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은 변하는가, 드러나는가

광화문덕 칼럼니스트

metax@metax.kr | 2026-05-08 10:47:48

가상공간, 아바타, 그리고 정체성에 대하여

어젯밤 10시쯤, 서강대 가상융합대학원 로비를 나섰다. 가상융합이용자론 이수영 교수님의 수업이 끝난 뒤였다. 

바깥공기는 어딘가 눅눅했다. 비가 온 것도 아니고, 맑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날씨였다. 구름은 하늘 한가운데 얇게 걸려 있었고, 캠퍼스 건물 유리창에는 밤이 오기 전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학교 정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수업 중에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되감겼다.

경험주의. 현실 속의 가상성. 가짜 세상. 아바타. 데카르트. 정신과 몸.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현실 속에 가상성이 존재한다는 말. 가짜 세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우리는 흔히 가상공간을 현실과 분리된 세계로 생각한다. 진짜 삶은 오프라인에 있고, 온라인은 그저 꾸며낸 이미지라고 여긴다. 하지만 수업을 듣다 보니, 그 구분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늘 어떤 이미지를 입고 살아간다. 회사에서는 직장인다운 태도를, 학교에서는 학생다운 태도를, 모임에서는 그 관계에 맞는 표정을 선택한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만 연출된 것이 아니다. 현실의 우리 역시 상황과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구성하고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현실도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은 아니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특정한 분위기를 소비하고, 카페에서 하나의 취향을 연출하며,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장면을 고른다. 어떤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조금 다른 표정과 태도를 갖는다.

그렇다면 가상공간만을 ‘가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가상공간은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허구의 세계라기보다, 현실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자기표현과 정체성 구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에 가깝다. 아바타는 현실의 나와 단절된 허구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모습,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모습, 그리고 사회적 기준 속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나일 수 있다.

교수님은 수업 중 아바타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바타는 정신이 몸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오래 머물렀다. 데카르트가 말한 정신과 몸의 구분. 생각하는 나, 존재하는 나. 아바타는 어쩌면 몸 없는 정신이 다시 몸을 갖고 싶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얼굴. 내가 선택한 옷. 내가 선택한 이름. 내가 머물기로 한 장소.

그 안에는 분명히 내 바람이 들어 있다.

내가 현실에서 다 드러내지 못한 나. 내가 되고 싶은 나. 내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

그래서 나는 아바타가 내 정신이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설명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아바타는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선택한다. 머리 모양을 고르고, 표정을 고르고, 옷을 입히고, 이름을 붙인다.

그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는 조금씩 고백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다.”
“나는 이렇게 보이고 싶다.”
“나는 이 세계에서만큼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다.”

그런데 수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체성은 단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주변 사람들이 나를 멋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멋짐은 사회적 정체성이 되지 못한다.

그 말은 조금 서늘했다.

나는 나인데, 내가 나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나라는 존재는 혼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내가 선택한 나이면서, 동시에 타인이 반응한 나이기도 하구나.”

그 생각이 들자 온라인 공간이 다르게 보였다.

가상공간은 흔히 자유로운 공간처럼 보인다. 현실의 계급도, 직함도, 나이도, 사회적 위치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곳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바타가 모이는 곳에도 규범은 있다. 그 세계에도 멋짐의 기준이 있고, 인기의 기준이 있고, 어울림의 방식이 있다. 누군가는 더 주목받고, 누군가는 지나쳐진다. 어떤 말투는 환영받고, 어떤 태도는 배척된다. 현실의 사회적 잣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한 것뿐이다.

그때 문득 브런치가 떠올랐다.

나는 온라인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광화문덕’으로 살아간다.

광화문덕

그 이름은 그냥 닉네임이 아니다. 현실의 이름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나 거짓 이름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내가 다 말하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이 그 이름 아래에서 조금 더 선명해진다.

나는 이곳, 브런치란 공간에서 글을 쓴다. 와인에 대해 쓰고, 삶에 대해 쓰고, 기술에 대해 쓰고, 어느 날의 막막함에 대해 쓴다. 현실에서는 쉽게 꺼내지 못한 말들이 이상하게도 그 공간에서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가끔은 내가 광화문덕을 만든 것인지, 광화문덕이 나를 조금씩 다시 만들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처음에는 내가 그 이름을 선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름은 나에게 어떤 태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라고. 쉽게 흘려보내지 말라고. 감정을 문장으로 붙잡아보라고. 세상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 번 더 들여다보라고.

