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챗GPT를 떠올려 보자. 질문하면 답하고, 글을 써 달라고 하면 글을 쓴다.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면 그림을 만들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면 답을 찾는다.
참 성실한 녀석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AI서비스는 우리가 먼저 무엇인가를 요청하지 않으면 AI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반면 사람은 다르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 일요일 오후에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한다. 책을 읽다가 졸기도 하고, 괜히 냉장고 문을 열어 보기도 한다. 산책하러 나갔다가 평소와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기도 한다. 딱히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더하다. 놀이터에 데려다 놓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래성을 쌓고,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돌멩이를 던져 본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자기만의 규칙을 만들어 놀이를 시작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돌멩이를 던지면서 힘과 거리의 관계를 배우고, 블록을 쌓다가 무너지면 균형을 익힌다. 친구들과 놀이 규칙을 정하면서 협상하는 방법도 배우고,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 어른의 눈에는 그저 노는 모습이지만, 아이에게 놀이터는 세상을 배우는 교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도 그렇게 배울 수 있을까.
2026년 10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연구진이 공개한 논문 《Is this machine playing?》(이 기계는 놀고 있는가?)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연구진은 인공지능에게 어려운 시험 문제를 풀게 하거나 특정한 기술을 반복해서 연습시키지 않았다. 대신 작은 가상세계를 하나 만들어 주고 그리고 그 안에서 AI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봤다.
결과는 꽤 흥미로웠다.
AI는 산을 오르고, 돌멩이를 던지고, 탑을 쌓았다. 심지어 농구와 볼링을 닮은 놀이까지 만들어 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놀던 AI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나중에는 그 경험을 활용해 이전보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AI에게 놀이터를 만들어 주었더니, 그곳이 배움의 공간이 된 셈이다.
아무도 숙제를 내주지 않은 섬
연구진이 만든 가상의 섬은 꽤 소박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작은 섬이 하나 있고, 그 안에는 높이가 다른 언덕과 절벽이 있었다. 한쪽에는 높은 첨탑이 솟아 있고, 바닥에는 네모난 블록 열두 개와 돌멩이 하나, 둥근 고리 하나가 놓여 있다.

요즘 게임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다.
화려한 그래픽도 없고, 이야기를 이끌어 갈 등장인물도 없다. 보물을 찾거나 적을 물리쳐야 하는 임무도 없다. 게임이라고 부르기에도 조금 민망한 공간이다.
연구진은 이 섬에 에코(Eko)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에이전트를 들여보냈다. 에코는 컴퓨터 게임 속 캐릭터처럼 걸어 다니고, 점프하고, 물건을 집어 들거나 던질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조종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언어모델을 기반으로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스스로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AI다.
에코는 사람처럼 섬의 풍경을 눈으로 보지 못한다. 우리가 게임을 할 때는 화면 속 절벽과 나무, 바다를 보면서 움직이지만 에코에게 제공된 것은 물체의 위치와 크기, 형태, 주변 지형 등에 관한 텍스트 정보뿐. 우리가 눈으로 보는 푸른 바다와 높은 절벽이 에코에게는 좌표와 수치로 표현된 세계다. 에코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어디로 움직일지, 어떤 물체를 집을지 판단한다.
연구진은 에코에게 호기심을 갖고 탐험하도록 유도하는 성향을 부여했다. 하지만 무엇을 완성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높은 탑을 쌓아도 점수가 올라가지 않았고, 산 정상에 올라가도 상을 주지 않았다.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 에코 13개를 각각 30시간 동안 관찰했다.
