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어비스가 던진 승부수
[메타X(MetaX)] 2026년 3월 20일, 펄어비스의 '붉은사막'이 드디어 세상에 나온다. 2018년 하반기 개발을 시작해 약 8년, 2019년 지스타에서 첫 공개 이후로 따지면 7년이 걸렸다.
오래 걸렸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어디를 보고 만들었는가'다. 붉은사막은 처음부터 북미·유럽 콘솔 시장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 PS5, Xbox Series X|S, PC(스팀), Mac 동시 출시. 라이브 서비스가 아닌 패키지 판매. MMORPG가 아닌 싱글 플레이 중심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한국 대형 게임사가 좀처럼 선택하지 않는 방향이다.
한국 게임에서 보기 드문 포지션
한국 대형 게임의 성공 공식은 오랫동안 명확했다. MMORPG, 라이브 서비스, 아시아 중심. 리니지(Lineage) 시리즈, 검은사막(Black Desert), 로스트아크(Lost Ark) 모두 이 틀 안에서 성장했다. PC방 문화와 결합한 F2P(Free-to-Play) 모델, 지속적인 업데이트로 유저를 붙잡는 라이브 서비스, 중국·일본·동남아를 주력으로 삼는 지역 전략. 한국 게임산업은 이 공식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다.
붉은사막(Crimson Desert)은 그 반대를 선택했다. 패키지형 판매, 콘솔·PC 동시 출시, 서사와 액션 중심의 싱글 플레이. 이건 서구 AAA 게임의 문법이다. '위쳐 3(The Witcher 3)', '레드 데드 리뎀션 2(Red Dead Redemption 2)', '갓 오브 워(God of War)' 등이 걸어온 길이다.
물론 최근 한국 게임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네오위즈의 P의 거짓(Lies of P)은 소울라이크 장르로 글로벌 200만 장 이상을 판매했고, 시프트업의 스텔라 블레이드(Stellar Blade)는 PS5 독점 액션 게임으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언리얼 엔진 기반이었고, 개발 규모나 기간 면에서 붉은사막과는 결이 다르다.
붉은사막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자체 개발한 차세대 엔진(블랙스페이스 엔진)을 사용한다. 둘째, 7년 이상의 개발 기간과 1,500억~2,000억 원 규모의 투자가 들어갔다. 셋째,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기간 독점 제안을 거절하고 멀티 플랫폼 동시 출시와 셀프 퍼블리싱을 선택했다. 한국 게임사가 이 정도 규모로, 이 정도 리스크를 안고, 서구 AAA 시장에 정면 도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잘하던 것"이 아니라 "잘 시도하지 않던 것"에 대한 도전이다.
7년이 남긴 것, 기술과 비용
'붉은사막(Crimson Desert)'은 펄어비스가 새로 개발한 '블랙스페이스 엔진(BlackSpace Engine)'으로 만들어졌다. 검은사막(Black Desert) 엔진의 개조판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세대 엔진이다. 거리 기반 렌더링, 심리스 로딩 기술, 레이 트레이싱이 적용됐고, 2025년 GDC에서는 시간대별 환경 변화 타임랩스, 안개 유체 시뮬레이션, GPU 기반 옷감·머리카락 시뮬레이션, 얕은 물과 흐르는 물 표현 등을 시연해 기술력을 입증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엔진 성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나왔다.
자체 엔진 개발은 단순한 기술 과시가 아니다. 외부 엔진(언리얼, 유니티 등)을 쓰면 라이선스 비용이 발생하고, 엔진사의 업데이트 일정에 종속된다. 자체 엔진은 초기 투자가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원하는 기능을 원하는 시점에 구현할 수 있는 자유도를 확보한다. 펄어비스 창업자 김대일 의장이 검은사막 시절부터 "원하는 게임성을 구현하려면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며 자체 엔진 개발을 고집해온 이유다.
