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AI 덕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늘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AI 덕분에 못하는 것이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AI를 꽤 좋아한다. 그리고 AI 시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내가 가진 능력의 경계에서 멈춰야 할 때가 많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고, 영상을 만들고 싶어도 편집 프로그램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코딩을 해보고 싶어도 개발자가 아니었고, 데이터를 분석하려면 통계 프로그램부터 배워야 했다.

아이디어는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구현하는 능력이었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을 배우고 직접 해내기에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AI가 등장하면서 그 경계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함께 고민할 수 있고, 어려운 논문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물어볼 수도 있다.

코딩을 잘 몰라도 간단한 서비스를 만들어볼 수 있고,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도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 혼자라면 몇 시간이 걸렸을 자료 정리도 훨씬 빠르게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AI를 내 능력을 대신하는 존재라기보다, 내가 가진 능력의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흥미로운 문장 하나를 읽었다.

교황 레오 14세가 AI 시대의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예술과 기계가 만들어내는 것 사이에는 미학적인 차이에 앞서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그리고 ‘인간성의 불꽃’이란 표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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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x.com/Pontifex/status/2105983638147891490?s=46&t=dDcpMIMYg6fdPePSTT9k6w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아, 인간의 예술과 기계가 만들어내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 점점 더 시급해지고 있습니다. 타인이 창작한 수백만 장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통계적 계산을 통해 기계가 생성해내는 것과 예술 사이에는, 미학적인 차이에 앞서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알고리즘에는 인간성의 불꽃이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우리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예술가들과 문화기관들과의 연대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존재론적 차이.’ ‘인간성의 불꽃.’

이 두 표현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려운 말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질문은 의외로 단순했다.

누가 더 잘 그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누가 더 감동적인 문장을 쓰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만든 존재는 누구인가.

존재론은 어렵게 들리지만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넘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묻는 철학이다. '인간과 AI가 겉으로 똑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그 둘은 정말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AI가 똑같은 문장 하나를 썼다고 해보자.

“오늘따라 어머니의 뒷모습이 작아 보였다.”

문장만 놓고 보면 차이가 없다. 어쩌면 AI가 그 앞뒤의 문맥까지 고려해 나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산문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이 문장을 썼다면 그 안에는 문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나보다 훨씬 커 보였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을 수 있고, 어느 날 문득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한 문장 속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철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언제나 무언가를 향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어떤 일을 기억하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세상은 우리에게 단순한 정보로 들어오지 않는다. 언제나 ‘내가 경험한 세상’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 경험에는 몸이 함께 있다. 겨울 새벽,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았을 때 전해지는 온기.

발표를 앞두고 빨라지는 심장 박동. 아이에게 위험한 순간이 닥쳤을 때, 생각보다 먼저 움직이는 몸. 우리는 세상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기억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인간의 창작에는 생각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세상을 지나온 흔적도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시간이다. 우리는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간다. 우린 모두 늙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 나의 삶도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한다. 어떤 일은 미루고, 어떤 선택은 후회하고,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마음에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지금 이 일을 계속해도 될까.’
‘내가 살아온 시간은 무엇을 남길까.’

이런 질문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해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다. 자신에게 단 한 번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창작은 단순한 ‘생산’이라고만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일은, 어쩌면 이런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세상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쉽게 이런 결론으로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AI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조금 더 복잡해진다.

기술은 인간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이 바뀌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뀐다.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순간을 기록하는 방식을 바꿨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꿨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기억하는 방식까지 달라졌다. AI도 마찬가지다.

AI가 등장했다고 인간의 능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경험하고 있듯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AI는 인간과 싸워야 할 존재라기보다 인간의 사고와 표현, 창작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환경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존재론적 차이’를 인간과 AI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 하나를 세우는 말로만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이해하고 싶다.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AI와 인간이 똑같은 그림을 만들 수도 있다. 똑같은 문장을 쓸 수도 있다. 심지어 어느 것이 인간의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물이 같다는 것과 그것을 만들어낸 존재까지 같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AI와 인간을 비교하면서 지나치게 결과물만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더 잘 쓰는가.
누가 더 잘 그리는가.
누가 더 정확한가.
누가 더 빠른가.

그런데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무엇을 만들었느냐'에서, '어떤 존재가 그것을 만들었느냐'로 비교의 기준이 달라진다.

그리고 질문은 한 단계 더 깊어진다.