그러자 에코들은 저마다 다른 행동을 시작했다. 어떤 에코는 높은 지형을 찾아다녔다. 어떤 에코는 블록을 쌓았고, 다른 에코는 물체를 배열해 바닥에 무늬를 만들었다. 이미 해본 활동을 조금씩 바꾸면서 반복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같은 공간에 들어갔는데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낸 것이다. 물론 에코가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행동한 것은 아니다. 이미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한 언어모델을 사용했고, 초기 지시에도 탐험을 장려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연구진이 주목한 것은 행동의 특징이었다. 구체적인 과제가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에코는 환경을 탐색하고, 스스로 활동을 선택하고,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갔다. 인공지능 연구에서는 이처럼 미리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활동과 학습 과제를 만들어 가는 접근을 개방형 학습(Open-ended Learning)이라는 관점에서 다룬다.
학교에 비유하면 보통의 학습은 선생님이 문제를 내고 학생이 답을 찾는 방식이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무엇을 잘해야 하는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놀이터에서는 조금 다르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정해진 문제를 풀지 않는다. 모래를 만지다가 성을 쌓기 시작하고, 더 높이 쌓으려다가 무너뜨리고, 다시 쌓으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다.
에코의 섬에서도 그런 식의 탐색이 관찰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주 평범한 돌멩이 하나가 뜻밖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돌멩이 하나가 새로운 기술이 되기까지
에코가 섬을 돌아다니다가 바닥에 놓인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돌멩이를 충분히 강하게 던지자 새로운 블록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연구진이 가상세계에 구현해 놓은 규칙이었다. 하지만 에코에게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려주지는 않았다. 에코는 다시 돌을 던져 보았다. 방향을 바꾸고, 힘을 조절하며 결과를 확인했다. 그러다 돌멩이를 이용해 새로운 블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물건이었다. 집어 들고 옮기거나 던질 수 있는 돌멩이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돌멩이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에코가 사용할 수 있는 블록은 처음에 열두 개뿐이었다. 하지만 돌을 던져 블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 많은 블록으로 더 높은 탑을 쌓고, 새로운 구조물도 만들 수 있다. 돌멩이 하나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이 장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이 있다. 어포던스(Affordance)다. 어포던스는 어떤 사물이나 환경이 행위자에게 제공하는 행동의 가능성을 뜻한다.
예를 들어 의자를 생각해 보자.
의자는 앉는 물건이다. 그런데 높은 선반에 손이 닿지 않을 때는 의자 위에 올라설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는 장애물이 되거나 기차 좌석이 될 수도 있다. 의자가 바뀐 것은 아니다. 그 의자를 사용하는 사람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에코의 돌멩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던질 수 있는 물건에 불과했지만, 에코는 직접 시도하면서 그 물건을 새로운 블록을 얻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 그 방법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전거 타는 방법을 책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한 설명을 읽어도 처음 자전거에 올라타면 균형을 잡기 어렵다. 직접 페달을 밟고,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다시 시도하면서 몸으로 익혀야 한다. 에코 역시 가상세계에서 행동하고 그 결과를 관찰하면서 환경의 규칙을 알아냈다. 설명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과 직접 경험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런데 에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섬에 있던 둥근 고리를 높은 곳에 올려놓고 블록을 던지기 시작했다. 농구와 비슷한 놀이였다. 다른 에코는 블록을 여러 개 세워 놓고 돌멩이를 굴려 쓰러뜨렸다. 이번에는 볼링이었다. 물론 누군가 농구나 볼링을 하라고 시킨 적은 없었다. 그저 고리와 블록, 돌멩이가 놓여 있었을 뿐이다. 이는 어린아이가 빈 종이상자를 자동차로 만들고, 이불을 동굴로 만드는 모습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놀이 연구에서는 현실의 물건을 다른 대상으로 간주하고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행동을 가장놀이(Make-believe Play)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고리는 골대가 되었고, 블록은 공이 되었다. 사물 자체는 그대로였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과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연구진은 이런 행동 외에도 에코가 스스로 도전 과제를 만들고, 같은 활동을 조금씩 변형하며 반복하고, 외부 보상 없이 활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고전적인 놀이 이론에서 설명하는 여러 행동적 특징과 닮아 있다.
그렇다고 AI가 인간처럼 상상하거나 놀이의 즐거움을 느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연구진이 확인한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생긴다.
