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나 유적지에 XR을 도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어떤 장비를 선택할 것인가다. 헤드셋을 쓰고 복원된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VR, 태블릿으로 현실 공간 위에 과거의 모습을 겹쳐 보는 AR, 화면을 움직이며 장소를 둘러보는 360도 가상투어가 모두 후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몰입적인 기술’이 언제나 가장 좋은 선택일까. 이탈리아 살레르노대학 등의 연구진은 고대 로마 유적 빌라 레지나를 세 가지 방식으로 구현하고, 이용자가 느끼는 동기와 현존감, 참여 경험을 비교했다.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승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 가지 경험이다.

같은 유적을 세 가지 방식으로 만들었다

비교 연구에서 어려운 점은 기술뿐 아니라 콘텐츠까지 달라지기 쉽다는 것이다. 한쪽은 정교한 3D 모델을 사용하고 다른 쪽은 단순한 사진을 보여준다면, 결과가 장비 때문인지 콘텐츠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연구진은 이 차이를 줄이기 위해 빌라 레지나의 동일한 디지털 자산과 정보, 서사 구조를 바탕으로 VR, VR360, AR 콘텐츠를 제작했다. 유적의 건축 구조와 저장 공간, 유물 등을 사진측량과 3D 모델링으로 복원한 뒤 각 플랫폼에 맞게 구현했다.

VR 조건에서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와 컨트롤러를 사용해 복원된 공간을 1인칭 시점으로 이동했다. VR360 조건에서는 태블릿으로 360도 파노라마를 돌려가며 살펴봤다. AR 조건에서는 LiDAR 또는 RGB-D 센서가 있는 태블릿을 통해 디지털 복원물을 현실 공간 위에 배치해 관찰했다.

참가자 90명을 세 조건에 나눠 비교했다

연구에는 성인 90명이 참여했다. 참가자는 세 조건에 무작위로 배정됐고, VR·VR360·AR 집단에 각각 30명이 포함됐다. 체험 직후에는 내재적 동기, 현존감, 사용자 참여를 측정하는 설문에 응답했다. 연구진은 각 참가자가 콘텐츠를 탐색한 시간도 기록했다.

이 가운데 20명은 약 20분 동안 진행된 반구조화 인터뷰에도 참여했다. VR 7명, VR360 6명, AR 7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체험 중 느낀 흥미와 현존감, 사용 편의, 전반적인 경험을 설명했다.

연구는 한 사람이 세 기술을 모두 체험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 하나의 조건만 경험하는 집단 간 설계를 사용했다. 따라서 결과는 동일한 사람이 세 기술을 직접 비교한 선호도 조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 집단의 평균 차이를 분석한 것이다.

VR은 ‘그곳에 있다’는 감각을 가장 강하게 만들었다

가장 큰 차이는 공간적 현존감에서 나타났다. 7점 척도에서 VR 집단의 평균은 6.12였다. AR은 5.41, VR360은 5.02였으며, 세 집단 사이의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했다. 보정된 사후 비교에서도 VR은 AR과 VR360보다 높았고, AR도 VR360보다 높았다.

VR은 집중된 주의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평균은 VR 5.71, AR 5.33, VR360 5.11이었다. VR 집단은 두 태블릿 기반 조건보다 유의하게 높은 점수를 보였다. 미적 매력에서도 VR이 AR과 VR360보다 높았다.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VR 참가자들은 호기심과 정서적 관여, 계속 탐색하고 싶은 감각을 자주 언급했다. 다만 일부는 체험 초기에 방향감각의 혼란이나 적응 시간이 필요했다고 답했다. 깊은 몰입이 자동으로 편안한 사용을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AR은 실제 공간과 연결된 ‘현실감’에서 앞섰다

VR이 모든 항목에서 가장 높은 것은 아니었다. 현실감 점수는 AR이 5.89로 가장 높았다. VR은 5.77, VR360은 5.21이었다. AR은 두 조건보다 유의하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논문은 이를 현실 공간과 디지털 복원물이 연결되는 ‘맥락적 정박’으로 해석한다. VR은 실제 환경을 가리고 복원된 세계 안으로 이용자를 이동시킨다. 반면 AR은 눈앞의 장소에 사라진 건축물과 유물을 겹쳐 보여준다. 이용자는 가상의 복원물이 실제 유적의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용 편의에서는 AR과 VR360이 VR보다 높았다. 평균은 AR 5.91, VR360 5.88, VR 5.02였다. AR과 VR360 사이에는 유의한 차이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두 조건은 모두 VR보다 높은 사용 편의 점수를 보였다.