7년은 콘솔 개발 경험을 쌓는 시간이기도 했다. 펄어비스는 PC 온라인 게임으로 성장한 회사다. 콘솔 시장 진출은 처음이었고, 소니·마이크로소프트와의 협업, 콘솔 인증 절차, 글로벌 QA 체계 구축 등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허진영 대표는 2022년 "전통 콘솔 시장에 도전하는 건 처음이라 많은 파트너사와의 협업과 조언이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7년 개발에는 대가도 따른다. 업계 추정에 따르면 평균 170명 안팎의 인력이 투입됐고, 인건비만 600억 원 안팎이 소요됐다. 여기에 글로벌 마케팅, 플랫폼 수수료, 시네마틱 영상 제작, 다국어 더빙(12개 언어), 패키지·디지털 유통 비용을 더하면 총 개발비는 1,500억~2,000억 원 수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펄어비스 연 매출(2024년 기준 3,424억 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 비교해보면, CD 프로젝트 레드(CD Projekt Red)의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은 약 1억 7,000만 달러(약 2,200억 원), 프롬소프트웨어의 엘든 링(Elden Ring)은 5년 개발에 추정 1억 달러(약 1,300억 원) 수준이었다. 붉은사막의 개발비는 글로벌 AAA 대작과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수준이지만, 펄어비스의 회사 규모를 고려하면 올인에 가까운 베팅이다.
펄어비스는 2024년 상반기에만 약 612억 원을 연구개발에 투입했고, 2023년에는 총 1,329억 원으로 매출의 38.8%를 연구개발에 썼다. 같은 기간 넥슨의 R&D 비율이 약 20%, 엔씨소프트가 약 30%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다. 기술 투자에 대한 집념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투자가 매출로 돌아오느냐다.
구체적으로 뭘 보여줬나
'붉은사막(Crimson Desert)'이 처음으로 일반 유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24년 8월 게임스컴(Gamescom 2024)이었다. 독일 쾰른메쎄 전시장 6홀에 마련된 펄어비스 부스에서는 삼성디스플레이의 QD-OLED 모니터 70대가 설치됐고, 관람객들은 30분간 컨트롤 영상을 시청한 뒤 30분간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체험했다. 행사 기간 중 IGN을 통해 52분짜리 오픈월드 탐험 플레이 영상도 공개됐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붉은사막은 게임스컴 어워드에서 '최고의 비주얼(Best Visuals)', '최고의 에픽(Most Epic)', '최고의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최고의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게임' 등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수상은 리틀 나이트메어 3(Little Nightmares 3), 몬스터 헌터 와일즈(Monster Hunter Wilds) 등 기존 프랜차이즈 신작에 밀렸지만, 신규 IP로서 4개 부문 후보에 오른 건 한국 게임 중 유일했다. 업계에서는 "기존 IP 신작들이 유리한 구조에서 신규 IP가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해외 미디어 반응은 더욱 구체적이었다. 대부분의 매체에서 "현실적이고 복잡하며 잠재적으로 훌륭하다"고 평했고, IGN은 "갓 오브 워(God of War)와 드래곤즈 도그마(Dragon's Dogma)가 아기를 낳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물론 비판도 있었다. 일부 기자는 에임 고정이 되지 않는 타겟팅 방식에 불편함을 표했고, 파티클 이펙트가 과도해 시야를 방해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펄어비스는 이 피드백을 받아들여 출시 버전에 파티클 효과 조절 옵션과 카메라 흔들림 설정을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2025년에는 글로벌 순회 시연이 본격화됐다. 3월 베네룩스 미디어 데모를 시작으로 유럽(런던, 트위치콘 로테르담, 게임스컴), 북미(GDC, 서머게임페스트, 팍스 이스트/웨스트), 남미(브라질), 중국(빌리빌리월드, 차이나조이)을 순회했다. 9월 도쿄게임쇼 2025(TGS 2025)에서는 일본 게이머 대상 첫 시연이 진행됐는데, AMD, 레이저, 벤큐 등 파트너사와 함께 PC 100여 대 규모의 부스를 마련했다. 일반 관람객 대기 시간이 2시간을 넘길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일본 게임 매체 4Gamer는 시연 후 "오픈월드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고 설레였다"고 전했고, 패미통(Famitsu)은 "전투의 무게감이 확실하다"고 평가했다.
게임스컴 2025에서는 새로운 퀘스트라인 데모가 공개됐다. 전년 보스전 중심 시연과 달리 초중반부 스토리 퀘스트를 체험할 수 있었다. 160석 규모의 시연 부스에 약 120분의 대기 줄이 이어졌고, 현장에서 플레이한 해외 게이머들은 "실제 전장에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이라며 "이 정도 퀄리티라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리스크와 우려
1,500억~2,000억 원의 개발비를 회수하려면 상당한 판매량이 필요하다. 업계에서는 손익분기점을 연간 300만 장 수준으로 보고 있다. 70달러 기준 풀프라이스 판매를 가정하면 약 2,100억 원의 매출이지만, 여기서 플랫폼 수수료(스팀 30%, 콘솔 30%), 유통 마진, 세금 등을 제외하면 실제 펄어비스에 돌아오는 금액은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다. 300만 장이 '최소한'인 이유다.
