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X(MetaX)] 2025년 11월 25일, 일론 머스크가 X(구 트위터)에 글을 하나 올렸다.
"Grok 5가 2026년에 세계 최고의 리그 오브 레전드 팀을 이길 수 있는지 보자."
조건도 붙었다. AI는 카메라로 모니터 화면만 볼 수 있고, 반응 속도와 클릭 속도는 인간 수준으로 제한된다. 게임 내부 데이터에 직접 접근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과 같은 조건에서 플레이하겠다는 뜻이다.
도전장을 받아든 건 T1이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3연패, 통산 6회 우승. e스포츠 역사상 가장 완성된 조직이라 불리는 팀이다. 그 중심에는 Faker가 있다. T1은 몇 시간 만에 응답했다. Faker가 트로피를 들고 "쉿" 제스처를 취하는 GIF와 함께, 짧은 문장을 남겼다.
"We are ready. R U?"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지 거의 10년이 됐다. 그 사이 AI는 바둑, 체스, 도타2, 스타크래프트에서 인간을 넘어섰다. "AI가 인간을 이길 수 있는가"는 이제 질문이 아니다. 이미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머스크가 다시 인간을 호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대결은 승부를 가리기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AI가 무엇이 되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
▣ 머스크는 무엇을 제안했나
머스크의 제안은 구체적이었다. Grok 5는 xAI가 개발 중인 차세대 AI 모델로, 2026년 초 공개가 예정되어 있다. 그는 이 모델이 "게임 설명서를 읽고 실험하는 것만으로 어떤 게임이든 플레이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주장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AI는 게임 내부 데이터가 아니라 모니터 화면만 볼 수 있다. 카메라를 통해 입력받는 시각 정보는 20/20 시력 수준으로 제한된다. 둘째, 반응 속도와 클릭 속도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초인적인 조작 능력으로 승부를 가르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T1의 응답은 빨랐다.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Faker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팀에게 Faker는 단순한 선수가 아니다. 6회 월드 챔피언, 리그 오브 레전드 역사상 가장 오래,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해온 선수. 그가 있는 팀이 도전을 수락했다는 건 "최고 vs 최고"라는 구도가 성립했다는 의미다.
라이엇 게임즈의 반응도 주목할 만했다. 공동 창업자 Marc Merrill이 머스크의 트윗에 "Let's discuss :)"라고 답했다. 게임 퍼블리셔가 공식적으로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이 대결이 실제로 성사될 경우, 라이엇이 공식 후원하는 이벤트가 될 가능성이 열렸다.
재미있게도, 프로게이머 커뮤니티의 반응은 갈렸다. 전 프로 Voyboy는 "LCS(북미 리그) 팀도 못 이길 것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변수가 너무 많고, 팀 조율이 필수적이다."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또 다른 전 프로 Doublelift는 더 직설적이었다. "Grok이 나를 이기면 머리를 밀겠다."
반면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 프로 Pobelter는 "OpenAI의 도타2 대결이 흥미로웠는데,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도 보고 싶다"며 도움을 제안했다.
▣ 머스크는 왜 하필 게임을 선택했나
AI의 능력을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논문을 쓸 수도 있고, 벤치마크 점수를 공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게임일까.
게임은 규칙이 명확하다.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갈린다. 성과를 숫자로 보여줄 수 있고, 결과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 게임인 셈이다.
머스크가 제시한 조건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AI가 인간과 같은 시각 입력만 받고, 인간 수준의 반응 속도로 플레이한다는 설정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완전한 공정이 가능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건 서사적 설득력이다. "같은 조건에서 싸웠는데 AI가 이겼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임팩트가 생긴다.
대중적 이해 가능성도 크다. 체스, 바둑, 도타2, 스타크래프트. AI vs 인간 대결의 역사적 장면들은 모두 게임이었다. 논문 한 편보다 경기 결과 하나가 훨씬 빠르게 확산된다. 게임은 AI 능력을 "이야기"로 만들기 가장 좋은 무대다.
▣ 과거 대결의 계보 AI와 인간의 대결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의 역사적 선례가 축적돼 있다. 각각의 대결은 당대 기술의 한계를 시험했고, 동시에 AI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한 단계씩 바꿔놓았다.
