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서비스와 디지털 지갑의 결합
보안성과 개인정보 보호 논란
영국 정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새로운 디지털 신분증(Digital ID)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제도는 불법 이민자의 취업을 막는 동시에 합법적 거주민과 시민들이 정부 서비스를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기어 스타머(Keir Starmer) 총리는 “안전한 국경과 공정한 이민 관리가 국민의 정당한 요구”라며 이번 정책을 ‘변화를 위한 계획(Plan for Change)’의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불법 노동 차단, 국경 통제 강화
새 제도의 핵심은 ‘Right to Work’(취업 자격 확인) 과정에서 디지털 ID를 의무화하는 것이다. 종이 문서 사본을 제출하거나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대신, 휴대폰 속 디지털 지갑에서 본인의 신분을 확인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불법 이민자가 일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불법 노동을 알선하는 범죄 조직의 수익 구조를 차단하겠다는 구상이다.
총리는 “영국에 불법으로 들어와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며 소규모 보트(소위 ‘스몰보트’)를 통한 불법 입국을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했다. 실제로 현 정부 출범 이후 불법 노동 관련 체포가 50% 늘었고, 최근 영불 합의에 따라 불법 이민자 송환도 본격화되고 있다.
공공서비스와 디지털 지갑의 결합
디지털 ID는 단순히 이민 관리 수단을 넘어, 운전면허, 세금 기록, 복지 서비스, 아동 보육 지원 등 주요 행정 서비스에 곧바로 접속할 수 있는 통합 키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이미 NHS 앱이나 모바일 간편결제가 대중화된 만큼, 정부는 이를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형태로 제도를 설계하고 있다.
앞서 발표된 디지털 운전면허증과 함께, 정부는 모든 공공 서비스 접근을 통합할 수 있는 GOV.UK 디지털 지갑 구축을 병행한다. 디지털 신분증은 이 지갑 속에 저장되어, 시민의 스마트폰이 곧 ‘전자 주민등록증’ 역할을 하게 된다.
보편적 접근성과 포용성 강조
정부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 노숙인, 취약계층을 위한 대책도 함께 제시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을 고려해 오프라인 지원 체계를 마련하고, 직접 대면 상담·등록을 제공하는 아웃리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이미 앞서 디지털 신분증을 도입한 나라들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 에스토니아: 부모들이 한 번 등록으로 보육, 의료, 아동수당까지 통합 이용.
- 덴마크: 학생들이 디지털 ID로 자동 성적·학력 증명서를 제출.
- 호주: 은행 계좌 개설부터 주류 구매까지 통합 인증.
- 인도: 복지 부정수급을 막아 연간 100억 달러 절감.
영국 정부는 이러한 글로벌 사례를 벤치마킹하면서, “포용성과 접근성을 최우선”에 두겠다고 강조했다.
보안성과 개인정보 보호 논란
디지털 신분증은 개인정보 유출 우려와 맞물려 민감한 주제다. 영국 정부는 이번 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의 암호화·인증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데이터는 중앙 서버가 아닌 개인의 휴대폰 기기에 저장되며, 기기가 도난·분실될 경우 즉시 폐기·재발급이 가능하다. 이는 오히려 종이 여권이나 주민등록증보다 안전하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또한, 디지털 ID는 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공유하도록 설계된다. 예를 들어, 술집에서 성인 여부를 확인할 때는 이름이나 주소 대신 “18세 이상” 여부만 증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번 디지털 신분증 도입은 단순한 행정 편의성 개선을 넘어 이민·노동·안보 정책과 직결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스타머 총리는 “불법 이민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해소하고, 공정한 영국을 재건하겠다”고 못 박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감시 사회로의 확장 가능성을 우려한다. 디지털 ID가 일단 도입되면, 정부가 국민의 이동·취업·서비스 이용 이력을 추적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특히 브렉시트 이후 강화된 국경 통제 기조와 맞물려, 이 제도가 시민 자유와 국가 통제 사이의 새로운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기회와 위험의 양날
영국의 디지털 신분증 제도는 행정 효율성과 국가안보 강화라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개인정보와 시민 자유라는 민감한 문제를 동반한다. 디지털 ID가 진정으로 ‘포용적’이고 ‘안전한’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향후 공청회와 시범 운영 과정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영국이 내건 목표는 분명하다.
“불법은 막고, 합법은 쉽게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어디까지 보장할 것인지는 여전히 남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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