려면,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이라는 장작이 필요하다. “이 문장은 독자의 눈길을 잡을 수 있을까?”, “이 대목은 불필요하게 늘어지지는 않을까?”, “이 글을 다 읽은 독자는 어떤 감정을 안고 돌아갈까?” 같은 질문에 답하려는 과정에서 글은 비로소 살아난다.
그래서 글쓰기를 진지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글을 단순한 기록이나 낙서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대해야 한다. 초고는 밑그림이고, 퇴고는 색을 입히는 과정이며, 최종본은 독자 앞에 내놓는 완성된 요리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글은 늘 ‘맛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음식이 요리사의 훈련을 거쳐 탄생하듯, 읽히는 글도 치밀한 준비와 전략 속에서 완성된다. 글쓰기의 본질은 결국 즉흥이 아니라 체계다. 영감이 씨앗이라면, 연구와 기획은 그것을 꽃으로 피우는 토양과 햇빛, 그리고 물이다. 글은 우연히 잘 써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설계 위에서만 재현 가능하게 읽힌다.
글쓰기의 즐거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이 결코 고통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글쓰기를 요리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그 안에는 더 큰 즐거움이 숨어 있다.
새로운 재료를 찾아 나서는 일은 작은 모험과도 같다. 마트에서 생소한 향신료를 발견하거나, 시장에서 처음 보는 채소를 집어드는 순간의 호기심이 요리를 더 풍성하게 만들 듯, 글쓰기도 새로운 주제를 탐구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자료를 모으는 과정은 보물찾기와 같다. 수많은 책과 인터뷰, 경험 속에서 반짝이는 단서를 발견할 때마다 글의 맛은 더욱 깊어진다.
색다른 조리법을 시도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레시피에 적힌 순서를 고집하기보다, 나만의 방식으로 변형해보며 맛의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은 실험실 같은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준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구조나 문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서술 방식이나 전개를 시도하면서 문장을 완성해가는 길은 창조적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때로는 실패도 한다. 요리에서 소금 한 줌이 지나치면 국물이 엉망이 되듯, 글에서도 불필요한 수식어 하나가 흐름을 망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실패조차 다음 시도의 자양분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값진 순간은, 글이 누군가에게 ‘먹힐 때’ 찾아온다. 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이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듯, 내가 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위로를 주고, 새로운 통찰을 안기며, 다시 걸을 용기를 준다면 그것만큼 보람찬 일은 없다. 글은 결국 나 혼자만의 놀이가 아니라, 타인과 감정을 나누는 행위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이 문장에서 힘을 얻었다”라고 말해줄 때, 그 순간이야말로 글쓰기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다.
결국 글쓰기는 훈련의 고단함과 창조의 즐거움, 그리고 나눔의 기쁨이 어우러진 여정이다. 고통과 설렘이 교차하고, 실패와 성취가 번갈아 찾아오지만, 그 모든 과정이 모여 글을 쓰는 사람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글쓰기와 장인의 태도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든, 취미로 하든, 우리는 결국 장인의 태도로 임해야 한다. 대충 만든 음식은 손님이 두 번 다시 찾지 않는다. 대충 쓴 글은 독자가 기억하지 않는다. 그 순간은 잠시 지나갈 수 있어도, 다시 읽고 싶어지는 글, 오래 남는 글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장인은 늘 묻는다.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까?”
“무엇을 빼야 하고, 무엇을 더해야 할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이 질문은 요리사의 질문과도 같다. 소금을 조금 덜 넣어야 할까? 불을 더 줄여야 할까? 혹은 접시에 어떻게 담아야 손님이 더 맛있게 느낄까? 장인은 사소해 보이는 질문조차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글쓴이 역시 문장의 리듬, 단어 하나의 선택, 문단의 길이까지 끝없이 되묻고 다듬어야 한다.
장인의 길은 화려하지 않다. 목수가 하루에도 수십 번 대패질을 하고, 도예가가 수없이 흙을 빚어 깨뜨리듯, 글쓰기도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초고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에서 단단한 문장이 태어난다. 성급함을 버리고, 묵묵히 같은 동작을 반복할 때 비로소 손끝에 감각이 자리 잡는다.
글쓰기는 결국 장인의 수련이다. 매번 조금씩 더 나아지려는 노력이 쌓여, 언젠가 자신만의 문체와 색깔이 드러난다. 그때야 비로소 글은 독자 앞에서 살아 숨 쉬며, “읽히는 글”이 된다. 장인의 태도를 잃지 않는 한,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삶을 담아내는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
글쓰기는 요리와 닮아 있다.
재료를 모른 채 무작정 끓이는 냄비는 우연한 맛만을 남긴다. 한 번쯤은 기대 이상의 맛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 맛을 다시 재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행운일 뿐이다. 그러나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불의 강약을 조절하며, 먹는 이의 기호와 상황을 고려해 설계된 음식은 언제 어디서나 일정한 감동을 준다. 글쓰기도 다르지 않다.
독자를 위한 레시피를 고민하고, 문장의 재료를 고르고 다듬으며, 흐름이라는 불 조절을 신중하게 다룰 때 글은 비로소 정성껏 빚어진다. 그렇게 완성된 글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한 끼의 음식처럼 독자에게 전달된다.
글은 감정의 배설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네는 완성품이다. 쓰는 이의 만족에서 멈추지 않고, 읽는 이의 경험을 끝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글은 요리처럼, 그리고 매장 운영처럼 치밀해야 한다. 어떤 상품을 팔지, 어떤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가게가 오래 살아남을 수 없듯,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은 금세 잊힌다.
그렇게 치열하게 다듬어진 글만이 결국 오래 기억되고, 다시 읽히며,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진다. 글쓰기는 결국 요리와도 같고, 장사의 기술과도 같다. 순간의 영감이 아니라 꾸준한 훈련과 전략이, 그리고 독자를 향한 세심한 배려가, 글을 살아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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