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점이란 이름으로 정치가 움직일 때
광화문덕
metax@metax.kr | 2025-12-12 09:00:00
워너 브러더스 디스커버리(WBD) 매각을 둘러싼 미국 법무부(DOJ)의 딜레마는 낯설지 않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와, 반독점 법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모습은, 오히려 오늘의 한국이 매일 목도하는 장면과 닮아 있다.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같은 상원의원들이 DOJ에 보내는 공개서한은 정치적 압박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 개입을 하지 말라”는 요구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미국 행정부의 독립성이 시험대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정치적 중립성과 법적 판단이 충돌할 때, 규제 기관은 어떻게 선택하는가?"
미국 DOJ가 겪는 이 딜레마는 사실 한국에서는 더 오랜 시간, 더 많은 방식으로 반복되어 왔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는 기관은 존재하는가
한국에서 공정거래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검찰, 금융감독기관 등 규제·집행 기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독립성을 의심받는다. 기업 제재가 일어나면 “정권 코드 맞추기”, 제재가 없으면 “특혜”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이것은 제도와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구조의 문제다. 권력에 의해 임명되고, 정권의 기조에 따라 정책이 바뀌는 시스템에서는 기관의 독립성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지금 미국 DOJ가 WBD 심사를 앞두고 겪는 상황도 같다.
승인하면 “정치적 특혜”, 막으면 “정치적 보복”
AT&T–타임 워너 합병 소송 당시에도 트럼프의 CNN 혐오 발언이 판결을 뒤흔들 뻔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대통령의 선호를 의심받는 후보가 등장했다. 정치적 의혹이 논점을 잠식하는 순간, 규제는 신뢰를 잃는다.
더 큰 문제는 ‘정치’를 탓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메커니즘은 이미 오랫동안 작동해왔다. ▲특정 언론사의 방송 허가 취소를 둘러싼 정치논란 ▲재벌 총수 사면을 둘러싼 경제논리 vs 정치논리 대립 ▲대기업 인수합병(M&A)에 대한 정권별 다른 잣대 등 이 모든 사례에서 핵심은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정책 판단인가, 권력 판단인가?”
미국 DOJ는 지금 그 질문의 한가운데 있다. WBD 매각 심사가 ‘정치적 외압’으로 보이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치적 압박을 완전히 무시하면, 또 다른 정치적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
정치적 중립성과 법적 판단이 충돌할 때, 규제 기관은 결국 “양쪽 모두의 신뢰를 잃는 길”과 “한쪽만의 분노를 감수하는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반독점 심사의 본질이 흐려지는 순간
WBD 매각 문제의 본질은 정치가 아니다. 미디어 산업의 구조적 집중, 소비자 비용 증가, 콘텐츠 시장의 경쟁 저하다. 그러나 지금 그 핵심 논점은 완전히 밀려나 있다. 워런·샌더스 등의 서한이 던진 메시지는 두 가지다.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라”
“그러나 특정 기업은 정치적 영향력을 받고 있다”
이 모순적 요구는 DOJ에 사실상 이런 선택을 강요한다. 정치적 오염 의혹을 피하려면, 오히려 심사를 더 엄격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하면 또 정치적 반발을 불러온다.
한국에서도 공정위가 특정 기업을 제재할 때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 “정권이 미워서 때린 것”이라는 프레임과 “정권이 봐주려고 약하게 한 것”이라는 프레임이 동시에 등장한다.
결국 심사의 원칙은 사라지고, 심사의 ‘의도’만이 정치권과 언론의 소재가 된다.
절차적 독립성 없이는 아무 것도 지킬 수 없다
한국에서는 여론과 정치에 따라 기업 정책이 흔들릴 때가 많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결과를 경험해왔다. 기업 M&A가 정권 교체에 따라 뒤집히고, 규제 기준이 정책이 아니라 정치에 따라 바뀌고, 시장의 룰은 기업이 아니라 권력자가 만든다.
미국은 제도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강력한 견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이번 WBD 논란은 그조차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반독점 심사의 신뢰는 단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절차를 얼마나 지켜낼 수 있는가"
한국에서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반복해서 목도한 것은, 절차가 깨지는 순간 시장도, 기업도, 소비자도 모두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판단하지 않으면, 다음 기업은 더 큰 위험에 놓인다
WBD 매각을 둘러싼 미국의 혼란은 결국 한국이 던져야 할 질문으로 귀결된다.
"규제 기관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 시작할 때, 피해를 보는 것은 누구인가?"
기업인가? 언론인가? 정부인가? 아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시장’ 그 자체다.
정치가 시장의 룰을 재단하는 순간, 그 사회의 산업 경쟁력은 서서히 침식된다. 미국은 지금 그 위기 신호를 보냈고, 한국은 그 신호를 무겁게 받아야 한다.
[ⓒ META-X.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