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톤×한화에어로스페이스'... 게임 엔진이 방산의 두뇌가 될 수 있을까

김하영 기자

hashe@metax.kr | 2026-03-23 09:00:00

가상환경에서 현실 전장으로, 가능성의 끝에서 검증의 시작으로
게임 산업, 역할 확장의 가능성을 마주하다

[메타X(MetaX)] 크래프톤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3월 13일 피지컬 AI 기술 공동 개발과 합작법인(JV) 설립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협약식에는 김창한 크래프톤 대표와 손재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표가 직접 참석했다.

이 조합은 낯설지만 필연적이다. 게임 회사와 방산 기업이 손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눈길을 끌지만, 이번 협력의 핵심은 이례성에 있지 않다. 게임 산업이 수십 년간 축적해 온 시뮬레이션 기술과 AI 학습 역량이 방산과 제조 같은 고위험·고비용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https://www.hanwhaaerospace.com/kor/media/newsroom/view.do?seq=605

이번 협력은 단순한 기술 교류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양사는 피지컬 AI 핵심 기술 공동 연구개발, 실증·적용 시나리오 검토, 기술·운영 체계 구축 등의 과제를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이후 JV 설립을 통해 공동 개발 성과를 현장 적용과 사업화로 신속히 연결한다는 방침이다.

자본 협력도 함께 맞물려 있다. 크래프톤은 한화자산운용이 조성한 펀드에도 투자자로 참여하며, 해당 펀드는 AI와 로보틱스, 방위산업 분야에 중점 투자하고 목표 결성 규모는 10억 달러다. 장기적으로는 우주·항공 분야까지 협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합작법인(JV)의 구체적인 지분 구조나 출범 시점은 이번 MOU 단계에서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양 대표의 발언은 협력의 방향을 더 명확히 보여준다. 김창한 크래프톤 대표는 "크래프톤의 AI 기술력과 소프트웨어 운영 역량을 한화의 현장 기반 역량에 결합해 실제 환경에서 작동하는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겠다"며, JV를 '안두릴과 같은 글로벌 방산 기술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방산 AI 스타트업 안두릴을 직접 벤치마크로 언급한 것은, 이번 협력이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사업 정체성의 전환을 겨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크래프톤이 방산의 파트너가 된 이유
방산 기업이 게임사와 손잡은 이유는 우선, 게임 엔진이 단지 콘텐츠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잡한 환경을 가상으로 구현하고, 수많은 변수를 반복 시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인프라라는 점이 핵심이다. 현실의 전장이나 제조 현장은 실험 비용이 높고 실패 위험도 크다. 한 번의 오작동이 인명 피해나 장비 손실로 직결되는 환경에서, 사전에 얼마나 많은 시나리오를 가상으로 검증하느냐는 곧 경쟁력의 차이가 된다. 게임 기반 가상환경은 바로 그 검증을 빠르고 저렴하게 반복할 수 있는 구조다.

또한, 크래프톤이 이번 협력에서 내세울 수 있는 진짜 경쟁력은 유명 게임 IP가 아니라, 게임을 만들어오는 과정에서 내재화한 세 가지 기술 역량이다.

첫째, 물리 기반 시뮬레이션이다. 크래프톤은 언리얼 엔진을 기반으로 중력, 탄도, 충돌, 파괴 같은 물리 현상을 실시간 연산하는 환경을 수년간 구축하고 최적화해왔다. 단순히 보기 좋은 그래픽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물리 법칙이 실제와 최대한 유사하게 작동하도록 정밀하게 튜닝해온 과정이다. 이는 현실과 유사한 조건에서 AI를 훈련하는 기반으로 직접 활용될 수 있다.

둘째, AI 개체 행동 설계 역량이다. 배틀그라운드처럼 수백 명의 플레이어와 AI가 동시에 상호작용하는 환경에서 각 개체의 판단과 행동을 설계하는 기술은, 자율 로봇이나 무인체계가 복잡한 상황에서 의사결정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적을 탐지하고 경로를 결정하고 상황 변화에 반응하는 게임 내 AI 행동 로직은, 무인 시스템이 현장에서 요구받는 인지-판단-행동 흐름과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셋째, 대규모 병렬 시뮬레이션 운영 능력이다. 게임 서버는 동시에 수많은 세션에서 서로 다른 조건의 플레이를 처리한다. AI 모델이 다양한 시나리오를 병렬로 학습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다. 수백만 명의 동시 접속자를 처리하며 쌓은 대용량 데이터 운영 경험은, AI 훈련에 필요한 방대한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생성하고 관리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세 역량을 크래프톤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협력이 단순히 게임 회사의 이미지 쇄신용 행보가 아님을 뒷받침한다. 크래프톤은 이미 지난해 미국에 로보틱스 연구법인 루도 로보틱스(Ludo Robotics)를 설립한 데 이어, 올해 2월에는 한국 법인도 설립하며 피지컬 AI 연구를 조직적으로 추진해왔다. 이번 한화와의 협력은 그 연장선에서 연구 단계를 넘어 실증과 사업화를 본격화하는 단계로 진입하겠다는 신호다.

