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 롤 환경이 만든 업무 변화와 그에 따른 선택
[메타X(MetaX)] 최근 게임 개발 현장에서 ‘한 가지 역할만 맡는 개발자’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특히 인디나 소규모 팀에서는 기획과 개발, 커뮤니케이션을 동시에 감당하는 일이 더 이상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다. 이는 새로운 도구의 등장 때문이라기보다, 게임 개발이라는 일이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하나의 직무로 설명되지 않는 개발자들
오늘날 게임 개발자의 역할은 하나의 직무명으로 설명되기 어려워지고 있다. 2026 State of the Game Industry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약 11%는 공식 직무 분류에서 ‘기타(Other)’를 선택했는데, 이들 다수는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리더십 포지션에 있거나, 소규모 팀에서 일하거나, 혹은 솔로 개발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력과 소속에 따라 이 경향은 더욱 분명해진다. 독립 스튜디오 종사자 비중이 높아진 이번 조사에서, 인디 스튜디오 종사자 가운데 상당수는 개발, 기획, 일정 관리, 외부 커뮤니케이션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설립 5년 미만의 젊은 인디 스튜디오에서는 직원 수가 20명 미만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중 일부는 1인 개발 형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역할의 분업보다 역할의 중첩이 기본값이 되는 환경인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업무량이 늘어났다는 문제로 환원되기 어렵다. 전통적인 게임 개발 환경이 ‘전문화된 직무 분업’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었다면, 현재의 인디 중심 개발 환경은 한 사람이 여러 판단을 동시에 내려야 하는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기획 판단,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 판단, 그리고 그 선택을 외부와 어떻게 설명하고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판단이 하나의 작업 흐름 안에 묶여 있다.
이처럼 역할이 중첩된 환경에서는 각 판단을 충분히 숙고할 시간보다, 판단 사이를 전환하는 비용이 더 크게 작용한다. 사고의 흐름이 끊기고 맥락을 다시 불러오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인지적 피로가 누적된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끝없이 생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미 떠오른 생각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구조화할 수 있는 여백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점은, 이 글이 아직 해법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드러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전제다. 오늘날 게임 개발자는 더 이상 단일 직무로 정의되지 않으며, 멀티 롤은 선택이나 전략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조건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성형 AI가 게임 개발 현장에 스며들기 시작한 배경 역시 이해할 수 있다.
AI는 창작 도구가 아니라 사고 보조 도구로 쓰인다
생성형 AI가 게임 개발 현장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음에도, 실제 사용 방식은 대중적으로 상상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2026 State of the Game Industry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가운데 약 36%가 업무 과정에서 생성형 AI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그 활용 지점은 명확히 한쪽으로 쏠려 있다.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용도는 리서치와 브레인스토밍(81%)이었고, 그다음이 이메일 작성이나 일정 정리 같은 일상 업무, 그리고 코드 보조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에셋 생성이나 플레이어가 직접 접하는 기능에 생성형 AI를 활용하고 있다는 응답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미지·비주얼 자산 생성은 19%, 프로시저럴 생성은 10%, 실제 플레이 경험에 직접 반영되는 기능은 5%에 불과했다. 이는 생성형 AI가 게임 콘텐츠를 ‘대신 만들어주는 도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통념과는 분명히 다른 양상이다.
이 격차는 기술의 성숙도 문제라기보다, 개발자가 AI를 필요로 하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준다. 리서치와 브레인스토밍 같은 사고 보조 영역에서는 활용도가 높은 반면, 에셋 생성이나 플레이어가 직접 접하는 기능에서는 사용 비율이 현저히 낮다. 이는 단순한 기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과 통제의 문제에 더 가깝다.
에셋과 플레이 경험은 게임의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요소다. 이 영역에서의 선택은 결과에 대한 설명 가능성과 책임을 요구하며, 커뮤니티 반응과 장기적인 신뢰로까지 이어진다. 생성형 AI가 개입할 경우, 그 결과물의 출처와 의도, 수정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소규모 팀이나 인디 개발자에게 이러한 리스크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으로 작용한다.
반면 리서치, 아이디어 정리, 초안 구성은 결과물이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이 영역에서 AI는 판단을 대신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판단을 준비하는 과정에 개입한다. 생각의 목록을 정리하고 선택지를 빠르게 펼쳐 보이며, 다음 결정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에 그친다. 이 차이가 생성형 AI 활용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사용 경향은 AI에 대한 인식과도 맞물린다. 같은 조사에서 절반이 넘는 응답자(52%)는 생성형 AI가 게임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답했으며, 특히 디자인·내러티브·비주얼 분야 종사자일수록 부정적 인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 사용이 줄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창작을 대체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부하된 업무 구조 속에서 실용적인 보조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생성형 AI의 현재 위치는 비교적 분명해진다. AI는 게임을 대신 만들어주는 기술이 아니라, 여러 역할을 오가며 사고해야 하는 개발자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선택지를 검토하며 업무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앞선 섹션에서 드러난 멀티 롤 환경은, AI 활용을 기술 트렌드가 아닌 현실적인 대응 방식으로 밀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두 조합이 말해주는 것
앞선 두 단락을 종합해보면, 생성형 AI의 확산은 새로운 기술 유행의 결과라기보다 이미 변화한 게임 개발자의 업무 구조가 만들어낸 귀결에 가깝다. AI가 게임 개발 전반을 재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직무로 설명되지 않는 개발자의 일이 먼저 달라졌고, 생성형 AI는 그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주목할 점은 AI 활용이 창작의 핵심 영역이 아니라, 사고의 전단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창작이 자동화되고 있다는 신호라기보다, 개발자가 감당해야 할 판단의 밀도가 높아졌다는 증거에 가깝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을 어떻게 설명하고 전달할 것인가를 동시에 고민해야 하는 환경에서, 생성형 AI는 결정을 대신 내려주는 존재가 아니라 결정을 준비하는 과정에 개입한다.
이런 맥락에서 AI 활용 증가는 생산성 향상이나 효율 개선이라는 익숙한 언어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오히려 이는 멀티 롤 환경에서 누적되는 인지 부담을 관리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고, 선택지를 구조화하며, 다음 판단으로 넘어가기 위한 여백을 확보하는 것. 생성형 AI가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따라서 “AI가 게임을 만든다”는 표현은 지금의 현실을 다소 과장한 해석에 가깝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AI는 개발자가 버티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창작의 주체를 대체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역할 사이를 오가야 하는 개발자의 사고 흐름을 정돈하는 보조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생성형 AI를 둘러싼 찬반 논쟁 역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질문은 AI가 게임을 얼마나 잘 만들어주는가가 아니라, 왜 지금 이 도구가 이 위치에서 사용되고 있는가다.
그리고 그 답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이미 달라진 게임 개발자의 '일 방식' 속에 있다.
[METAX = 김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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