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올림픽 e스포츠 게임(Olympic Esports Games)’ 협정을 전격 종료했다.
2024년 7월에 체결된 이 협약은 12년간의 장기 파트너십을 전제로, 세계 최초의 e스포츠 올림픽을 사우디 리야드에서 개최하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당시 IOC와 사우디는 “올림픽 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열겠다”는 공동 비전을 내세우며 전통 스포츠의 디지털 전환을 상징하는 이벤트로 홍보했다.
그러나 2025년 2월, IOC가 첫 대회를 2025년에서 2027년으로 연기한다고 발표하면서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짐바브웨 출신의 전 수영선수 커스티 코벤트리(Kirsty Coventry)가 IOC의 새 회장으로 취임하며 조직 기조가 바뀌었고, 여름에는 사우디가 'Esports World Cup Foundation(EWCF)'을 중심으로 ‘e스포츠 네이션스컵’을 독자 발표했다. 9월 말에는 사우디 국부펀드(PIF)가 EA 인수(약 550억 달러) 계획을 공개하며 게임 산업 전반으로 영향력을 넓혔다.
그리 불과 1년 만에 파트너십은 해지됐다.
IOC는 “상호 합의에 따른 독립 추진”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거버넌스 구조와 콘텐츠 가치관의 충돌, 그리고 사우디의 독자 생태계 구축 전략이 결정적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안을 계기로 e스포츠의 올림픽 편입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국제기구, 게임 산업, 그리고 각국 정부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한다면, e스포츠의 제도화는 다시 장기 과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 사건은 하나의 계약 종료를 넘어, 디지털 스포츠 시대의 규범과 거버넌스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스포츠 제도권 편입의 경로가 다시 모호해지다
IOC는 그동안 e스포츠를 “올림픽의 차세대 관객층을 유입할 수 있는 통로”로 보고, 2021년 ‘올림픽 버추얼 시리즈(Olympic Virtual Series)’와 2023년 ‘싱가포르 e스포츠 위크’를 통해 점진적으로 실험을 이어왔다. 그러나 종목 선정과 운영 방식에서는 늘 논란이 뒤따랐다.
특히 어떤 게임을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할 것인가가 핵심 문제였다. 슈팅(FPS)·격투·MOBA처럼 폭력성을 포함하거나 특정 상업 IP에 의존하는 장르는 올림픽의 비폭력·비상업 원칙과 충돌했다. 반대로 퍼즐이나 체스류 같은 비폭력형 게임은 대중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IOC 내부에서도 “게임을 어디까지 스포츠로 볼 것인가”라는 기준 설정이 명확히 합의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사우디가 추진한 e스포츠 올림픽 프로젝트는 막대한 자본력과 세계적 인프라를 바탕으로 추진됐지만, 이 같은 콘텐츠 적합성 논란과 정치적 부담이 점점 커지며 균열을 드러냈다. IOC 입장에서는 종목 구성과 가치 규범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업 구조에 대한 우려가 컸고, 사우디는 글로벌 이벤트를 국가 브랜드로 활용하려는 전략을 고수했다.
결국 이번 결별은 단순한 협약 해지가 아니라, e스포츠가 ‘스포츠 제도권’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경로 자체가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e스포츠는 다시금 “경기인가, 산업인가”라는 근본적 질문 앞에 서게 됐다.
‘디지털 메가이벤트’의 가치 논쟁
사우디는 국가 비전인 Vision 2030을 중심으로, 석유 이후의 신성장 산업으로서 게임·e스포츠·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이미 글로벌 게임사 인수, e스포츠 월드컵 개최, 리야드 게임 스타트업 허브 조성 등으로 이어졌다. ‘스포츠·문화 투자’를 통해 국가 이미지를 재정립하려는 이른바 ‘소프트파워 전략’이다.
