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데이터→플랫폼으로 확산되는 ‘디지털 익명성’ 통제 실험
[메타X(MetaX)] 일본 정부가 데이터 통신 전용 SIM 카드까지 본인 확인 의무를 확대하는 법 개정에 착수했다. 전화번호 중심이던 기존 통신 규제의 축이 ‘데이터 접속 권한’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는 단순한 제도 보완을 넘어 디지털 범죄 대응 전략의 전환으로 해석된다. SNS·메신저 기반 사기가 일상화된 환경에서, 일본은 통신 인프라 자체를 범죄 차단의 1차 관문으로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전화가 아닌 데이터가 범죄의 입구가 됐다”
일본 정부는 2026년 국회 제출을 목표로 ‘휴대전화 부정 이용 방지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지금까지 음성 통화 SIM에만 적용되던 계약 시 본인 확인(KYC) 의무를 데이터 통신 전용 SIM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현행 제도는 전화번호를 통한 음성 통화를 전제로 설계돼 왔다. 그러나 범죄 환경은 이미 그 전제를 벗어났다. 최근 일본에서 급증한 투자 사기·로맨스 사기·가짜 암호화폐 거래 사기 대부분은 전화가 아닌 SNS, 암호화 메신저, 앱 기반 데이터 통신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정부가 문제 삼는 지점은 명확하다. 범죄의 출발점이 더 이상 ‘전화번호’가 아니라 ‘익명 데이터 회선’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왜 데이터 SIM인가: ‘익명 데이터 접속권’의 구조적 문제
일본 경찰청과 소비자청이 분석한 사기 범죄 패턴은 비교적 일관돼 있다.
첫째, 범죄 조직은 저가 데이터 SIM을 다량 확보한다.
둘째, 해당 회선을 활용해 SNS·메신저 계정을 대량 생성한다.
셋째, 해외 서버·해외 결제 수단과 결합해 추적을 어렵게 만든다.
넷째, 일정 기간 후 계정을 폐기하고 동일한 방식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전화번호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데이터 SIM만 있으면 SNS 가입, 암호화 메신저 사용, 피싱 사이트 접속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전화 회선 규제만으로는 더 이상 범죄의 입구를 통제할 수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일본 정부가 데이터 SIM을 규제 대상으로 포함시키려는 배경에는 이러한 현실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법 개정의 핵심: ‘이용자’가 아니라 ‘구조’를 막는다
이번 개정안은 단순히 신원 확인 범위를 넓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제도 설계의 초점은 범죄자를 사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가 가능해지는 구조 자체를 차단하는 데 맞춰져 있다.
첫째, 데이터 SIM 계약 시에도 신분증을 통한 본인 확인을 의무화한다. 이는 데이터 통신이 음성 통신과 동일한 수준의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는 선언에 가깝다.
둘째, 통신사에 과도한 회선 보유자에 대한 계약 거절 권한을 부여한다. 범죄 조직이 수십, 수백 개의 데이터 회선을 확보하는 관행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장치다.
이로써 일본의 통신 규제는 ‘범죄 발생 이후의 수사’ 중심 모델에서 ‘통신 인프라 단계에서의 사전 차단’ 모델로 이동하게 된다.
일본만의 선택인가: 글로벌 규제 흐름과의 접점
이번 조치는 일본만의 특수한 대응이라기보다, 글로벌 디지털 신원 규제 강화 흐름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유럽 다수 국가는 이미 프리페이드 SIM 등록 의무화를 시행 중이며, 싱가포르와 호주는 통신 계정과 국가 디지털 신원 체계를 점진적으로 연계하고 있다. 미국은 통신보다는 플랫폼 중심의 KYC와 실명성 강화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그 역시 익명성 축소라는 큰 방향에서는 다르지 않다.
일본의 선택이 특징적인 지점은 규제의 ‘층위’다. 플랫폼 규제가 기술적·법적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가장 물리적이고 통제 가능한 레이어인 통신 회선을 우선 통제 지점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쟁점과 논란: 범죄 억제 vs 이용자 불편
물론 반발과 우려도 만만치 않다.
외국인 관광객이나 단기 체류자의 데이터 SIM 이용이 불편해질 수 있고, 태블릿·IoT 기기·서브 디바이스를 다수 사용하는 이용자에게는 추가 행정 부담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통신사 입장에서는 계약 관리와 신원 확인 비용 증가가 불가피하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세부 운영 기준은 향후 조정 가능하지만, 익명 데이터 통신이 범죄 인프라로 악용되는 구조 자체를 방치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불편보다 공공 안전을 우선하겠다는 정책적 선택이다.
더 큰 그림: ‘익명성’에 대한 국가 인식의 변화
이번 개정 논의가 갖는 의미는 기술적 규제를 넘어선다. 이는 디지털 사회에서 익명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의 시선 변화이기 때문이다.
과거 통신 규제의 질문이 “누가 전화를 걸었는가”였다면, 이제는 “누가 데이터에 접근했는가”로 바뀌고 있다. SNS·메신저·암호화 앱 시대에 데이터 접속권은 곧 모든 디지털 행위의 출발점이다. 일본은 이 지점을 더 이상 무규제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명확한 신호를 보낸 셈이다.
통신 규제의 다음 단계가 열렸다
일본의 데이터 SIM 본인 확인 의무화 추진은 단순한 법 개정이 아니다. 이는 범죄 대응의 축을 사후 추적에서 사전 차단으로 전환하고, 통신 규제의 초점을 전화번호에서 데이터 접속으로 이동시키며, 디지털 익명성에 대한 국가 개입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시도다.
이 실험이 제도적으로 안착할 경우, 다른 국가들 역시 “데이터 통신은 어디까지 익명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려워질 전망이다. SNS 사기를 막기 위한 일본의 선택은, 디지털 사회에서 자유와 책임의 경계를 다시 그리는 하나의 분기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저작권자ⓒ META-X.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