'에코가 농구를 하고 볼링을 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AI가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알고 있던 인간의 놀이를 흉내 낸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말 무엇인가를 배웠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 연구진도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놀이터에서 보낸 30시간은 실력이 되었을까
연구진은 에코에게 시험을 치르게 했다.
한쪽에는 30시간 동안 섬을 자유롭게 탐험한 에코 13개를 배치했다. 다른 한쪽에는 같은 언어모델과 에이전트 구조를 사용하지만 섬을 탐험한 경험이 없는 에코 13개를 배치했다. 그리고 두 집단에 동일한 과제를 주었다.
다섯 개 높이의 블록 탑을 최대한 많이 만들기, 높은 첨탑에 물체를 최대한 많이 올리기, 가장 높은 탑 만들기, 높은 곳에 직접 올라가지 않고 블록을 첨탑 위로 던지기.
쉽게 말하면 놀이터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며 이것저것 시도해 본 집단과, 별다른 경험 없이 처음 과제를 수행하는 집단을 비교한 것이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높은 첨탑에 물체를 올리는 과제에서 30시간의 경험이 있는 에코는 평균 10.3개를 올렸다. 반면 경험이 없는 에코는 평균 3.5개에 그쳤다. 거의 세 배에 가까운 차이였다. 다섯 개 높이의 탑을 세 개 이상 만드는 과제에서도 경험 집단이 더 좋은 성과를 보였다.
물론 모든 과제에서 확실한 차이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가장 높은 탑 하나를 만드는 과제에서는 두 집단의 성과가 비슷했다. 이를 통해 자유롭게 놀게 하면 AI의 모든 능력이 좋아진다고 해석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확인됐다. 에코는 처음부터 시험 문제를 알고 연습한 것이 아니었다. 섬에서 돌아다니고, 블록을 쌓고, 물체를 던지면서 경험을 쌓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발견한 방법 가운데 일부가 나중에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됐다.
교육학에서는 이렇게 한 상황에서 배운 지식을 다른 상황에 적용하는 현상을 학습의 전이(Transfer of Learning)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수학을 일상생활의 계산에 활용하거나, 외워 두었던 외국어 표현을 해외여행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식을 배웠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을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AI에게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마주할 모든 상황을 개발자가 미리 예상해 가르칠 수는 없다. 낯선 문제가 등장했을 때도 과거 경험에서 배운 방법을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에코의 실험은 제한된 가상환경 안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에코가 30시간 동안 활동하면서 AI 모델 자체가 새롭게 학습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험이 능력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답은 에코가 가지고 있던 작은 공책에 있었다.

섬은 매번 처음으로 돌아갔지만, 경험은 남았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수업을 듣고, 문제를 풀고, 틀린 답을 고치다 보면 전에는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풀게 된다. 머릿속에 지식이 쌓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을 학습시킨다고 할 때도 비슷한 변화를 생각한다. 많은 데이터를 이용해 인공신경망의 가중치(Weight)를 조정하는 것이다. 가중치는 AI가 입력 정보를 처리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연결 값이다.
그런데 에코는 섬을 탐험하는 동안 이러한 가중치를 수정하지 않았다. 언어모델 자체를 다시 훈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경험을 남겼다. 바로 외부 기억 파일이었다. 에코에게는 두 종류의 기억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했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록하는 일기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을 통해 발견한 규칙과 기술을 정리하는 지식 노트였다.
연구에서는 이를 각각 일화기억(Episodic Memory)과 의미기억(Semantic Memory)에 대응하는 구조로 설명한다.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뒤 일기를 쓰면서 어느 장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고, 다음에 다시 방문할 때 도움이 될 교통편이나 주의사항을 따로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에코가 돌을 던져 새로운 블록을 만들었다면, 한쪽에는 자신이 시도한 행동과 결과를 기록하고, 다른 한쪽에는 블록을 추가로 만들어 내는 방법을 정리하는 식이었다.
