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가 달라졌다.
창문을 열자, 아직은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지만 어딘가 느슨해진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겨울의 끝자락이 손을 놓고, 봄이 문틈에서 숨을 고르는 시간. 햇살은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았고, 빛은 유리창을 통과하며 부드럽게 번졌다.
나는 그 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오늘… 해야겠다.”
사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방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바닥에 얽혀 있는 전선들, 의자 위에 무심히 걸쳐 둔 셔츠, 계절을 지나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옷들. 그 모든 것이 나를 은근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풀소유자다.
사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자 시절, 9,900원짜리 티셔츠에 19,900원짜리 슬랙스, 39,900원짜리 운동화만 걸쳐도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나 자체로 충분했다. 기사 한 줄, 문장 하나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때는 옷이 나를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설명했다.
하지만 기자직을 내려놓고, 무직자가 되고, 기업인이 되고, 직장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수없이 부딪히며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적시에 해소하지 못한 피로와 억눌린 감정이 쌓여 어느 날, 나는 ‘마음의 감기’에 걸렸다. 몸은 멀쩡했지만 마음은 늘 미열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쇼핑이 시작됐다. 명품을 입으면 내가 명품이 된 것 같은 착각. 비싼 가방을 들면 내가 덜 초라해 보일 것 같은 기대.
“이 정도는… 나를 위해 써도 되잖아.”
“이 정도는 있어야지.”
스스로를 설득하며 결제를 눌렀다. 가끔 자존감이 잠시 올라올 때면 깨닫는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하지만 스트레스가 다시 고개를 들면, 나는 또다시 쇼핑몰 창을 열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온 지 벌써 7년. 내 방은 어느새 내 불안의 저장고가 되어 있었다.
방 구석구석에 쌓인 옷과 가방, 구두들을 보며 푸념이 흘러나왔다.
‘에휴… 옷은 왜 이렇게 많은지. 가방은 또 왜 이리 무거운 기억처럼 쌓여 있는지….’
‘이건 세일이라 샀고.’
‘이건 언젠가 중요한 자리에 입으려고.’
‘이건 보기만 해도 멋지니까….’
변명은 늘 준비돼 있다.
사실 두려웠다.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사 모은 것들이 한꺼번에 드러나면, 그 욕망과 허영, 미련과 기대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면, 나는 그 장면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오늘은, 햇살이 등을 떠밀었다.
“일단 다 꺼내자.”
나는 방 안의 물건을 하나씩 거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옷장을 열고, 장식장을 비우고, 서랍을 뒤집었다. 셔츠들이 무너져 내리고, 코트가 팔을 벌린 채 바닥에 눕고, 가방들이 서로 기대어 쌓였다.
한 시간. 두 시간.
거실은 점점 나의 과거로 가득 찼다.
“이렇게 많았다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웃었다. 웃음이었지만, 어딘가 허탈했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수북했다. 택도 떼지 않은 셔츠, 유행이 지나버린 재킷, 어울리지 않는 줄 알면서도 ‘혹시’라는 마음으로 사둔 바지.
“왜 샀지…”
스스로에게 묻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래도 그때는 필요했잖아. 그때의 너는 그걸 입고 싶어 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나는, 나름대로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4시간째가 되자, 거실은 아수라장이 됐고, 방은 텅 비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나 자신도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왜 이걸 시작했지…”
한숨이 깊게 흘러나왔다. 허리는 아프고, 손은 먼지로 거칠어졌다. 점심 대신 카스타드를 우유에 말아서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혀끝을 적시며 잠시 세상이 부드러워졌다.
그때였다.
'그만할까…? 그냥 다시 대충 넣어버릴까…?'
악마의 속삭임이 시작됐다. 부정적인 기운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니야. 여기까지 했는데! 이제 곧 끝날 거라고!!!”
혼잣말이었지만, 거의 외침에 가까웠다.
다시 일어났다. 책상을 옮기고, 장식장을 돌려 세웠다. 작은 방을 사무공간과 드레스룸으로 나누기 위해 장식장을 파티션처럼 세웠다. 가구가 바닥을 긁는 소리는 마치 내 인생에 새로운 선을 긋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사하는 기분이었다.
6시간이 지나자,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오전의 빛과는 전혀 다른 색.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따뜻했다.
나는 천천히 옷을 방안으로 다시 들였다. 고를 것과 보낼 것을 나눴다.
“이건 당근에 올리자.”
“이건… 한 번만 더 입어보자.”
스스로와 협상하며, 옷을 접었다.
8시간.
오전 10시에 시작한 정리는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창밖은 이미 저녁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숨을 고르며 둘러봤다. 바닥에 널려 있던 전선들은 정리돼 있었고, 청소기를 밀어보니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나아갔다.
“이제 좀… 숨 쉬겠네.”
안도의 말이 절로 나왔다.
완벽하진 않다. 막판에 정리한 옷들은 여전히 제멋대로고, 드레스룸처럼 만들어둔 공간엔 전등이 닿지 않는다.
“다이소 가서 붙이는 전등 하나 사와야겠다.”
나는 혼잣말을 하며 웃었다. 겨울옷은 겨울옷끼리 무리를 지어 들어갔다. 봄 코트와 정장들은 계절감 있게 정렬됐다. 내가 좋아하는 정장과 셔츠를 바라보니, 묘하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뭔가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이 찾아들었달까.
정장 자켓의 어깨선을 따라 손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이 옷을 입고 걷고 싶다. 햇살 아래, 가벼운 걸음으로'
나는 40대 후반이다. 마지막 40대라는 말이, 이제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더 나이 들면, 이런 핏은 안 나오겠지.”
혼잣말을 하다, 문득 웃음이 났다.
젊음은 젊을 때 누려야 한다는 말.
그 말이 이제야, 뼛속까지 스며든다.
오늘 나는 방을 정리했다. 하지만 실은, 나를 조금 정리했다. 엄두가 나지 않던 일을 시작했고, 중간에 무너질 뻔했지만 버텼고,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와도 다시 일어섰다.
“막막해도… 하면 되는 거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봄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지만, 분명히 오고 있다.
방 안에 만들어둔 작은 드레스룸처럼, 내 안에도 작은 공간 하나가 새로 생긴 느낌이다. 그 공간에 나는 결심을 걸어두기로 했다.
'어렵다고 피하지 말자. 막막해도, 일단 꺼내보자. 엉망이 되더라도, 다시 정리하면 된다.'
방정리를 마치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자 저녁 공기가 스며들었다. 차갑지만 어딘가 달큰한 냄새. 계절이 넘어가는 냄새였다.
“잘했다.”
누가 해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해주는 말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해냈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로, 오늘의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나를 칭찬해주고 싶어 속삭였다.
'고생했다. 그렇게 올해도 하루하루 잘 버텨내며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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