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의 주인이 되는 것', 펄어비스의 블랙스페이스 엔진과 기술 주권
김하영 기자
hashe@metax.kr | 2026-05-07 09:00:00
플랫폼 위에 형성된 기술 종속의 현실
[메타X(MetaX)] 2026년 3월 20일, 펄어비스의 붉은사막이 출시됐다. 출시 당일 스팀 전 세계 최고 인기 게임 1위, 2시간 만에 동시 접속자 23만 명, 하루 만에 200만 장 판매. 국내 패키지 게임 역사상 전례 없는 기록이었다.
출시 직후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었다. "시각적으로 뛰어난 오픈월드"라며 100점을 준 매체가 있는가 하면, "스토리가 혼란스럽다", "조작감이 둔하다"는 비판이 동시에 쏟아졌다. 메타크리틱 최종 평점은 78점. 7년의 개발 기간과 2000억 원에 가까운 제작비를 감안하면 기대치에 못 미치는 숫자였다. 시장은 냉정하게 반응했다. 평점 공개 직후 펄어비스 주가는 장 초반 28% 넘게 급락했다.
스팀 이용자 반응도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복잡하고 불친절한 조작 체계, 개연성이 약한 스토리, 불편한 UI가 주된 불만이었다. 초반 이용자 평가는 '복합적'에 머물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빠르게 번졌다.
이후 펄어비스는 출시 일주일 동안 4차례 긴급 패치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3차례가 조작감과 편의성 개선이었을 만큼, 플레이어의 불만을 빠르게 받아들인 것이다.
반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가장 큰 불만이었던 조작감이 개선되고 편의성이 손질되자, 평가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출시 9일만에, 스팀 이용자 평가 또한 '매우 긍정적'으로 전환됐다.
이용자들 사이에선 '붉며든다'는 표현도 생겨났다. 붉은사막에 스며든다는 뜻으로, 시간을 들일수록 재미가 달라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처음엔 낯설고 불편했던 게임이 플레이하면 할수록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낸다는 것. 그런 경험을 공유하는 이용자들이 늘어나면서 분위기는 확실히 바뀌었다.
그 모든 논란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은 평가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래픽. 조작이 불편하다는 말도, 스토리가 약하다는 말도 나왔지만, 출시 직후 전방위적인 혹평이 쏟아지는 그 순간에도 그래픽과 최적화만큼은 대다수에게 호평받았다. 이견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그 그래픽을 만든 것이 '블랙스페이스', 펄어비스가 직접 설계하고, 직접 쌓아온 게임 엔진이다.
게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동안에도 이 엔진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엔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단순한 기술 성과를 넘어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도구가 상상을 결정한다
2006년부터 2012년 사이, 전 세계 게임 시장에는 묘한 현상이 있었다. 장르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개발사도 달랐는데 게임들이 비슷하게 생겼다. 갈색과 회색이 지배하는 무거운 톤. 기어스 오브 워는 전쟁 게임이니 그렇다 쳐도, 우주 SF를 배경으로 한 매스이펙트 2조차 색감은 묘하게 탁하고 어두웠다. 은하계를 누비는 이야기인데 화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이 현상을 ‘UE3 look’이라 부를 만큼 하나의 표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분명한 기술적 조건이 있었다. Unreal Engine 3의 조명 구조에서는 광원이 많아질수록 연산 비용이 빠르게 증가했는데, 특히 실시간 간접광을 충분히 처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밝고 자연스러운 환경을 만드는 데에는 높은 비용이 요구되었다. 반대로 광원을 제한하고 대비를 강조한 어두운 환경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성능을 확보하기에 유리했다.
당시 하드웨어 성능은 지금처럼 여유롭지 않았고, 개발자들은 제한된 자원 안에서 결과를 최적화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 Gears of War와 같은 성공 사례가 보여준 시각적 스타일 역시 업계 전반에 강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기술적 효율과 시장에서 검증된 미학이 겹치면서, 어둡고 무거운 톤은 여러 선택지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해법으로 반복 선택되었고, 점차 하나의 경향으로 굳어졌다.
여기서 한 가지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도구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무엇을 쉽게 만들 수 있는지를 통해 표현의 방향에도 영향을 준다. 엔진이 잘 구현하는 방식은 반복적으로 선택되기 쉽고, 반대로 구현에 비용이 많이 드는 요소는 점차 뒤로 밀린다. 개발 과정에서의 이러한 선택이 누적되면, 비슷한 표현 방식이 계속 재생산되고, 결국 그 축적은 산업 전반의 시각적 경향으로 이어진다.