반면 IOC는 인권, 표현의 자유, 젠더 평등 등 국제 규범과 가치 기준을 유지해야 하는 기관이다.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하는 IOC 입장에서, 특정 국가가 주도하는 메가이벤트가 국가 홍보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은 늘 부담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일부 국제 매체는 IOC 내부에서 사우디의 인권 이슈나 종교적 규범이 e스포츠 경기 운영의 자유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IOC와 사우디의 협력은 경제적 실리와 제도적 윤리의 충돌 속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IOC는 ‘올림픽 가치’라는 규범을 지키려 했고, 사우디는 자국 중심의 산업 생태계를 확장하려 했다. 두 노선이 교차하면서 협력의 명분은 약화되고, 파트너십의 방향성은 점차 분리됐다.
이 사건은 앞으로의 메가이벤트가 단순한 국제 행사가 아니라, 문화·기술·정치가 얽힌 외교 무대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디지털 이벤트의 외교화(digital diplomacy of mega-events)”라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e스포츠 생태계의 다극화와 분화 가속
IOC-사우디 결별 이후, 글로벌 e스포츠 거버넌스는 더욱 다극적(multilateral) 구조로 재편될 전망이다. 아시아에서는 텐센트(Tencent)와 라이엇게임즈(Riot Games)가 주도하는 ‘자체 리그-월드컵 체제’가 이미 공고화되고 있다. 이들은 자체 규정, 리그 운영권, 미디어 중계권까지 통합 관리하며 사실상 ‘민간 주도형 국제연맹’의 형태를 띤다.
반면 유럽은 여전히 공공 기관 중심의 규제형 모델을 유지하고 있고, 북미는 상업 IP 중심의 흡수형 모델로 확장 중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올림픽식 통합 모델’—하나의 국제기구가 모든 종목을 관리하는 방식—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대신 민간 IP 중심의 독립 생태계가 표준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이는 곧 “e스포츠의 세계화는 곧 분화의 과정”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구조 변화는 기술적 진화와도 맞물린다. AI 심판 시스템, 가상 현실 기반 경기장, 메타버스 중계 플랫폼 등 차세대 스포츠 기술은 전통적 규범보다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향후 e스포츠 산업은 ‘경기 운영’보다 ‘기술 인프라’와 ‘데이터 관리’가 핵심 경쟁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IOC-사우디의 결별은 단일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글로벌 e스포츠 질서가 중앙집중형 모델에서 다극화 구조로 이동하는 전환점으로 읽힌다. 이제 e스포츠의 무대는 단일 규범이 아닌, 서로 다른 기술·문화·정치 시스템이 공존하는 복합적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다.
e스포츠는 누구의 경기장 위에 서 있는가
IOC와 사우디의 결별은 단순한 협약 종료가 아니라, e스포츠가 ‘스포츠 제도권’ 안에서 어떤 정체성을 갖고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구조적 질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올림픽’이라는 규범 체계와 ‘게임 산업’이라는 상업 생태계가 만나는 첫 실험이었지만, 결국 두 영역은 끝내 공통의 언어를 찾지 못했다.
IOC는 여전히 올림픽 가치와 공공성이라는 틀 안에서 e스포츠를 제도화하려 하지만, 실제 시장은 훨씬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민간 기업이 주도하는 e스포츠 리그는 이미 전 세계 수억 명의 관객과 독자적 규칙 체계를 갖추었고, 기술 발전 속도는 제도보다 훨씬 앞서 있다. 이러한 비대칭은 앞으로도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사우디를 비롯한 신흥국들은 e스포츠를 문화 산업이자 국가 전략 산업으로 인식하고 있다. 투자와 인프라 구축, 글로벌 IP 확보를 통해 “스포츠를 생산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이런 흐름은 결국 e스포츠를 단일한 국제 규범이 아닌, 복수의 문화·경제 권역이 병존하는 다극적 체계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번 결별은 패배나 실패의 사건이 아니라, e스포츠 거버넌스가 중앙집중형 모델에서 분산형 생태계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누가 경기장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가치와 규칙이 그 경기장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e스포츠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산업이다.
이제 승부는 누가 더 많은 경기를 여는가가 아니라, 누가 경기의 규칙을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규칙의 방향이, 앞으로 10년간 세계 게임 산업의 권력 지도를 바꿀 것이다.
[METAX = 김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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