360도 투어는 덜 몰입됐지만 다른 역할이 있었다

VR360은 공간적 현존감과 관여도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연구진은 화면을 회전해 둘러볼 수는 있지만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대상과 상호작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시각적으로 장소를 볼 수 있어도 이용자가 직접 행동할 여지는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360도 투어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인터뷰에서 VR360 참가자들은 쉬운 접근과 편안한 탐색, 시각적 일관성을 언급했다. 헤드셋 없이 태블릿으로 사용할 수 있어 원격 관람이나 방문 전 사전 탐색처럼 강한 몰입보다 접근성이 중요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세 기술의 차이는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기술

연구에서 확인된 강점

고려할 점

VR

공간적 현존감, 집중된 주의, 미적 매력

헤드셋과 컨트롤러가 필요하고 초기 적응이 발생할 수 있음

AR

현실감, 실제 장소와 디지털 복원의 연결, 사용 편의

현장 환경과 기기 성능의 영향을 받음

VR360

쉬운 접근, 편안한 관람, 원격 활용 가능성

공간적 현존감과 능동적 상호작용이 상대적으로 낮음

평균 체험시간이 길었다고 효과가 입증된 것은 아니다

평균 탐색 시간은 VR이 1,142초로 가장 길었다. VR360은 983초, AR은 867초였다. 각각 약 19분, 16분, 14분에 해당한다.

다만 논문은 이 시간 차이에 대한 추론통계 결과를 제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VR이 이용시간을 통계적으로 증가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연구의 표본에서 VR 집단의 평균 탐색 시간이 가장 길었다는 기술적 결과로 읽어야 한다.

동기, 현존감, 사용자 참여와 탐색 시간 사이에도 정적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그러나 상관관계만으로 높은 현존감이 긴 이용시간을 만들었다거나, 오래 사용해서 현존감이 높아졌다고 인과관계를 정할 수는 없다.

이 연구는 ‘VR이 학습에 가장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연구가 측정한 것은 체험 직후의 동기, 현존감, 사용자 참여에 관한 자기보고와 탐색 시간이다. 유적에 관한 지식을 얼마나 정확하게 습득했는지, 기억이 얼마나 오래 유지됐는지, 실제 방문이나 재방문으로 이어졌는지는 측정하지 않았다. 결과를 ‘VR이 문화유산 학습 효과를 높였다’고 바꿔 말하면 연구 범위를 넘어선다.

표본도 학생과 연구자를 포함한 고학력자 중심이었다. 한 곳의 고대 로마 유적에서 진행된 결과를 어린이, 고령층, 다른 문화권의 이용자나 미술관·자연유산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동일한 디지털 자산을 사용했더라도 체험 조건이 완전히 같았던 것은 아니다. VR은 헤드셋과 컨트롤러를 사용했고, AR과 VR360은 태블릿으로 구현됐다. 연구진도 렌더링과 상호작용, 시각적 품질을 각 기기에 맞게 조정해야 했기 때문에 플랫폼 사이의 완전한 동등성은 확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현재 공개된 PDF는 최종 교정 전 Article in Press다. 방법 부분에서는 내재적 동기 척도를 5점 척도로 설명하지만 결과표의 평균은 5점을 넘고, 사용자 참여 척도의 일부 사후비교도 본문과 표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 리뷰에서는 해당 수치를 핵심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다. 최종 게재본에서 수정되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장비의 순위보다 경험의 목적이다

이 연구는 VR, AR, 360도 투어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유적을 보여주더라도 어떤 경험을 만들고 싶은지에 따라 기술 선택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방문 전에 장소의 구조를 익히거나 멀리서 유적을 둘러보게 하려면 VR360이 적합할 수 있다. 실제 현장에서 사라진 건축물을 원래 위치에 겹쳐 보여주려면 AR의 장점이 살아난다.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을 깊이 탐색하고 장소 안에 들어간 감각을 제공하려면 VR이 더 유리할 수 있다.

가장 몰입적인 기술이 언제나 가장 좋은 기술은 아니다. 문화유산 XR의 성패는 장비의 성능보다 관람객이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방식으로 장소를 이해하게 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이 논문의 가장 중요한 결과도 세 기술의 순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할을 구분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