1997년, IBM의 딥블루는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으며 큰 충격을 안겼다. 기계가 인간의 지적 영역을 침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분명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체스는 규칙이 명확하고 경우의 수가 유한한 게임으로, 충분한 계산력과 탐색 능력이 있다면 승부를 낼 수 있는 영역으로 평가돼 왔다. 딥블루의 승리는 ‘계산하는 기계’의 가능성을 상징했다.
2016년의 알파고는 상황이 달랐다.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는 이세돌 9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AI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바둑은 경우의 수가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다고 알려질 정도로 복잡해, 직관과 감각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알파고의 승리는 AI가 단순 계산을 넘어, 인간이 ‘창의적’이라고 믿어온 영역에도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OpenAI Five가 도타2 프로팀을 상대로 승리하며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5대5 팀 게임에서 AI가 인간 팀을 이긴 첫 사례였다. 그러나 이 대결은 곧 논쟁을 불러왔다. AI가 게임 API에 직접 접근해 내부 데이터를 읽었고, 반응 속도 역시 인간을 뛰어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성과의 크기만큼이나 “과연 공정한 대결이었는가”라는 질문이 함께 남았다.
같은 해, 딥마인드의 알파스타는 스타크래프트2에서 그랜드마스터 등급에 도달하며 실시간 전략 게임에서도 복잡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했다. 다만 이 역시 특정 게임을 위해 설계되고 훈련된, 명확한 목적을 가진 게임 특화 AI였다.
이 대결들의 공통점은 기술 검증이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다. 연구 조직이 주도했고, 핵심 성과는 논문과 성능 지표로 정리됐다. 대중적 이벤트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목적은 어디까지나 연구 성과의 입증에 가까웠다.
▣ 이번 대결이 다른 이유 Grok vs T1은 기존의 AI 대 인간 대결과 결이 다르다. 차이는 세 가지 지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임 AI가 아니라 범용 AI의 시험 이전의 AI들은 모두 특정 게임을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었다. 알파고는 바둑만, 알파스타는 스타크래프트2만 플레이할 수 있었고, OpenAI Five 역시 도타2 전용 AI였다. 이들 시스템은 공통적으로 게임 내부 데이터에 직접 접근했다. 화면을 ‘보는’ 대신, 게임 엔진이 제공하는 좌표 값, 체력 수치, 스킬 쿨다운 같은 구조화된 정보를 읽었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게임을 이해한 셈이다.
머스크가 Grok에 대해 주장하는 설정은 이 지점에서 다르다. 카메라로 모니터 화면만을 보고, 게임 설명서를 읽어 규칙을 스스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인간처럼 보고, 인간처럼 배운다”는 서사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Grok은 특정 게임을 잘하도록 만들어진 게임 AI가 아니라, 범용 AI가 게임이라는 환경을 하나의 문제 공간으로 다루는 사례가 된다.
이 구도에서 중요한 것은 승패 그 자체가 아니다. 핵심은 적응 능력의 시연이다. 특정 게임에 특화되지 않은 AI가 세계 최고 수준의 인간 팀과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그 자체가 목표다. 이는 게임 AI의 진보라기보다, AGI(범용 인공지능) 서사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할 장면이다.
개인이 아니라 조직을 상대한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개인 대 개인의 구도였다. 한 명의 천재와 계산 기계가 맞붙었다. Grok vs T1은 다르다. 5대5 팀 게임이며, 상대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이다.
T1은 Faker 한 명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섯 명의 선수가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전략을 조율하며, 상대의 움직임에 즉각 반응한다. 코칭 스태프는 메타를 분석하고, 팀 전체는 하나의 시스템처럼 움직인다. 즉, 인간 쪽 역시 고도로 최적화된 조직이다.
AI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 조직의 복합성이다. 팀 조율, 심리전, 예측 불가능한 판단의 연쇄. 이는 AI에게 가장 까다로운 영역이다. Faker가 왜 ‘GOAT’로 불리는지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그는 확률적으로 불리한 선택을 감행하고, 그 선택을 승리로 전환해온 선수다. 30% 승률의 한타를 걸어 판을 뒤집는 판단. 데이터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선택이다. AI라면 같은 상황에서 싸움을 피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Faker는 그 비합리성으로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이번 대결은 단순한 AI vs 인간의 구도가 아니다. AI 시스템과 인간 조직의 대결에 가깝다.
