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프라 전쟁의 새 변수, 일본이 움직였다

김하영 기자

hashe@metax.kr | 2025-10-13 07:00:17

Fujitsu, NVIDIA와 손잡고 AI 인프라 협력 강화 발표

인공지능 산업의 경쟁 구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승부의 무게가 모델의 성능 뿐 아니라, 그 모델을 지탱하는 인프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NVIDIA를 중심으로 칩과 클라우드를 결합한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하고, 중국은 자국 반도체와 자체 대형 언어 모델을 통합하며 기술 주권을 강화하고 있다. 이 두 강대국의 경쟁 사이에서 일본이 조용히, 그러나 의미 있는 움직임을 보였다. 

https://global.fujitsu/en-global/pr/news/2025/10/03-01

2025년 10월, 일본의 ICT 대표기업 Fujitsu가 NVIDIA와 손잡고 AI 인프라 협력 강화를 공식 발표한 것이다. 이 파트너십은 단순한 기술 제휴를 넘어, AI 산업의 구조적 방향을 다시 짜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기술의 패권이 모델에서 인프라로 이동하는 이 시점에, 일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제3의 축을 세우려 하고 있다.

일본의 IBM, 인프라 기업으로 변신하다

일본의 Fujitsu는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의 IBM’이라 불려왔다.

1935년 설립된 이 기업은 국가 전산망과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고, 슈퍼컴퓨터 ‘후가쿠(富岳)’를 개발한 일본 ICT 산업의 중추다. 과거에는 서버, 반도체, 통신 장비 등 하드웨어 제조에 강점을 가졌지만, 최근에는 AI·클라우드·고성능컴퓨팅(HPC)을 결합한 서비스 중심 기업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특히 자체 개발한 MONAKA CPU와 Digital Annealer(양자 영감형 컴퓨팅) 기술은 Fujitsu가 단순한 시스템 통합(SI) 기업을 넘어, AI 인프라 자체를 설계할 수 있는 기술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두 기술은 이번 NVIDIA와의 협력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는다.

이번 협력의 핵심은 “AI 에이전트 통합 풀스택 인프라” 구축이다.

Fujitsu의 MONAKA CPU와 NVIDIA GPU를 NVLink Fusion으로 연결해 서버와 데이터센터 수준에서 고속 연산을 수행하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골자다. 이를 바탕으로 헬스케어, 제조, 로보틱스 등 각 산업에 특화된 AI 에이전트 플랫폼을 함께 개발할 계획이다.

공식 발표문에서 Fujitsu는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AI 시스템”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는 AI를 단순한 도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산업 현장에 함께 성장하는 자가진화형 파트너로 확장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양사는 먼저 일본 내 인프라를 구축한 뒤, 글로벌 시장으로의 단계적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응용이 아니라 인프라를 장악하라

이번 협력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응용’이 아닌 ‘인프라’의 장악이다. Fujitsu는 AI 응용 서비스 시장보다 한 단계 아래, 연산과 연결을 담당하는 컴퓨팅 인프라 층을 선점하려는 전략을 택했다.
이는 미국이 NVIDIA 생태계를 통해 세계 AI 연산 표준을 주도하고, 중국이 자체 반도체와 대형 모델로 기술 내재화를 꾀하는 상황 속에서, 기반 기술 주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대응이라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축은 산업별 맞춤형 AI 에이전트다.

Fujitsu는 범용 대형 모델(LLM)이 아닌, 제조·의료·로봇 등 분야별로 특화된 현장형 AI를 지향한다.
이는 AI의 ‘현실 적용성’을 중시하는 일본식 접근으로, 효율보다 신뢰와 지속성을 중점에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부분은 지속적 자가진화 시스템이다. 

Fujitsu가 강조한 “학습과 진화” 개념은 단순한 기술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AI를 도입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데이터를 학습하며 스스로 개선되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장기적 유지비용을 줄이고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기술 철학이 깔려 있다.

결국 이번 협력은 ‘AI를 사용하는 기업’에서 ‘AI의 기반을 설계하는 기업’으로 Fujitsu가 방향을 틀었다는 선언이자, AI 산업의 구조적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전략적 포지셔닝

이번 협력은 AI 패권 구도 속에서 일본이 선택한 전략적 위치를 보여준다. Fujitsu는 NVIDIA라는 미국의 핵심 기술 생태계에 참여하면서도, 자체 CPU와 슈퍼컴퓨팅 역량을 결합해 부분적 기술 독립성을 확보하려 한다. 이는 완전한 종속도, 완전한 자립도 아닌, ‘연결 속의 자율성’을 택한 일본식 전략이다.

https://blogs.nvidia.com/blog/fugakunext/

이 방향은 글로벌 AI 질서의 또 다른 모델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이 플랫폼 중심의 폐쇄형 구조를, 중국이 내재화 중심의 독자 노선을 택했다면, 일본은 개방형 협력과 자국 기술의 병행을 통해 균형 잡힌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 움직임은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 기술권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Fujitsu의 AI 인프라 전략이 상용화될 경우, 삼성전자·NEC·소니 등과의 반도체·로보틱스 협력 구조가 새로운 형태로 재편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용 로봇, 의료 장비, 디지털 트윈 등 현장 중심의 AI 응용 분야에서 아시아 연합의 가능성도 열린다.

AI 산업혁명의 두 번째 막

Fujitsu와 NVIDIA의 협력은 AI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AI를 ‘활용하는 기술’에서 ‘설계하고 유지하는 기술’로 옮겨가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 변화를 인프라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기술 주권을 되찾으려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제 질문은 명확하다.

AI 경쟁의 승패는 모델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 모델을 지탱하는 인프라의 깊이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의 무대 한가운데, 일본이 다시 한 번 기술 강국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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