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X 인터뷰:김동현 박사①] 한류 0.0의 개척자
X 기자
metax@metax.kr | 2025-12-05 22:30:03
사우디 건설현장의 설계요원으로 출발한 한 청년이 일본 오사카 연구실에서 3D 그래픽을 만나고, 세계 최초의 디지털 문화재 복원과 한국 최초 VFX 영화 제작을 이끌었다. ‘한류 0.0’이라 불릴 만한 개척기의 뒷이야기를, 김동현 박사에게 들어본다.
성 명 김 동현 (金 東鉉)
학 력
1972. 3 ~ 1975. 2 경복고등학교
1975. 3 ~ 1983. 2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공학사)
1984. 8 ~ 1986. 3 오사카대학 환경공학과 연구생
1986. 4 ~ 1988. 3 오사카대학 환경공학과 수사과정 환경디자인 전공 (공학수사)
1988. 4 ~ 1991. 3 오사카대학 환경공학과 박사과정 환경디자인 전공 (공학박사)
경 력
1991. 3 ~ 1996. 5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가상현실연구실 실장
1996. 6 ~ 1998. 10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가상현실연구실 실장
1999.1.1. ~ 1999.2.4. 게임종합지원센터 설립준비사무국 국장
1999.2.5. ~ 2000.12.19 게임종합지원센터(현 한국콘텐츠진흥원) 소장
2000.11.7. ~ 2000.12.19 게임아카데미 원장 (겸임)
2001.3.1. ~ 2012.3.23 세종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
2001.3.1. ~ 2005.2.28 세종대학교 영상대학원 원장
2001.3.29. ~ 2004.12.31 ㈜디지털실크로드 대표이사
2007.12.1. ~ 2008.8.31 세종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대학원 원장
2016.6. ~ 2017.3 푸토엔터테인먼트 가상현실연구소 소장
2017.8 ~ 2021.7 가상현실콘텐츠산업협회 회장
2021.8 ~ 현재 가상현실콘텐츠산업협회 명예회장
“CAD 플로터 앞에서, 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Q.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유학을 결심하셨다고요.
김동현: 맞습니다.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에 입사해 사우디 알지다 해군기지 프로젝트에 파견됐습니다. 미 공병단(COE)이 설계했고, 현장에서 처음 CAD 시스템을 접했어요. 도면이 드럼통만 한 플로터에서 뽑혀 나오는 걸 보면서 ‘이건 설계 언어를 바꾸는 혁명이다’라는 직감이 왔죠. 그래서 해외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2D CAD는 끝났다, 앞으로는 3D다”
Q. 오사카대 연구실에 들어갔을 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요?
김동현: 첫날 지도교수님이 오토바이를 수리하시더군요. 연구실 생활을 하려면 오토바이, 요트, 스키 같은 레저도 해야 한다며 바로 오토바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가는 훈련까지 시켰는데, 그 경험이 일본식 연구문화의 자유로움을 보여줬죠.
또 하나, CAD 플로터를 찾다가 창고에서 먼지 쌓인 장비를 발견했어요. 이유를 묻자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장에서 이미 쓰는 기술은 연구할 필요가 없어. 앞으로는 3차원 그래픽 시대다.” 그 말이 제 연구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1987년, BIM 개념을 먼저 말하다
Q. 건축생산 시스템의 미래상을 논문으로 제안하셨는데요.
김동현: 일본건축학회 100주년 공모전이었죠. 저는 *“기획부터 설계, 시공, 유지관리까지 하나의 3D 데이터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말하는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과 같은 개념입니다. 당시 학회는 격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외국인 유학생에게 최우수상을 줄 수 없다고 해서 일본인 학생과 공동 우수상으로 발표됐죠. 아쉬움도 있었지만, 제 주장이 기록에 남았다는 게 중요했습니다.
세계 최초 디지털 헤리티지, 나라 주작문
Q. 문화재 디지털 복원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김동현: 1986년,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가 주작문 복원 CG 영상을 의뢰했습니다. 일본 학생들은 전통건축 연구로 취업이 어려울까 봐 꺼렸고, 제가 자원했습니다. 부재 하나하나를 3D로 모델링하고 실제 시공 순서대로 조립하는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설계 도면의 오류까지 찾아낼 수 있었죠. 그 결과 1998년 실제 복원에 제 데이터가 반영됐습니다.
당시엔 ‘동양 건축은 원래 도면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어요. 도편수가 말과 경험으로 전수하던 방식을 현대 시스템공학으로 해석하면 코드화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죠. 이게 오늘날 BIM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KIST 입사와 ‘수염 다짐’
Q. 박사학위 후 일본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귀국하셨죠.
김동현: 네,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강제 징병으로 대학 공부를 못하셨던 아버지께서, “배운 지식을 조국 발전에 쓰라”고 당부하셨거든요. 귀국 후 취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건축계는 CAD를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KIST에 입사했는데, 놀란 건 연구소 불이 일찍 꺼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증권투자 열풍 때문이었죠. 그때 ‘적어도 내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겠다’고 다짐하며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30년 뒤인 2021년, 드디어 턱수염까지 기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디지털 문화재 복원: 미륵사지 서탑
Q. KIST에서 첫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요?
김동현: 1991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디지털 복원이었습니다. 7층인지 9층인지 논쟁이 있었는데, 저는 컴퓨터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최대한 활용해 두 가지 모델을 보여주고 역사학자들이 판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나라 디지털 헤리티지의 시작이었죠.
“VFX는 미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Q. 영화 ‘구미호’ VFX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김동현: KIST에서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가 협업하며 프로젝트를 맡았습니다. 가장 극적이었던 건 저승열차 장면이었어요. 세트는 24mm 렌즈로 찍고, 열차는 망원렌즈로 찍어 합성이 불가능했죠. 결국 현장에서 좌표를 역산하고 지미집 카메라로 조정해 해결했습니다. 이후 현장 감독들도 제 의견을 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는 여의주가 배우 몸 위를 구르는 장면이었는데, 당시엔 3D 스캐너가 없어 MRI로 신체 데이터를 추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발했죠.
Q. 결과는 어땠습니까?
김동현: 원래 5분 분량만 VFX였는데, 피아노선 지우기 작업까지 하다 보니 70분을 작업했습니다. 영화는 30만 관객을 기록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이른바 ‘구미호 키즈’들이 헐리우드로 유학을 떠났고, 나중에 위지윅스튜디오 같은 기업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기술의 실험은 결국 산업의 문법을 바꾼다”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CAD를 본 순간부터, 일본 연구실의 3D 실험, 세계 최초의 디지털 문화재 복원, 그리고 한국 최초 VFX 영화까지. 김동현의 궤적은 ‘한류 0.0’이라 불릴 만하다.
Q. 지금 돌아보면, 공통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김동현: 결국 개인의 실험이 산업의 문법을 바꿉니다. 문화는 무형이라 쓰레기도 남기지 않습니다. 잘 만든 콘텐츠는 사라지지 않고 다음 창작의 자원이 되죠. 그것이 제조업과 다른 문화산업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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