연구 실험에서 플랫폼 퍼포먼스로 알파고의 경로를 떠올려보자. 딥마인드는 연구를 수행했고, 이세돌과의 대결로 주목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했다. 대중적 이벤트의 형식을 띠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학술적 검증에 있었다. 하지만 Grok의 경로는 다르다. 발표는 연구 컨퍼런스가 아니라 X에서 이루어졌다. 실시간으로 확산됐고, 커뮤니티가 반응했으며, 밈이 만들어졌다. 논문보다 화제성이 앞선다. 이 대결은 연구 결과의 발표라기보다, 플랫폼 정체성을 드러내는 퍼포먼스에 가깝다.
경쟁 상대 역시 달라졌다. 알파고의 상대는 이세돌이었다. Grok의 상대는 T1만이 아니다. OpenAI, 구글 딥마인드, 앤트로픽 등 다른 AI 플랫폼들이 동시에 비교 대상이 된다. “우리 AI는 무엇이 다른가”를 보여주기 위한 서사 경쟁이 진짜 전선이라는 뜻이다.
즉, 이 대결의 진짜 관객은 투자자와 사용자, 그리고 다음 선택을 고민하는 시장이다.
▣ 머스크에게 이 대결의 의미 이 대결이 실제로 성사되고, Grok이 승리한다면 어떤 그림이 만들어질까. 가장 먼저 얻는 것은 범용 AI 서사의 강력한 마케팅 효과다. “게임 전용으로 설계된 AI가 아니라, 범용 AI가 세계 최고 팀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xAI를 단숨에 차별화한다. OpenAI나 구글 딥마인드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이 서사는 머스크가 동시에 추진 중인 다른 사업들과도 연결된다. 테슬라의 자율주행, 로보택시,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다. “화면을 보고 판단하는 AI”는 이 모든 프로젝트의 공통 기반이다. Grok이 게임 화면을 인식하고 판단해 플레이할 수 있다면, 같은 원리로 도로 상황을 이해하거나 공장 환경을 인식해 작업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기술적 동일성의 문제라기보다,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연결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Grok이 패배한다면 어떨까. 기술적 한계는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머스크에게 실패는 곧바로 패배로 환산되지 않는다. “아직 발전 중”이라는 서사로 전환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의 트랙 레코드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스페이스X의 로켓은 여러 차례 폭발했지만, 그 장면들은 실패가 아니라 ‘도전의 증거’로 소비됐다. 실패조차 브랜드 자산으로 만드는 데 머스크는 익숙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전 자체가 이미 주목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기든 지든, Grok과 xAI는 AI 경쟁 구도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결과와 무관하게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성과 차별화는 확보된다.
결국 이 대결은 머스크에게 시험이 아니다. 포지셔닝이다. 범용 AI라는 방향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이며, 기술 증명보다 서사 구축이 앞서는 이벤트다.
▣ AI는 왜 다시 인간을 불렀나 이미 증명된 사실들이 있다. AI는 체스에서, 바둑에서, 도타2에서, 스타크래프트에서 인간을 이겼다. 단일 게임, 단일 선수를 상대로 한 승부에서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는 다시 인간을 무대로 불러낸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이긴 게임은 더 이상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AI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서사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상대, 새로운 조건이 있어야 관심이 유지되고, 투자가 이어지며, 사용자가 모인다. 그리고, 인간은 여전히 AI 서사의 기준점이다. AI의 발전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은 인간과의 비교다. 벤치마크 점수는 전문가만 이해하지만, 인간과의 대결은 누구나 이해한다. 그래서 게임이 선택되고, 인간이 호출된다.
Faker와 T1이 거론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강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e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완성된 인간 조직에 가깝다. 월드 챔피언십 다수 우승, 장기 집권, 압도적인 레거시. 이들을 상대로 한다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서사적 임팩트를 만든다.
물론, 이번 대결이 실제로 성사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성사된다 해도 결과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변수가 많고, 팀 조율이 핵심이며,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비합리적 판단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대결은 AI가 인간을 넘었는지를 묻지 않는다. AI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 하는지를 묻는다.
알파고 이후 10년, AI는 여전히 인간을 필요로 한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겼다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METAX = 김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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