https://www.ludorobotics.ai/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원하는 것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입장에서 이번 협력은 미래형 방산 체계를 준비하는 포석이다. 피지컬 AI란 텍스트나 이미지를 생성하는 AI가 아니라, 로봇·무인체계·제조설비처럼 현실 공간에서 직접 움직이고 판단하는 시스템에 구현된 AI를 말한다. 이번 협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보유한 방산·제조 인프라와 무인 시스템 기술에 크래프톤의 AI 연구 역량과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방산 영역에서는 이런 기술을 실제 환경에 바로 적용하기 어렵다. 무인 전투체계나 자율 기동 장비는 오작동 한 번이 인명 피해나 전략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현장 투입 전 검증의 밀도가 민간 산업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전에 얼마나 정교한 가상 검증 환경을 갖추느냐가 경쟁력의 핵심이 되는 이유다. 때문에, 한화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AI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실제 장비와 시스템을 미리 훈련하고 시험할 수 있는 구조다. 크래프톤의 시뮬레이션 역량이 바로 그 구조를 채워줄 수 있는 후보로 지목된 셈이다.


게임 산업의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이번 협력이 갖는 첫 번째 의미는 게임 산업의 역할 정의 자체를 흔든다는 점이다. 그동안 게임 산업은 주로 콘텐츠 산업으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그 안에서 쌓인 기술, 즉 시뮬레이션, 물리 연산, AI 행동 설계, 대규모 가상세계 운영 능력은 이미 엔터테인먼트 바깥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게임 엔진의 산업 확장이다. 크래프톤을 포함한 수많은 게임사가 활용하는 언리얼 엔진은 국방, 의료, 항공 산업을 위한 훈련 시나리오 개발부터 자율주행 차량을 위한 머신러닝 활용에 이르기까지 시뮬레이션 수요에 맞는 인프라로 이미 자리 잡고 있다. 록히드마틴과 CAE 같은 글로벌 방산·항공 기업들이 군사 훈련 시뮬레이션에 언리얼 엔진을 도입했고, 국내에서도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에픽게임즈 코리아와 협력해 언리얼 엔진 5 기반의 KF-21 보라매 조종사 훈련 시뮬레이터를 개발했다. 게임 엔진이 이미 전투기 조종사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언리얼5의 실시간 파괴 시스템 'The Chaos Destruction' ; https://dev.epicgames.com/documentation/en-us/unreal-engine/destruction-overview

이런 맥락에서 보면 크래프톤과 한화의 협력은 갑작스러운 발상이 아니다. 게임 기술이 방산과 제조 같은 고정밀 산업으로 이식되는 흐름 위에 놓인 또 하나의 사례다. 다만 크래프톤이 단순히 엔진을 빌려 쓰는 수준이 아니라, 배틀그라운드 같은 대형 서비스를 직접 운영하며 쌓은 데이터 처리 경험과 AI 개체 설계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콘텐츠를 만들어 온 회사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시뮬레이션 인프라 자체를 내재화해 온 회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구별된다.


'피지컬 AI'는 왜 지금 부상하나
피지컬 AI라는 개념이 산업적으로 본격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비교적 최근이다. 2025년 1월 CES 기조연설에서 엔비디아 젠슨 황 CEO가 "AI의 다음 프런티어는 피지컬 AI"라고 선언하며, 현재 디지털 경제가 세계 경제의 15%에 불과하고 나머지 85%의 물리적 경제가 아직 AI의 영역 밖에 있다고 강조했다. 거대한 미개척 시장에 대한 선언이었고, 이후 피지컬 AI는 기술 업계의 핵심 화두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젠슨 황이 이 개념을 제시한 지 불과 1년 만에, 논의의 초점은 기술 가능성에서 상용화 경쟁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구글 딥마인드의 RT-2, 엔비디아의 GR00T, 피규어 AI의 휴머노이드 로봇 등 글로벌 기업들이 멀티모달 AI 기반의 로봇 지능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흐름의 본질은 간단하다. 생성형 AI가 언어와 이미지 중심의 생산성 혁신을 이끌었다면, 피지컬 AI는 그 파급력을 화면 바깥, 즉 공장과 전장과 물류 현장으로 끌어내는 단계다. 피지컬 AI는 로봇, 자율주행, 스마트 제조, 물류 자동화 등 현실 환경과 직접 상호작용하는 인공지능을 의미하며, 제조업과 도시 인프라, 교통, 에너지 분야에서 본격 활용되며 생산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그 핵심 전제는 젠슨 황의 말처럼 "학습은 텍스트와 비디오가 아닌 3차원 시뮬레이션 환경에서 나온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크래프톤과 한화의 협력이 이 흐름 위에 정확히 위치한다. 크래프톤이 가진 시뮬레이션 인프라가 피지컬 AI 시대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열쇠가 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실험인 것이다.


