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동맹국의 사이버보안·AI 분야 경영진과 기술 리더 200여 명이 2026년 6월 14일 공개서한을 통해 앤트로픽(Anthropic)의 대형언어모델 '페이블(Fable)'과 '미토스(Mythos)'에 대한 수출 통제 지침 철회를 미 상무장관 하워드 루트닉(Howard Lutnick)과 국가사이버국장 숀 케이른크로스(Sean Cairncross)에게 공식 요청했다.
서명에는 구글 엔지니어, 존스홉킨스·MIT·하버드·스탠퍼드·UCLA 등 주요 대학 교수진, 소포스(Sophos)·줌(Zoom)·버라코드(Veracode)·체인가드(Chainguard) 등 사이버보안 기업 CEO와 CISO들이 대거 참여했다. '인터넷 개척자'로 불리는 폴 빅시(Paul Vixie), PGP 암호화의 창시자 필립 짐머만(Philip Zimmermann), 브루스 슈나이어(Bruce Schneier) 하버드대 교수 등 보안 분야 원로들도 이름을 올렸다.
서한의 배경: 무엇이 문제인가
서한은 앤트로픽의 미토스 계열 모델이 소프트웨어 취약점 탐지와 익스플로잇 작성에 뛰어난 성능을 보인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능력이 미토스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핵심 반론으로 제시했다.
서명인들은 실제 업무에서 GPT-5.5, 오퍼스(Opus), 소넷(Sonnet)은 물론 중국 모델 키미(Kimi) 2.7까지 다양한 모델을 보안 감사와 레드팀 작업에 일상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AI가 버그를 찾고 작동하는 익스플로잇을 생성하는 능력은 이미 지난해부터 인간을 초월하는 수준에 도달했으며, 미토스만이 이 능력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제공한다는 수출 통제의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수출 통제의 발단이 된 연구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연구는 인간이 작성한 코드 섹션의 보안 취약성을 판별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안전한 코드를 작성하는 모델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 역량이지 공격적 능력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앤트로픽은 페이블 모델에 사이버 공격 악용을 막기 위한 강력한 보호 장치를 내장했으며, 그 수준이 보안 커뮤니티 사이에서 출시 당일 농담거리가 될 만큼 엄격했다고 서한은 전했다.
핵심 논거: 방어자를 무장해제하는 역설
서명인들이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이번 조치가 공격자가 아닌 방어자를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사이버 방어의 핵심은 속도다. 공격자가 취약점을 찾기 전에 방어자가 먼저 발견하고 패치해야 한다. AI는 수십 년치 레거시 코드를 포함한 방대한 코드베이스에서 취약점을 빠르게 찾아내는 데 결정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그 도구를 방어자에게서 빼앗는 것은, 양측이 같은 무기를 쓰는 전장에서 한쪽의 무기만 압수하는 것과 같다는 논리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정학적 비대칭이다. 서한은 중국의 공개 오픈웨이트 모델이 이미 최고 수준의 미국 모델과 수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중국 정부는 공개되지 않은 내부 역량을 별도로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방어자는 최고 성능 모델 접근이 차단된 채 중국의 공격자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규제 방식에 대한 제언: "규제한다면 이렇게 하라"
서명인 전원이 AI 규제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서한은 규제가 필요하다면 갖춰야 할 네 가지 요건을 제시했다.
첫째, 업계와 학계의 의견을 반영한 과학적 평가에 기반해야 한다. 둘째, 민주적 규칙 제정 절차를 통해 마련돼야 한다. 셋째,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하되 시정할 충분한 시간을 부여해야 한다. 넷째, 미국 공공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만 적용해야 한다.
현행 수출 통제는 이 네 가지 요건 중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 서한의 판단이다.
비즈니스·정책 인사이트: 이 서한이 던지는 다섯 가지 메시지
이번 공개서한은 기술 커뮤니티의 단순한 항의를 넘어, AI 거버넌스를 둘러싼 복합적인 구조 문제를 드러낸다.
첫째, AI 수출 통제의 실효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다. 특정 모델을 통제해도 동급 성능의 대안이 이미 여럿 존재한다면, 통제는 미국 기업의 경쟁력만 제약하고 실제 안보 효과는 없다. 이 역설은 AI 수출 통제 정책 설계의 핵심 딜레마로, 이번 서한은 그 딜레마를 공개적으로 공론화했다.
둘째, '안보를 위한 통제'가 안보를 약화시키는 역설이다. 반도체·장비 수출 통제는 물리적 공급망을 겨냥하기 때문에 실질적 지연 효과가 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모델은 복제와 배포가 즉각적이고 무한정 가능하다. 통제의 대상과 수단이 기술의 특성과 맞지 않는다는 구조적 문제다.
셋째, 앤트로픽의 시장 리스크와 신뢰도 문제다. 수출 통제는 앤트로픽 모델의 기업 고객 채택을 직접 위축시킨다. 규제 불확실성이 지속되면 기업들은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안 모델로 이동한다. 200여 명의 업계 리더가 공개서한에 서명했다는 것은 이 불확실성이 실제 비즈니스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방증한다.
넷째, AI 거버넌스의 절차적 정당성 문제다. 서한이 규제 내용보다 규제 방식을 강하게 문제 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과학적 근거, 공개 의견 수렴, 투명한 집행, 시정 기회 보장이라는 네 가지 요건은 어떤 기술 규제에도 적용돼야 할 원칙이다. AI 규제가 성숙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절차적 기반을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이 서한은 이번 사안을 넘어 AI 거버넌스 전반에 대한 기준 설정 시도로 읽힌다.
다섯째, 민간 보안 커뮤니티의 정책 개입 역량이 성숙했다는 신호다. 200여 명의 실무 보안 전문가가 집단적으로 정책 서한을 발행하고, freefable.org라는 전용 채널까지 개설해 추가 서명을 받는 구조는 사이버보안 분야가 단순한 기술 집단을 넘어 정책 행위자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AI 안보 정책을 둘러싼 민관 갈등에서 이 같은 집단 행동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공개서한은 2026년 6월 14일 발표됐으며, freefable.org를 통해 추가 서명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