그렇다면 광화문덕은 가짜인가.

아니다. 그는 나의 일부다. 어쩌면 현실의 나보다 더 솔직한 나일 때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독자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나이기도 하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공감해 줄 때, 누군가 댓글을 남겨줄 때, 누군가 “이 문장이 좋았다”라고 말해줄 때, 광화문덕이라는 존재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체성은 내 안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반응을 통과하며 형태를 얻는다. 

수업 중 교수님은 두 가지 사례를 들려주셨다.

하나는 육아 이야기를 쓰던 작가의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육아 경험을 글로 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팔로워가 늘어나자, 점점 독자들이 좋아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결국 작가 설명마저 바뀌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 그 사람의 정체성이 변한 걸까?”

물론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처음에는 육아 작가였는데, 나중에는 대중이 원하는 콘텐츠를 쓰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육아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육아는 그가 가진 삶의 소재였고, SNS는 그가 자신을 드러낼 무대였으며, 팔로워는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인정의 숫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뀐 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정체성이 드러나는 방식이었을 수 있다. 그는 육아 작가에서 인플루언서로 변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육아라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욕망에 더 가까운 이름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육아를 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갖고 싶은 사람인가.”

그 질문 앞에서 그는 아마 조금씩 이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동은 변절이라기보다, 숨겨져 있던 열망의 노출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사례는 드라마 리뷰를 쓰던 사람의 이야기였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그는 열심히 리뷰를 썼고, 팔로워도 모았다. 그런데 드라마가 끝나자 팔로워를 끊고, 다시 자신의 일상 이야기로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이 사례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에게 드라마 리뷰는 정체성이었을까. 아니면 역할이었을까.

군대에서 계급이 이등병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본질이 이등병인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팀장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집에서도 팀장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직업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지만, 퇴근 후에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드라마 리뷰를 쓰던 그 사람에게 리뷰어라는 이름은 어쩌면 일정 기간 수행한 역할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드라마가 끝났고, 역할도 끝났다. 그는 자신에게 붙어 있던 임시의 이름표를 떼어내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것은 정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역할의 종료에 가깝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리뷰어였던 것이 아니라, 리뷰를 하던 사람이었을 뿐이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퇴근길 사람들은 각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 뒤에는 또 다른 이름들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회사에서의 나. 가족 안에서의 나. 학교에서의 나. 글을 쓰는 나. 혼자 있을 때의 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나.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
그 모든 나는 서로 다른가. 아니면 하나의 내가 여러 장면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나는 아직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다만 어제 수업을 듣고 나서, 정체성이란 하나의 고정된 명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성은 돌에 새긴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물 위에 비친 얼굴에 가깝다. 내가 움직이면 흔들리고, 바람이 불면 일그러지고, 누군가 다가와 물결을 만들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얼굴이 거짓은 아니다.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 있다.

아바타도 그렇다. 아바타는 내가 만든 몸이지만, 나 혼자 완성할 수 없는 몸이다. 내 정신이 투영되지만, 타인의 시선 속에서 다시 조정된다. 내 욕망이 들어 있지만, 그 세계의 규범과 반응 속에서 다시 다듬어진다.

브런치의 광화문덕도 그렇다. 그는 내가 선택한 이름이지만, 독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조금씩 자란 이름이다. 나는 그를 통해 나를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가 받은 반응을 통해 나를 다시 이해한다.

어쩌면 정체성이란 이런 것 아닐까.

내가 나에게 붙인 이름과, 타인이 나에게 돌려준 의미가 서로 부딪히고 겹치며 만들어지는 것. 나는 나를 선택하지만, 세상은 그 선택에 답장을 보낸다. 그 답장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지만 그 문장도 영원하지는 않다. 내일의 나는 또 다른 공간에 서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날 것이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조금씩 갱신될 뿐이다. 가상공간의 아바타처럼, 브런치의 광화문덕처럼, 현실의 나 역시 매일 조금씩 수정되고 저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의 나는 초안이고, 오늘의 나는 수정본이며, 내일의 나는 아직 열리지 않은 문서다. 그리고 어쩌면 삶이란, 그 문서를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계속 다시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26.05.21(목) 18:30, 서강대학교 삼성가브리엘관 109호

 ▶ 사전 신청 링크: https://forms.gle/drNUbAj2r1b8eSx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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