이 기억이 특별했던 이유는 섬의 운영 방식에 있었다. 에코가 활동하던 가상세계는 매시간 초기화됐다. 열심히 쌓아 놓았던 탑도 사라지고, 바닥에 옮겨 놓은 블록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에코가 그동안 사용했던 대화 맥락도 새롭게 시작됐다.
하지만 기억 파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시간에 에코가 섬으로 돌아오면 풍경은 처음과 똑같았다. 그러나 에코에게는 이전에 어떤 일을 했고 무엇을 발견했는지 기록한 공책이 남아 있었다. 어제의 놀이터는 사라졌지만, 어제의 경험은 남은 것이다. 그 경험은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데 활용됐다. 이것은 AI의 능력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바꿔 놓는다.
우리는 흔히 어떤 AI 모델이 더 똑똑한지 비교한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지, 얼마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지, 다른 모델보다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평가한다.
하지만 에코는 같은 기반 모델을 사용하더라도 어떤 경험을 기억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실제 문제 해결 성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마치 같은 교과서로 공부한 두 학생이더라도 직접 실험해 보고 시행착오를 기록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문제 해결 방식이 달라질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에코가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 정말 그 기억 덕분이었을까.
연구진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더 했다. 에코의 공책에서 특정한 기술을 설명한 부분만 지워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돌을 이용해 블록을 추가로 만드는 방법에 관한 기록을 삭제했다. 그리고 다시 탑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자 이전에 평균 여섯 개를 완성하던 5단 높이의 탑을 두 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반면 다른 세 과제의 성과는 대체로 유지됐다. 기억을 지웠더니 모든 능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삭제된 지식과 관련된 과제에서 성과가 떨어진 것이다.
이는 에코가 단순히 오래 활동했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얻은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얻은 특정 지식을 실제 문제 해결에 활용했다는 중요한 근거다.
또한 에코가 사용한 기억은 사람이 읽고 수정할 수 있는 파일이었다. 연구진은 어떤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고, 일부를 삭제한 뒤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AI의 모든 판단 과정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기억이 에이전트의 실제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과, 외부 기억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일부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공책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에코가 기록한 내용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잘못된 경험도 지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경험이 많으면 더 현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해온 사람도 잘못된 방법을 고집할 수 있다. 우연히 한 번 성공했던 경험을 언제나 통하는 법칙처럼 믿기도 한다.
경험은 지식이 되지만, 때로는 편견이 되기도 한다.
에코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한 에코는 블록을 쌓는 과정에서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블록을 직접 내려놓는 것보다 던지는 방식이 더 안정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자신의 지식 노트에 기록했다.
문제는 그 판단이 틀렸다는 데 있었다.
에코는 이후에도 자신이 기록한 내용을 참고해 블록을 쌓으려 했고, 그 결과 성과가 좋지 않았다.
연구진이 잘못된 믿음을 기억에서 삭제하자 어떻게 되었을까.
오히려 성과가 개선됐다.
새로운 기술을 가르친 것도 아니었다. AI 모델 자체를 바꾼 것도 아니었다. 잘못 알고 있던 내용을 지웠을 뿐인데 탑을 더 잘 쌓게 된 것이다.
이 장면은 AI의 장기 기억이 가진 양면성을 보여준다.
유용한 경험을 기록하면 다음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다. 반대로 잘못된 경험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그 오류가 이후의 행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여기서 오늘날 생성형 AI의 대표적인 문제인 환각(Hallucination)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AI가 사실과 다른 답변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는 현상이다.
그런데 장기 기억을 가진 AI 에이전트에서는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해질 수 있다. 잘못된 답변이 그 순간의 오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행동에 활용되는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업의 AI 에이전트가 잘못된 업무 절차를 자신의 경험으로 기록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기록을 계속 참고한다면 업무를 수행할 때마다 같은 오류가 반복될 수 있다. 잘못된 방법이 마치 검증된 업무 노하우처럼 굳어질 위험도 있다.