현재 사전예약 지표는 낙관하기 어렵다.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 사전예약 순위는 한국 12위, 미국 18위권이고, 글로벌 스팀 위시리스트 순위는 23위다. 삼성증권 오동환 연구원은 "현재 순위를 감안하면 연간 300만 장 판매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분석했다. 물론 사전예약 순위가 최종 판매량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출시 후 입소문, 스트리머 반응, 메타크리틱 점수에 따라 판매 곡선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신규 IP가 초기 관심도 없이 롱런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펄어비스는 2023년 영업손실 164억 원, 2024년 121억 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적자 상태다. 2025년에도 약 228억 원의 적자가 예상되어 3년 연속 적자가 확실시된다. 매출의 80% 이상을 '검은사막(Black Desert)' 단일 IP에 의존하는 구조도 변하지 않았다. 검은사막은 2014년 출시 후 10년 넘게 꾸준한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MMORPG 특성 상 유저 이탈은 피할 수 없고 신규 유입도 둔화되고 있다.
붉은사막이 성공하면 단일 IP 의존에서 벗어나 포트폴리오 다변화의 첫 발을 뗄 수 있다. 하지만 실패하면 7년간 누적된 개발비 부담과 실적 공백이 동시에 부각되며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특히 붉은사막에 투입된 비용은 이미 '무형자산'으로 장부에 잡혀 있어, 기대 이하의 성과가 나오면 손상차손을 인식해야 한다. 회계상 적자가 급격히 불어나는 구조다.
하지만 서구 AAA 오픈월드 시장은 이미 검증된 프랜차이즈들이 장악하고 있다. 위쳐 3: 와일드 헌트(The Witcher 3: Wild Hunt), 엘든 링(Elden Ring), 갓 오브 워(God of War),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 시리즈, 레드 데드 리뎀션 2(Red Dead Redemption 2),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The Legend of Zelda: Tears of the Kingdom) 등이다. 이들은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팬덤과 브랜드 인지도를 갖고 있다. 신규 IP로 이들과 정면 경쟁해야 하는 붉은사막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게다가 최근에는 중국 게임사들도 AAA 시장에 본격 진입하고 있다. 게임사이언스의 '검은신화: 오공(Black Myth: Wukong)'은 2024년 출시 후 전 세계적으로 2,000만 장 이상 판매되며 중국 AAA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한국 게임이 '아시아 대표'로 서구 시장에 도전하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중국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결과보다 좌표
붉은사막의 성패는 아직 알 수 없다. 3월 20일 출시 후 첫 주 판매량, 메타크리틱 점수, 유저 리뷰, 스트리머 반응 등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게임이 찍어둔 좌표는 결과와 무관하게 이미 의미가 있다.
한국 게임사가 자체 엔진으로, 7년 이상의 개발 기간을 감수하며, 북미·유럽 콘솔 시장을 정면으로 겨냥한 AAA 오픈월드를 만들어 출시까지 끌고 왔다. 이 문장에 담긴 선택들을 하나씩 뜯어보면 펄어비스가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감수했는지 알 수 있다. 자체 엔진은 초기 비용과 시간이 크지만 장기적 자유도를 택한 것이고, 7년 개발은 '빠른 출시 후 업데이트' 대신 '완성도 우선'을 택한 것이다. 콘솔 시장 진출은 PC 온라인 중심의 한국 게임 공식을 벗어난 것이고, 셀프 퍼블리싱은 글로벌 대형 퍼블리셔의 유통망 대신 마진과 통제권을 택한 것이다.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 기간 독점을 제안했을 때 펄어비스는 거절했다. 독점 계약금과 마케팅 지원을 포기하고 멀티 플랫폼 동시 출시를 선택한 것이다. 이 선택이 옳았는지는 출시 후에야 알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 게임사도 글로벌 플랫폼 홀더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성공하면 한국 AAA 가능성 확장의 레퍼런스가 되고, 부진해도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교훈이 된다. 어느 쪽이든 후발 주자들이 참고할 좌표가 남는다. 게임 산업에서 완주한 시도는, 결과와 무관하게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게임도 북미·유럽 AAA 오픈월드를 정면으로 시도할 수 있는 지점까지 왔다.
그 좌표를 찍은 것 자체가 붉은사막의 첫 번째 성과다.
과장 없이, 그리고 폄하도 없이.
2026년 3월, 지켜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METAX = 김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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