범용 엔진의 구조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강화한다. 다양한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하기 때문에, 특정한 표현 방식에 깊게 최적화되기보다는 평균적인 조건에서 무난하게 작동하는 방향을 택하게 된다. 이는 많은 개발사가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지만, 동시에 표현의 폭이 특정 범위 안에서 반복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결국 범용성은 가능성을 넓히는 조건이면서도, 표현을 일정한 방향으로 모으는 힘으로도 작용한다.
두 개만 남았다
한때 게임 엔진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선택지를 갖고 있었다. CryEngine은 2007년에서 2011년 사이 뛰어난 그래픽으로 주목받으며 Unreal Engine의 대안으로 자주 거론됐다. 그러나 2013년 이후 점차 존재감이 약해졌고, 시장은 서서히 언리얼과 Unity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급격한 전환이라기보다, 여러 선택이 누적되며 방향이 좁혀진 결과에 가깝다.
2024년 기준으로 언리얼과 유니티는 전 세계 게임 엔진 시장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Steam에 출시된 게임을 기준으로 보면, 약 70~80%가 이 두 엔진을 기반으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치만 보면 시장은 여전히 분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비중의 구성을 들여다보면 체감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Frostbite Engine은 Electronic Arts가 자사 타이틀을 위해 개발한 엔진으로, 'Battlefield' 시리즈를 중심으로 대규모 전장과 사실적인 물리·조명 표현에 강점을 보인다. Snowdrop Engine은 Ubisoft가 'The Division'을 위해 구축한 엔진으로, 도시 환경의 디테일과 동적 조명, 실시간 파괴 표현 등에 특화되어 있다. Anvil Engine 역시 같은 회사에서 'Assassin’s Creed' 시리즈를 중심으로 발전시켜 온 엔진으로, 넓은 오픈월드와 군중 시스템, 파쿠르 기반 이동을 안정적으로 처리하는 데 강점을 지닌다.
이들 엔진은 각자의 장르와 제작 방식에 맞춰 깊게 최적화되어 있지만, 동시에 특정 기업 내부의 파이프라인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외부 개발자가 선택할 수 있는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오픈소스 엔진인 Godot이 경량 구조와 높은 접근성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지만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요구되는 툴 체인, 인력 수급, 검증된 레퍼런스 측면 등에서는 아직 보완이 필요한 단계로 평가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시장은 넓어 보이지만 독립 개발자가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상용 엔진은 두 개뿐이라는 뜻이다.
플랫폼이 규칙을 바꾸면
2023년 9월, Unity는 새로운 요금 정책을 발표했다. 일정 기준을 넘은 게임에 대해 설치 횟수 기반으로 비용을 부과하는 이른바 ‘Runtime Fee’ 구조였다. 게임이 널리 배포될수록 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무료 게임이나 구독형 서비스 기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큰 논란이 일었다. 전 세계 개발자들의 반발이 이어졌고, 일부 개발사는 출시 계획을 재검토하거나 엔진 전환 가능성까지 검토했다. 이후 Unity는 2024년 정책을 철회하고 과금 구조를 재조정했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구조는 분명했다.
플랫폼이 정책을 바꾸면, 그 위에서 작업하는 개발자들은 대응할 수는 있어도 쉽게 떠나기 어렵다. 경력, 조직 구조, 그리고 수년간 축적된 코드와 파이프라인이 특정 엔진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선택을 넘어, 장기적인 의존 관계로 이어진다. 흔히 말하는 기술 종속은 이 지점에서 보다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난다.
Epic Games 역시 자사의 엔진 전략과 관련해 비슷한 논의를 낳은 바 있다. 언리얼 엔진의 발전 방향이 자사 플랫폼인 Fortnite 생태계와 점점 더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일부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특정 서비스 중심으로 기능이 설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실제로 커뮤니티에서는 이러한 방향성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꾸준히 등장했다. 범용 엔진은 다양한 개발자를 위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이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기업의 전략과 완전히 분리되기는 어렵다.