따라서 AI가 장기간 경험을 축적하도록 하려면 단순히 기억할 공간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경험이 신뢰할 만한지 검증하고,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며,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식을 정리하는 기능도 필요하다.
많이 기억하는 AI와 올바르게 기억하는 AI는 다르다. 에코의 작은 공책은 그 차이를 보여줬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기억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에코가 무엇을 발견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발견은 연구진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AI가 연구진도 몰랐던 방법을 찾아냈다
에코에게 주어진 평가 과제 가운데 하나는 높은 첨탑 위로 블록을 던져 올리는 일이었다.
문제는 첨탑이 꽤 높았다는 점이다. 지상에서 아무리 힘껏 던져도 블록을 위로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일부 에코는 조금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먼저 점프했다. 그리고 공중으로 올라가는 순간 블록을 던졌다. 그러자 블록이 지상에서 던졌을 때보다 더 높이 날아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높은 위치에서 던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핵심은 시뮬레이터의 물리적 작동 방식에 있다.
공중에서 물체를 던질 때 에코가 위로 움직이는 속도가 물체의 운동에도 영향을 주는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물체를 던질 때 기차의 움직임이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에코는 자신의 상승 운동을 활용해 블록을 더 높이 보내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연구진도 그 방법을 유용한 기술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에코는 환경을 탐험하다가 그 가능성을 발견했고, 반복해서 시도하면서 기술로 활용했다. 주 실험에 참여한 에코 13개 가운데 6개가 이러한 공중 던지기 기술을 발견했다.
연구진이 특정 에코의 기억에서 그 기술을 삭제하자 과제를 해결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크게 늘어났다. 즉, 에코가 우연히 한 번 특이한 행동을 보인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발견한 방법을 기억하고 나중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물론 에코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물리 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가상세계에 이미 구현되어 있던 물리적 상호작용을 찾아낸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도 같은 방법이 동일하게 작동한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연구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 해결 방법을 AI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견했다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발견이다. 이 부분을 통해 우리는 AI의 학습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AI는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학습하고, 그 지식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에코는 가상세계에서 직접 행동하면서 새로운 활용법을 발견했다. 누군가 정답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환경의 규칙을 이용해 가능성을 탐색한 것이다.
이것은 AI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관한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다만 중요한 전제가 있다.
AI가 발견한 새로운 방법이 반드시 좋은 방법인 것은 아니다.
에코가 블록을 던져 쌓는 잘못된 방법을 기억했던 것처럼, 스스로 발견한 기술도 정확성과 유용성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결국 발견하는 능력과 검증하는 능력은 함께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안전하게 반복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해진다.
바로 여기에서 가상융합 기술의 새로운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상세계는 AI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상세계를 이야기할 때 보통 인간의 경험을 먼저 떠올린다.
가상현실 헤드셋을 착용하고 낯선 공간을 탐험하거나, 실제로 가기 어려운 장소를 방문하고, 다른 사람들과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는 모습이다. 가상세계가 얼마나 현실처럼 보이는지, 그 안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지, 얼마나 높은 몰입감을 제공하는지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AI는 그런 가상세계를 만드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가상의 배경을 만들고, 등장인물을 생성하고, 게임 속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대화하도록 만드는 식이었다.
그런데 에코의 연구를 살펴보면 이 관계를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AI가 가상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상세계가 AI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에코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가상세계의 풍경을 눈으로 감상하지 않았다. 텍스트와 좌표를 통해 주변 환경을 이해했다. 그런데도 돌을 던지고, 블록을 쌓고, 점프하면서 환경의 규칙을 알아냈다. 이는 AI에게 가상세계가 반드시 화려한 그래픽으로 구현된 공간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어떤 행동이 가능하고,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 하는 점이다.

돌멩이를 던지면 새로운 블록이 나타났다. 블록을 쌓으면 구조물이 만들어졌다. 점프하면서 물체를 던지면 예상하지 못했던 운동 효과가 발생했다. 에코는 이런 상호작용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전거를 배우기 위해 반드시 아름다운 풍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움직일 수 있는 공간과 직접 타볼 기회가 있으면 된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속에 들어가 봐야 하고, 악기를 익히려면 실제로 소리를 내보아야 한다.
