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으면서 배우는' AI와 Sim2Real의 혁명
2025년 하반기, 글로벌 로봇 산업의 화두는 단연 '전투(Combat)'와 '엔터테인먼트'의 결합이다. 과거 연구실 안에서 조심스럽게 보행 테스트를 받던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이제는 관중의 환호 속에 철제 링 위로 올라 상대의 부품이 파손될 때까지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지하 벙커에서 열리는 VR(가상현실) 기반의 로봇 복싱부터, 중국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을 가득 메운 국가 주도형 로봇 올림픽까지, '로봇 격투(Robot Combat)'는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거대 자본과 최첨단 AI 기술이 집약된 차세대 e스포츠 산업으로 급부상했다.
글로벌 양강 구도: 실리콘밸리의 'VR 파이트 클럽' vs 중국의 '메카 킹' 대전
현재 로봇 격투 시장은 미국과 중국이 서로 다른 기술적 접근법과 문화를 바탕으로 양분하고 있다. 미국의 접근 방식은 철저히 '엔터테인먼트와 e스포츠의 융합'에 방점을 둔다. 그 중심에는 샌프란시스코와 라스베이거스를 거점으로 하는 'REK(Robot Embodied Kombat)'와 'UFB(Ultimate Fighting Bots)'가 있다. 이들은 영화 <리얼 스틸>을 현실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가장 큰 특징은 인간 파일럿이 링 위에 오르는 대신 VR 헤드셋과 햅틱 슈트를 착용하고 로봇에 '접속(Embody)'한다는 점이다. 파일럿이 허공에 주먹을 날리면 링 위의 로봇이 5G 초저지연 통신을 통해 실시간으로 동작을 따라 한다. 최근 트위치(Twitch) 공동 창업자 저스틴 칸(Justin Kan)과 UFC 파이터 하이더 아밀(Hyder Amil)이 유니트리(Unitree)의 G1 로봇을 조종해 맞붙은 경기는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며, 이 새로운 스포츠가 게이머와 프로 운동선수 모두를 흡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입증했다.
반면, 중국은 압도적인 하드웨어 물량과 국가 주도형 기술 실증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2025년 8월 베이징 국립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 휴머노이드 로봇 게임즈(World Humanoid Robot Games)'는 전 세계 16개국 280개 팀이 참가한 로봇 올림픽으로, 중국의 로봇 굴기를 전 세계에 과시하는 무대였다. 이어 오는 12월 선전(Shenzhen)에서 개최 예정인 엔진AI(EngineAI) 주관의 '메카 킹(Mecha King)' 토너먼트는 기술적 난이도를 한 단계 더 높였다. 이 대회는 엔진AI가 자체 개발한 신장 1.85m, 체중 85kg의 거대 휴머노이드 'T800'을 기반으로 치러지며, 참가자들에게 소스 코드를 전면 공개하는 오픈소스 전략을 채택했다.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로봇 격투를 단순한 쇼가 아닌, 자율 전투 알고리즘과 하드웨어 내구성을 극한까지 테스트하는 기술 검증의 장(Testbed)으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적 의도가 깔려 있다.
