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 지방 기부제도 ‘고향세(ふるさと納税)’가 ‘포인트 금지’ 규제와 관련해 법정 다툼에 휘말렸다. 라쿠텐 등 플랫폼 사업자와 일본 정부(총무성)의 갈등이 심화되며, 제도의 본질과 시장화의 역설이 다시 논의되고 있다. 한국의 기부·후원제도, 지역 균형 정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사건 개요
2025년 7월, 일본에서 한 가지 큰 이슈가 불거졌다. 일본의 대표 IT 기업인 라쿠텐(Rakuten)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고향세(ふるさと納税, 후루사토노제이)’라는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
일본 정부, 정확히는 총무성(우리나라의 행정안전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부처)이 “고향세에 기부할 때 중개 사이트에서 포인트를 주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금지한 데서 문제가 시작됐다. 이 명령은 2024년 6월부터 시행됐다.
라쿠텐을 포함해 여러 대형 플랫폼 기업과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정부 부처가 이 문제의 중심에 서 있다.
왜 이런 갈등이 일어났을까?
고향세 기부를 받을 때 각 지역(지자체)에서 기부자에게 주는 답례품(返礼品)이 점점 더 화려해지고, 여기에 라쿠텐과 같은 플랫폼에서는 ‘포인트’까지 얹어주는 일이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기부금이 단순히 지역을 돕는 의미에서 벗어나 ‘쇼핑하듯 답례품과 포인트를 노리고’ 몰리는 현상이 커졌다. 제도가 본래 목표와 달리 기형적으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정부가 제동을 건 것이다.
제도 취지와 규제, 시장논리의 충돌
고향세는 일본에서 2008년에 도입된 지방 활성화 정책이다. 쉽게 말해, 기부와 세금 혜택, 그리고 상품까지 한 번에 챙길 수 있는 제도다.
핵심은 이렇다.
‘도시에 살지만, 내가 태어난 시골이나 마음에 두는 지역에 기부를 하면, 그 지역의 특산품이나 농산물, 해산물 등 답례품을 받고, 동시에 세금도 감면받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도시로 인구와 돈이 집중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정책을 시작했다. 이후 해마다 고향세 기부금은 늘어나면서,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도의 순수한 취지는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자체들은 더 많은 기부금을 끌어오기 위해 답례품 경쟁에 나섰다. 여기에 라쿠텐 등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기부하면 자사 포인트까지 드립니다”라며 혜택을 더했다.
이렇게 되자 고향세 제도가 ‘기부’라기보다는, ‘상품을 사고 세금 혜택까지 보는 쇼핑’으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포인트까지 얹히니 실질적으로 ‘쇼핑몰+세제 혜택’ 구조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런 부작용이 심해지자, 일본 정부는 2017년부터 “답례품 가격은 기부금의 30% 이내로 제한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그리고 2019년에는 아예 법으로 못박아, 규제의 강도를 높였다.
그런데도 일부 지자체와 플랫폼에서는 고가의 답례품, 외지에서 생산된 상품, 그리고 포인트까지 얹어주는 편법이 계속 나오자, 정부는 규제를 계속해서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플랫폼 기업과 정부의 법정 공방
최근 고향세 제도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행정 지침 차원을 넘어, 대기업과 정부 간의 ‘법적 전면전’으로 번지고 있다.
2025년 7월, 일본의 IT 공룡 라쿠텐은 정부가 내린 ‘포인트 지급 금지’ 조치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미 3월에는 라쿠텐의 창업자인 미키타니 히로시 회장이 직접 일본 총리를 만나 항의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기업이 불만을 표출한 수준이 아니라, 여론을 움직이고 정책의 방향까지 바꿔보겠다는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플랫폼 기업과 정부의 힘겨루기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9년 오사카부 이즈미사노시(泉佐野市) 사건이다.
당시 이즈미사노시는 고가의 답례품과 대대적인 기부자 유치 마케팅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같은 행위가 고향세의 본래 취지와 어긋난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이즈미사노시를 고향세 제도에서 아예 제외하는 초강수를 뒀다.
하지만 이 결정은 법원에서 뒤집혔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중앙정부가 특정 지자체를 제도에서 배제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런 판결은 고향세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도 남용과 규제, 그리고 법정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부의 본질’과 행정 왜곡
고향세 제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기부의 본질’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고향세는 자신이 애정을 갖는 지역이나 출신 고향을 돕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세금 감면’과 ‘답례품·포인트 경쟁’이 격화되자, 기부의 의미보다는 실질적인 ‘쇼핑’에 더 가까운 제도로 바뀌었다.
실제로 고향세를 통해 모인 기부금은 1조 엔(한화 약 9조 원)을 넘어섰다. 그런데 그중 절반 가까이가 답례품을 사거나, 결제 및 홍보 비용 등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기부금의 상당 부분이 지역경제에 직접 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 경쟁이나 마케팅 비용으로 소진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행정 서비스의 약화다. 고향세 제도로 인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납부해야 할 세금을 자신이 지정한 지역에 보내다 보니, 대도시 세수가 빠져나가고 있다. 결국 국가 전체적으로 행정 서비스 재원이 줄어드는 ‘제로섬 게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 살리기’라는 원래 목표는 점점 ‘특산품 마케팅’과 경쟁에 밀리고, 기부의 순수한 목적은 점차 흐려지고 있다.
고향세와 같은 기부제도의 ‘시장화’와 ‘플랫폼 경쟁’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행정학이나 공공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왜냐하면, 공공정책이 원래 의도에서 벗어나 시장 논리에 휘둘리면, 사회적 형평성과 제도의 안정성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중앙-지방 갈등’이다. 일본에서도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제도 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부딪히고 있다. 정책을 법적으로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실제 효과와 부작용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도 최근 연구에서 자주 지적된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한국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점점 부각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농산물 직거래 플랫폼이나 지역사랑상품권처럼 ‘지역을 돕는다’는 취지의 각종 정책과 서비스가 빠르게 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누가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인가’ 경쟁이 과열되면서, 본래 정책 취지가 흐려지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다.
정부가 의도한 ‘지역 균형발전’ 대신, 플랫폼을 통한 마케팅이나 보상 경쟁이 앞서가면 정책의 효과가 왜곡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플랫폼 기업 사이의 규제 갈등, 정책의 실효성과 신뢰성 문제가 함께 대두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부의 본질’을 다시 찾는 일이다. 답례품이나 포인트처럼 과도한 인센티브 경쟁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과 ‘지역 사회 연계’라는 본래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또한, 플랫폼을 통한 기부와 후원 방식이 확대될수록 ‘보상과 공공성’ 사이의 균형이 더욱 중요해진다. 자치단체, 정부, 기업 각 주체가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하고, 제도의 예측 가능성과 법적 안정성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부자와 플랫폼, 그리고 지역사회가 서로 신뢰할 수 있다.
일본 고향세의 포인트 금지 논란은 단순히 하나의 규제 논쟁이 아니다. 공공제도가 시장 논리에 어떻게 흔들릴 수 있는지, 플랫폼 시대의 새로운 규범과 정책은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지,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복합적이고 중요한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이제는 제도 취지의 본질을 되새기고, 플랫폼 경쟁과 공공성, 법적 안정성이라는 다층적 과제를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저작권자ⓒ META-X.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