배움에는 지식뿐 아니라 행동하고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할 때가 많다. AI 역시 가상환경에서 다양한 행동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관찰할 수 있다면 새로운 기술을 익힐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이미 로봇공학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현실에서 로봇을 수없이 넘어뜨리거나 산업용 기계를 반복해서 충돌시키는 것은 비용과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가상환경에서는 같은 동작을 여러 번 시험하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로봇의 움직임이나 제어 방법을 시뮬레이션으로 학습시키는 이유다.
에코의 연구가 여기에 더한 것은 AI가 반드시 미리 지정된 과제만 수행할 필요는 없다는 가능성이다.
에이전트가 스스로 탐험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만들고, 환경의 규칙을 발견하며, 나중에 활용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의 미래를 생각할 때도 흥미롭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설비나 시스템을 가상환경에 표현해 상태를 관찰하고 분석하며 다양한 상황을 시험하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물류센터의 디지털 트윈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가상의 물류센터 안에서 AI 에이전트는 물건을 옮기는 순서를 바꾸거나, 이동 경로를 조정하거나, 설비 배치를 다르게 해보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검토할 시나리오를 정하고 시스템이 그 결과를 분석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AI가 새로운 실험 조건을 제안하고 유용한 운영 방법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는 에코 논문에서 직접 입증된 산업적 성과가 아니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발전 방향이다.
실제 현장에 적용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상세계에서 발견한 방법이 현실에서도 통하는가 하는 점이다.
에코의 공중 던지기 기술을 떠올려 보자. 가상세계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의 로봇에게도 똑같이 유용한 동작이라는 보장은 없다. 가상환경은 현실을 모델링한 것이지 현실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환경과 가상환경의 물리적 특성이 다르면 같은 행동도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를 로봇공학에서는 시뮬레이션과 현실 사이의 간극, 즉 Sim-to-Real Gap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AI가 가상세계에서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더라도 현실에 적용하기 전에는 정확성과 안전성을 검증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상융합 기술에는 무엇이 중요해질까.
단순히 현실을 얼마나 정교하게 보여주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AI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그 행동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일관되고 신뢰할 만한지, 다양한 상황을 얼마나 안전하게 실험할 수 있는지도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가상세계의 경쟁력이 시각적인 실감에서 행동과 상호작용의 품질로 확장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가상세계가 더 이상 인간이 보고 즐기는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AI가 직접 경험하고 학습하는 환경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AI의 다음 경쟁력은 더 큰 두뇌일까, 더 풍부한 경험일까
에코의 연구를 읽으며 한 가지 생각이 오래 남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AI를 더 똑똑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왔을까.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더 강력한 연산 자원을 확보하고, 더 정교한 모델을 개발해 왔다. 실제로 이러한 발전은 AI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크게 높였다.
하지만 에코의 실험은 조금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같은 기반 언어모델을 사용하더라도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경험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기억하고 활용하는가에 따라 실제 문제 해결 성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기업의 AI 활용에 비유해 보자.
두 기업이 같은 AI 모델을 도입했다고 가정하자. 한 기업은 매번 새로운 업무를 지시하고 결과만 받아 본다. 이전에 어떤 일을 했고,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떤 방법이 효과적이었는지는 따로 기록하지 않는다. 다른 기업은 AI가 업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경험 가운데 유용한 정보를 검증해 기록하고, 다음 작업에서 이를 참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든다. 두 기업이 사용하는 AI 모델은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업무 수행 능력에는 차이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물론 에코의 실험만으로 이러한 기업 환경의 효과가 입증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래의 AI 경쟁력을 생각할 때 모델 자체의 성능 외에도 환경과 도구, 기억 시스템, 경험의 품질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시사점을 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의 양만 늘리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에코는 유용한 경험을 활용해 더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잘못된 믿음을 기록해 오히려 성능이 떨어지기도 했다. 또한 가상세계에서 발견한 기술이 실제 환경에서도 효과적인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경험을 통해 배우는 AI가 발전하려면 세 가지가 함께 필요할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환경,
그 경험을 지식으로 축적할 수 있는 기억 구조,
그리고 지식의 정확성과 유효성을 검증할 수 있는 체계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탐험할 환경이 없으면 새로운 경험을 얻기 어렵다.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면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 있다. 기억을 검증하지 못하면 잘못된 지식이 쌓일 수 있다.