기술의 진화: '맞으면서 배우는' AI와 Sim2Real의 혁명
로봇들이 링 위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펀치와 회피 기동 뒤에는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 RL)과 Sim2Real(Simulation to Real)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로봇이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동작만을 반복했다면, 2025년의 전투 로봇들은 가상 공간(Simulation)에서 수백만 번의 전투를 치르며 스스로 승리하는 법을 터득한 AI다. 유니트리의 G1이나 엔진AI의 T800 같은 최신 기체들은 물리 엔진 기반의 시뮬레이터(Isaac Sim 등)에서 넘어지고 깨지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며, 실제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정책(Policy)을 학습했다. 특히 주목할 기술은 낙상 회복(Fall Recovery) 알고리즘이다. 경기 중 강력한 타격을 입고 쓰러진 로봇이 과거처럼 버둥거리거나 사람이 일으켜 세워주길 기다리지 않고, 마치 오뚝이처럼 즉각적으로 반동을 이용해 기립하거나 낙법을 취해 충격을 최소화하는 모습은 RL 기반 제어 기술이 완성 단계에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인간의 신경망을 로봇과 연결하는 '텔레오퍼레이션(Teleoperation)' 기술은 5G 통신과 결합하여 공간의 제약을 없앴다. 미국 REK 리그에서 활용되는 이 기술은 파일럿과 로봇 사이의 지연 시간(Latency)을 인간이 인지하기 힘든 수준까지 단축시켜, 지구 반대편에서도 로봇을 실시간으로 조종하여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전투 중 발생하는 강력한 충격을 견디기 위해 항공우주 등급의 알루미늄 합금과 고체 배터리, 그리고 충격 흡수형 관절 구동기(Actuator)가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로봇 격투 대회는 이러한 기술들이 실험실 밖 극한 환경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증하는 가장 가혹하고 효율적인 인증 센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 크립토 베팅과 하드웨어 대중화의 경제학
로봇 격투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에는 기술적 호기심을 넘어선 확실한 수익 모델이 존재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블록체인 기반의 '크립토 베팅(Crypto Betting)' 도입이다. UFB와 REK 등 미국의 신생 리그들은 규제가 까다로운 전통 스포츠 베팅 대신, 암호화폐(Solana 등)를 활용한 베팅 시스템을 구축했다. 관객들은 단순히 승패를 맞히는 것을 넘어 '1라운드 내 KO 여부', '특정 부위 파손' 등 다양한 조건에 돈을 걸 수 있으며, 이는 관람의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리그 운영사에 막대한 수수료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심지어 관객이 경기 중 후원을 통해 경기장 내 함정(Trap)을 발동시키거나 로봇의 특정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등 경기에 직접 개입하는 '인터랙티브 수익 모델'도 시도되고 있다.
하드웨어 제조사들에게 로봇 격투는 최고의 마케팅 수단이자 판매 채널이다. 중국의 유니트리는 G1 휴머노이드 로봇을 약 16,000달러(약 2,200만 원)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출시하며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이는 기존 수억 원을 호가하던 휴머노이드 로봇의 가격 장벽을 무너뜨려, 대학 연구소나 엔터테인먼트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 마니아층까지 소비자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엔진AI 역시 전투용 T800 모델을 25,000달러(약 3,500만 원) 선에 공급하며 가격 전쟁에 불을 지폈다. 이들은 대회를 통해 로봇의 성능과 내구성을 증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량 생산된 로봇을 전 세계에 판매하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있다. 즉, F1 대회가 자동차 기술을 과시하고 슈퍼카 판매로 이어지듯, 로봇 격투 대회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상용화와 대중화를 앞당기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380억 달러 시장의 패권 경쟁과 한국의 과제
글로벌 시장 조사 기관들과 투자은행들은 이 새로운 시장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AI 기술의 발전과 하드웨어 비용 하락을 근거로 2035년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 규모 전망치를 기존 60억 달러에서 380억 달러(약 53조 원)로 6배 이상 상향 조정했다. 특히 엔터테인먼트 로봇 시장은 연평균 20% 이상의 고속 성장을 거듭하여 2030년대 중반에는 320억 달러 규모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벤처 캐피털(VC) 자금 또한 이 분야로 쏠리고 있다. 2025년 상반기에만 로보틱스 분야에 60억 달러 이상의 투자가 집행되었으며, 투자자들은 로봇 격투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향후 물류, 제조, 국방 등 전 산업에 적용될 신체적 AI(Embodied AI) 기술의 핵심 데이터를 확보하는 창구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격변 속에서 한국의 위치는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한국은 KAIST의 '휴보(Hubo)'가 다르파 로보틱스 챌린지에서 우승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제어 기술력을 입증한 바 있고, 최근 베이징 대회에서도 대학 연합팀들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상업적 측면에서는 중국의 거대 자본과 미국의 기획력에 밀려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국내 로봇 대회는 여전히 학술적이거나 교육적인 목적의 로보컵(RoboCup)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대중을 열광시킬 상업적 리그나 플랫폼은 부재한 상황이다. 전문가는 "한국이 가진 세계적인 e스포츠 운영 노하우와 로봇 제어 기술을 결합한다면, REK나 UFB를 능가하는 독자적인 'K-로봇 격투 플랫폼'을 구축할 잠재력은 충분하다"며 "이제는 연구실을 벗어나 대중과 호흡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2025년은 로봇이 인간의 유희를 위해 싸우는 시대의 원년으로 기록될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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