종속이 가장 깊은, 대한민국
전 세계 AAA 스튜디오를 기준으로 보면, GDC 2026 조사 기준으로 약 40% 이상이 자체 엔진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장기적인 비용 구조와 기술 통제를 고려해 내부 기술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국내에서는 자체 엔진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대표적으로 펄어비스가 자체 엔진 계열을 유지·확장하고 있으며, 그 외 주요 게임사들은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Unreal Engine이나 Unity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Nexon, Netmarble, Krafton 등은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외산 엔진을 채택해 왔고, NCSoft 역시 과거 자체 엔진을 개발했으나 최근에는 언리얼 기반 개발 비중이 다시 확대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업계에서 “일부 기업을 제외하면 많은 프로젝트가 외산 엔진에 의존한다”는 평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구조에는 몇 가지 산업적 배경이 있다. 국내 게임 산업은 상대적으로 빠른 개발과 빠른 수익 회수를 요구받는 환경에 놓여 있다. 자체 엔진 개발은 단순한 도구 제작이 아니라, 별도의 대형 프로젝트에 가까운 비용과 시간이 투입된다. 여기에 엔진 개발 경험을 갖춘 고급 인력은 빅테크나 글로벌 기업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장기적인 기술 축적이 쉽지 않다. 이러한 조건이 겹치면서 자체 엔진 생태계가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된다.
이 종속의 깊이는 채용 시장에서도 드러난다. ‘언리얼 개발자’, ‘유니티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와 같은 직무 명칭이 일반화되면서, 특정 엔진에 대한 숙련도가 개발자의 핵심 역량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실무적으로는 효율적인 분류이지만, 동시에 기술 기반이 특정 도구에 종속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도구의 정책이나 환경이 변할 경우, 개인의 경력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점에서 구조적 의존의 성격을 갖는다.
엔진은 게임 밖으로 나갔다
게임 엔진은 더 이상 게임 산업 내부에만 머무는 기술이 아니다.
Unreal Engine은 이미 다양한 산업에서 실시간 3D 플랫폼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단순한 인포테인먼트(HMI)를 넘어, 설계·검증·마케팅까지 하나의 3D 환경으로 통합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BMW는 차량 개발 과정에서 실시간 시각화 환경을 활용해 생산 이전 단계에서 디자인과 구조를 검증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Volvo 역시 차량 인터페이스와 사용자 경험 설계에 실시간 렌더링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영상 제작 분야에서도 변화는 더욱 가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단순한 배경 합성을 넘어, 촬영·연출·카메라 제어까지 실시간 엔진이 직접 담당하는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 Unreal Engine 기반 버추얼 프로덕션은 LED 볼륨과 디지털 트윈 기술을 결합해, 실제 차량 촬영이나 대규모 로케이션 없이도 현실에 가까운 장면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흐름은 콘텐츠 제작을 넘어 시뮬레이션과 산업 응용으로도 확장된다. 항공 분야에서는 실제 조종석과 동일한 인터페이스를 구현한 시뮬레이터가 Unreal Engine 기반으로 구축되어, 조종 훈련과 테스트에 활용되고 있다. 건축, 디지털 트윈, 과학 시각화 등에서도 동일한 엔진이 사용되며, 하나의 기술이 다양한 산업의 공통 기반으로 자리 잡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제 게임 엔진은 단순한 개발 도구를 넘어, 실시간 3D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제작과 시뮬레이션의 핵심 인프라로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이 인프라를 소수의 플랫폼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은, 게임 산업을 넘어 보다 넓은 기술 구조의 문제로 이어진다.
블랙스페이스, 도구를 만든다는 선언
블랙스페이스 엔진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펄어비스는 2010년 창사 때부터 자체 엔진으로 게임을 만들어왔다. 검은사막 엔진으로 검은사막을 만들었고, 그 엔진의 한계를 체감하면서 새로운 엔진 개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사막 엔진이 MMORPG 중심으로 설계된 탓에 콘솔과 모바일 확장에 구조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그 경험 위에서 다시 설계된 엔진이 블랙스페이다.
2021년 지스타에서 "블랙스페이스"라는 이름이 공식화됐고, 2025년 GDC에서 글로벌 미디어를 대상으로 처음 공개 시연됐다.
이후 2026년 ‘붉은사막’ 출시를 통해 실제 게임 환경에서 구현되면서, 기술이 하나의 결과물로 연결되었다. 약 7년에 걸쳐 게임과 엔진을 병행 개발한 셈이다.
이 긴 과정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비교적 명확하다. 펄어비스는 2025년 공개한 영상에서 “남들이 만든 틀 안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세계를 충분히 구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게임을 만드는 도구부터 직접 만들기로 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 문장은 블랙스페이스 엔진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이 프로젝트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성을 드러낸다.
펄어비스가 지향하는 것은 특정 장르나 플랫폼에 최적화된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하나의 기술 기반 위에서 구현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러한 접근은 자체 엔진을 보유한 개발사만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에 가깝다. 외부 엔진을 사용할 경우 기능과 구조는 일정 부분 엔진이 제공하는 범위 안에서 결정되지만, 자체 엔진은 개발 방향과 기술 선택을 내부에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결국 장기적인 설계 자유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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