결국 AI의 능력은 모델 하나가 아니라 모델이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경험을 축적하며, 그 경험을 검증하는 전체 시스템의 성능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에코의 연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통찰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AI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놀이터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놀이터에서 대단한 지식을 배우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모래성을 쌓을 때는 그저 더 높이 쌓고 싶었고, 돌멩이를 던질 때는 얼마나 멀리 날아갈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모래성이 무너지면 다시 쌓았고, 돌멩이가 생각보다 멀리 날아가지 않으면 자세를 바꿔 던져 봤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아래에 놓아야 무너지지 않는지, 힘을 얼마나 주어야 더 멀리 날아가는지 조금씩 배웠다. 때로는 친구가 하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방법을 따라 하기도 했다.
놀이터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아니었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직접 경험하는 작은 실험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MIT 연구진이 만든 에코의 섬에서도 놀이와 닮은 행동이 나타났다. 에코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산을 오르고, 블록을 쌓고, 돌멩이를 던졌다. 그러다 새로운 블록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발견했고, 고리를 농구 골대처럼 사용했다. 연구진이 예상하지 못했던 공중 던지기 기술도 찾아냈다. 어떤 경험은 유용한 지식이 되었고, 어떤 경험은 잘못된 믿음으로 남았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났다. AI가 스스로 탐색하며 얻은 경험이 나중에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에코가 인간처럼 놀이를 즐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연구진이 확인한 것은 놀이와 닮은 행동적 특징과 경험을 통해 나타난 학습 효과였다. 하지만 이 발견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우리는 지금까지 AI에게 무엇을 더 가르쳐야 할지 고민해 왔다. 더 많은 지식을 학습시키고, 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도록 훈련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제는 다른 질문도 필요할지 모른다.
AI가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려면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할까.
그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가상융합 기술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이 질문은 특히 의미가 있다. 그동안 가상세계는 주로 인간이 현실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일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현실에서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일을 안전하게 실험하고, 실패하고,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는 공간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가상세계의 가치는 단순히 얼마나 화려하고 사실적으로 구현됐는지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행동이 가능하고, 얼마나 의미 있는 실험을 수행할 수 있으며, 발견한 지식을 실제 세계에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질 수 있다. 가상세계가 인간에게는 새로운 경험의 공간이 되고, 인공지능에게는 새로운 배움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AI에게 정답을 가르치는 일에 너무 몰두했던 것은 아닐까.
좋은 선생님이 반드시 모든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니다. 때로는 학생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더 좋은 선생님일 수도 있다.
AI에게도 비슷한 접근이 필요할지 모른다. 스스로 시도하고, 실패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 그곳에서 얻은 경험을 기억하고, 잘못된 지식을 수정하며,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갈 수 있는 환경 말이다.
MIT 연구진이 만든 작은 섬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줬다.
인공지능에게 더 많은 정답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AI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일도 그만큼 중요해질 수 있다. 인공지능의 다음 교실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 줄 가상세계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 논문
Nathan Cloos, Antonio Norelli, Daniel Durbin, Jacob Andreas, Daniela Rus, Phillip Isola. (2026). Is this machine playing? arXiv:2610.07130v1.
공개일: 2026년 10월 5일
연구기관: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MIT)
논문: https://arxiv.org/abs/2610.07130
연구 프로젝트: https://machineplayi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