그 존재는 세상을 경험하는가. 몸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살아가는가. 자신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질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최근 마케팅 회사 Graphite 연구팀의 자료 하나를 봤다. 인간이 쓴 글과 여러 생성형 AI가 작성한 글을 비교해 AI 특유의 언어적 특징을 분석한 연구였다. 결과를 보면 AI의 글은 빠르게 인간의 글과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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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raphite.io/five-percent/research/ai-tells-opus-5-5-update

Claude Opus 5.5의 경우 이전 버전보다 인간의 단어 사용 패턴에 더 가까워졌고, 우리가 흔히 ‘AI 말투’라고 느끼던 특징들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보다 유난히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 문장 프레임이 2,548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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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raphite.io/five-percent/research/ai-tells-opus-5-5-update

그런데 내게 흥미로운 것은 2,548이라는 숫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 흔적마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AI가 인간과 거의 똑같은 글을 쓰게 된다면... 통계적으로 분석해도 사람이 썼는지 AI가 썼는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면...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의 글과 AI의 글을 구분할 수 있을까? 아마 그때에는 문체도, 단어도, 문장의 길이나 표현 방식도 아닐 것이다. AI는 이미 그것들을 빠르게 학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품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 곧 인간이라는 뜻일까'

AI는 슬픔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의 마음을 묘사할 수도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편지를 써줄 수도 있고, 절망에 빠진 사람의 시를 만들 수도 있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잘 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AI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기억이 없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운 기억도 없다. 꿈이 무너져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도 없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날 갑자기 부모의 뒷모습이 작아 보였던 순간도 없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다가 언젠가는 이 손을 놓게 될 날을 떠올려본 적도 없다. 죽음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며 살아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AI는 이 모든 것을 아주 잘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보지는 않았다.

아마 이 지점에 교황이 말한 ‘인간성의 불꽃’이라는 표현도 놓여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의 창작에는 결과물만 보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살아낸 시간이다.

한 사람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살아온 수십 년. 한 장의 그림을 그리기까지 바라본 수많은 풍경. 사랑하고, 실패하고, 후회하고, 다시 시작했던 시간. 그 시간은 작품 어디에도 숫자로 적혀 있지 않다. 그림 한쪽에 ‘이 작품에는 40년의 삶이 들어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사람이 만든 것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가상융합을 연구한다. 가상융합을 공부하다 보면 처음에는 기술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디지털트윈. 가상인간. 메타버스. AI. 공간컴퓨팅. 그런데 공부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기술보다 사람이 더 궁금해진다.

현실과 똑같은 디지털트윈이 만들어지면 어느 것이 진짜일까.

가상 인간이 실제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AI가 나의 문체와 기억, 목소리까지 학습해 ‘나처럼’ 말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 나일까.

현실과 가상이 감각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현실이라고 부를까.

결국 가상융합 기술이 발전할수록 가장 어려워지는 것은 기술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 아닐까.

Reality와 Virtuality의 경계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Human과 Non-human의 경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경계마저 흐려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시 아주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래서 나는 교황의 ‘존재론적 차이’와 ‘인간성의 불꽃’이라는 말을 AI를 경계하자는 선언으로만 읽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오히려 질문으로 읽고 싶다.

AI가 인간이 하던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시대에,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그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AI를 멀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AI와 더 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나는 앞으로도 AI를 적극적으로 쓸 생각이다. AI와 함께 글을 쓰고, 코드를 만들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예전에는 상상만 했던 것들을 실제로 만들어보고 싶다.

AI 덕분에 이제 인간에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점점 덜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질문이 많았다. 자네 그림은 그릴 수 있는가. 음악은 만들 수 있는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가. 글은 쓸 수 있는가.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답변에서도 나는 두렵지 않다. 내가 모르면 AI한테 도움을 받아 할 수 있는 일로 만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제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는 시대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왜 그것을 만들고 싶은가'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보다, 왜 그것을 만들고 싶은지.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보다, 그것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기술은 인간에게 능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어디에 사용할지는 결국 인간이 정한다. AI가 소설을 써줄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고 싶은지까지 대신 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AI가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어떤 장면을 보여주고 싶은지까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AI는 앞으로 더 똑똑해질 것이다. 더 자연스럽게 말하고, 더 아름답게 그리고, 더 능숙하게 작곡하고, 더 훌륭한 문장을 만들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미래가 두렵지만은 않다. 오히려 기대되는 것이 더 많다. 나 역시 그 힘을 빌려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더 많이 해보고 싶다.

그럴때면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어가는 시대에,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어쩌면 AI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다움은 AI와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느냐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AI는 앞으로 우리를 더 많이 닮아갈 테니까.

그래서 오히려 질문은 반대일지도 모른다.

AI가 인간을 닮아가는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책임을 지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쩌면 ‘인간성의 불꽃’이라는 것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실패하고, 후회하고, 다시 시작하고, 결국 끝날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AI가 아무리 인간을 닮아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AI 시대에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인간성의 불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