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카카오, 제6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특별상 수상작
코르크를 뽑는 순간, 와인은 시간을 토해낸다. 병 속에 갇혀 있던 세월이 공기와 만나 깨어나고, 한 모금을 머금으면 와인을 둘러싼 환경과 기억이 함께 펼쳐진다. 그것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와인은 시간을 품고 있고, 시대를 기록한다.
우리는 지금, 와인의 시대를 살고 있다.
2020년, 전 세계가 멈춰 섰다. 사람들은 집 안에 갇혔고, 거리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도 와인의 소비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한국의 주류 수입액은 11억 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그중에서도 와인이 전체 주류 시장을 이끌었다. 3억 3천만 달러어치의 와인이 바다를 건너왔고, 7천3백만 병의 와인이 한국인의 잔에 담겼다.
맥주가 사라진 자리에서 와인이 피어났다.
언젠가 맥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홈술’이었다. 하지만 2018년 이후 맥주 수입은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일본 맥주의 점유율은 25.3%에서 2.5%까지 폭락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프랑스산 레드 와인이었다. 2020년, 한국에서 수입된 와인의 65.6%가 레드 와인이었고, 화이트 와인(17.8%)과 스파클링 와인(14.1%)이 그 뒤를 이었다. 유럽의 오래된 포도밭에서 탄생한 와인들이 한국인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와인은 더 이상 특별한 날을 위한 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방식의 일부가 됐다.
오래전 유럽에서도 그랬다.
고요한 수도원의 정원에서, 수도사들은 묵묵히 포도나무를 가꾸었다. 그들은 포도를 수확하고, 신의 축복을 담아 와인을 빚었다. 수도원 깊숙한 곳, 차가운 석조 지하 저장고에서 와인은 천천히 발효됐고, 이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신과 인간을 잇는 신성한 성배가 되었다. 미사를 올릴 때마다 그들은 와인을 잔에 따르고, 그것을 '신의 피'라 불렀다.
그러나 와인은 성스러운 곳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의 성채에서는 와인이 왕과 귀족들의 술잔을 채웠다. 밤이 깊어질수록 연회장은 흥청거렸고, 황금빛 촛불 아래에서 붉은 와인이 찰랑였다. 잘 익은 포도로 만든 깊고 풍부한 와인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고, 연회의 끝자락에서 취기에 붉어진 얼굴들이 서로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와인이 머물던 곳은 수도원의 고요한 성가대석과 궁전의 화려한 식탁만이 아니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서막이 올랐다.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들은 분노와 환희 속에서 외쳤다.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와인이 이제 시민들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 성난 군중들은 와인을 따르며 혁명의 승리를 축배 했다. 거리의 포도주 선술집에서는 노동자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잔을 기울였고, 혁명의 지도자들은 붉은 와인 잔을 높이 들었다.
와인은 더 이상 왕좌 위에서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의 와인이었고, 자유의 와인이었으며, 이제는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시민의 와인이 되었다.
이후 와인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 됐다.
전쟁이 일어나면 와인은 희귀해졌고, 평화가 찾아오면 다시금 넘쳐났다. 불황이 오면 값싼 와인이 유행했고, 번영의 시대에는 최고급 와인이 경매에서 기록적인 가격을 경신했다. 와인은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담고 있는 한 병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와인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길어지면서, 와인은 더 이상 화려한 연회장의 술이 아니라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술이 되었다. 누군가는 조용한 방 안에서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하루를 정리했고, 누군가는 온라인으로 와인 수업을 들으며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 나섰다.
창가에 앉아 잔을 기울일 때, 와인은 단순한 취기가 아니라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매개체가 됐다. 하루의 끝자락, 잔에 담긴 루비빛 액체가 천천히 흔들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루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좋은 날에도, 고단한 날에도 와인은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준다.
어떤 이들은 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무는 노을이 와인의 색과 닮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책을 펼쳐놓고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며, 오래전 누군가가 기록한 문장을 곱씹는다. 와인을 마시는 행위는 더 이상 단순한 음주가 아니라, 온전한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 된 것이다.
혼자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와인을 더 천천히, 깊이 음미한다. 하나의 의식처럼...
잔을 비우는 속도가 아닌, 향과 맛이 피어나는 순간을 느끼는 일. 아무 말 없이 잔을 들고 앉아, 와인이 시간을 머금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그렇게 우리는 와인을 통해, 세상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다.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우리가 잠시 멈추어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아주 사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2021년, 그 흐름은 더욱 강해졌다.
2021년 1월부터 7월까지 와인의 수입액은 전년 동기 대비 102.4% 증가했다. 단 7개월 만에 3억 2천5백만 달러어치의 와인이 수입되었고, 이는 이미 2020년 전체 수입 규모에 근접한 수치였다. 와인은 이제 맥주를 제치고 한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되는 주류가 됐다. 그리고 그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좋은 와인은 시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충분히 기다린다면, 와인은 반드시 최고의 향과 맛을 선물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단순한 풍미가 아니라, 시간을 음미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2020년, 2021년.
우리는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와인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다만, 어떤 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고, 더 풍부해진다.
그것이야말로 와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아닐까.
우리도 그렇게, 시간을 배신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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