'될 수 있다'와 '당장 된다'는 다르다
그러나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게임 엔진이 방산의 두뇌가 될 가능성은 분명 커졌지만, 가상환경에서의 성공이 실제 장비 운용으로 이어지기까지는 훨씬 복잡한 문제들이 뒤따른다.

그 중심에는 이른바 'sim-to-real gap' 문제가 있다. 가상환경에서 완벽하게 학습된 AI 모델이 현실에 투입되는 순간, 시뮬레이션이 미처 반영하지 못한 변수들, 예컨대 센서 오차, 예측 불가능한 기상 조건, 예상치 못한 장애물,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 패턴 등 앞에서 성능이 급격히 저하되는 현상이다. 자율주행 분야에서도 수년간 씨름해 온 이 문제는, 방산이라는 고위험 환경에서는 더욱 엄격한 기준으로 다가온다. 거기에 방산 특유의 높은 안전성 인증 절차, 보안 규제 대응, 실전 환경에서의 하드웨어 통합 문제까지 더해지면, 가상에서 현실로의 이전은 기술적 도전인 동시에 제도적 도전이기도 하다.

양사가 MOU에서 공동 연구, 실증, 운영 체계 구축, 합작 법인 추진이라는 단계적 표현을 쓴 것도 이 맥락과 일치한다. 이번 협력은 완성형 결과라기보다, 게임 기반 시뮬레이션 기술이 방산형 AI 체계로 연결될 수 있는지 시험하는 출발점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시장 반응과 산업 신호
시장은 이번 협력을 즉각적으로 반영했다. 협약 발표 당일인 3월 13일, 크래프톤 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8.19% 오른 24만 4500원에 마감했다. 코스피 전체가 1.72% 하락한 날에 나온 수치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시장 전반이 내리막인 흐름 속에서도 크래프톤은 역행했다. 이날 주가 반응은 단순히 신사업 기대감이 반영된 것을 넘어, 투자자들이 크래프톤을 더 이상 순수 게임주 단일 프레임으로 평가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업계 반응도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국내 다수 매체는 이번 제휴를 게임사의 신사업 확대가 아니라 AI·로보틱스·방산 기술과의 결합으로 해석했다. 특히 김창한 대표가 합작 법인의 목표로 '안두릴'을 직접 언급한 발언은, 크래프톤 스스로 게임 기업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안두릴은 팔란티어 공동창업자 팔머 러키가 설립한 미국의 방산 AI 스타트업으로, 기존 방산 대기업과 달리 소프트웨어와 AI 기술을 전면에 내세워 빠르게 성장한 기업이다. 크래프톤이 이 이름을 꺼낸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지향하는 사업 모델을 명확히 드러낸 발언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방산AI 스타트업 '안두릴'; https://www.anduril.com/

물론 주가 반응과 사업 성과 사이에는 긴 거리가 있다. 시장의 기대가 실제 기술 성과로 이어지기까지는 앞서 언급한 현실적 관문들을 하나씩 통과해야 한다. 협력의 진짜 무게는 JV가 출범하고 첫 번째 실증 결과가 나오는 시점에 비로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실험실을 나온 질문
크래프톤과 한화의 협력은 게임 엔진이 방산의 두뇌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첫 번째 본격적인 실험이다. 진짜 의미는 게임사와 방산 기업이 손잡았다는 데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게임 산업이 축적한 가상환경 설계와 시뮬레이션 역량이 현실 산업의 검증 인프라, 나아가 AI 훈련 체계로 이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흐름이 이번 협력 하나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 자체는 이미 시작됐다.

질문은 이제 "가능한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첫 번째 시험대는 분명하다. 합작법인이 실제로 출범하느냐, 그리고 공동 개발한 기술이 현장에서 검증되느냐가 이 실험의 첫 번째 성패 기준이 될 것이다. 게임 산업이 콘텐츠를 만드는 곳에서 현실 시스템을 훈련시키는 곳으로 역할을 확장할 수 있는지, 그 답은 이제 실험실이 아닌 현장에서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크래프톤과 한화 두 기업의 미래만이 아니라, 게임 산업 전체가 어떤 역할로 재정의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METAX = 김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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