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프라 경쟁의 무게중심이 다시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AI 인프라 논의의 중심에는 GPU가 있었다. 더 큰 모델을 학습시키려면 더 많은 GPU가 필요했고, 더 빠른 추론을 제공하려면 고성능 가속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엔비디아 GPU, 대형 데이터센터, 전력, 냉각, 광통신, HBM 같은 키워드가 AI 산업의 핵심 병목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Anthropic과 Akamai의 이번 계약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AI 기업이 정말 필요한 것은 GPU만일까.
Akamai Technologies는 2026년 9월 24일 Anthropic과 7년간 116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계약은 Anthropic의 증가하는 CPU 워크로드 수요를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Anthropic은 Akamai Cloud의 분산 AI 인프라와 소프트웨어를 활용하게 된다.
계약 규모만으로도 상당하다.
기본 계약은 116억 달러다. 여기에 관계가 확대될 경우 최대 90억 달러가 추가될 수 있다. 즉 총 잠재 계약 규모는 약 200억 달러에 이른다. Akamai는 이번 계약과 연계해 Anthropic에 자사 보통주의 최대 약 5%에 해당하는 워런트도 발행했다. 이 중 약 2%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번 116억 달러 계약과 관련해 베스팅될 예정이고, 나머지 약 3%는 향후 최대 90억 달러 규모의 추가 클라우드 서비스 구매가 이뤄질 경우 단계적으로 베스팅된다.
이 구조는 단순한 클라우드 구매 계약이 아니다.
Anthropic은 Akamai의 주요 고객이 되는 동시에,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Akamai의 지분 가치 상승에도 참여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 Akamai는 Anthropic이라는 대형 AI 고객을 확보하고, Anthropic은 Akamai의 인프라 확장에 장기적으로 묶인다. 클라우드 공급자와 AI 모델 기업의 관계가 단순한 판매자와 구매자를 넘어 전략적 동맹 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번 계약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GPU가 아니라 CPU다.
Akamai는 이번 계약이 Anthropic의 “accelerating CPU workload demands”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AI 기업의 인프라 수요가 모델 학습용 GPU 클러스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AI 서비스가 커질수록 CPU 워크로드도 폭발한다.
모델을 호출하기 전후의 데이터 처리, 요청 라우팅, 사용자 세션 관리, 검색과 검색증강생성, 도구 호출,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파일 처리, 보안 검사, 로그 분석, 모니터링, 캐싱, API 게이트웨이, 결제와 계정 관리, 정책 필터링, 워크플로 실행에는 모두 CPU 기반 인프라가 필요하다.
특히 AI 에이전트 시대에는 이 수요가 더 커진다.
챗봇은 한 번 질문하고 한 번 답하는 구조에 가깝다. 그러나 에이전트는 다르다. 사용자의 목표를 이해하고, 여러 단계를 계획하고, 외부 도구를 호출하고, 웹페이지를 읽고, 코드를 실행하고, 파일을 분석하고, 중간 결과를 저장하고, 다시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모델 추론뿐 아니라 주변 작업을 처리하는 컴퓨팅 수요가 커진다.
즉 AI 서비스의 비용 구조는 GPU 추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규모 AI 서비스가 실제 사용자에게 제공되려면 GPU 뒤에서 수많은 CPU 워크로드가 돌아가야 한다. Anthropic이 Akamai와 대규모 계약을 맺은 배경도 여기에 있다. Claude 같은 AI 모델이 더 많은 사용자와 기업 워크로드를 처리하려면, 모델을 돌리는 가속기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분산된 안정적 컴퓨팅 계층이 필요하다.
Akamai의 강점은 분산 인프라다.
Akamai는 오랫동안 콘텐츠 전송망과 보안, 엣지 네트워크에서 강점을 쌓아왔다. 이번 발표에서도 Akamai Cloud는 코어에서 엣지까지 이어지는 컴퓨팅 연속체를 지원하고, 수천 개의 포인트 오브 프레즌스에 걸친 광범위한 분산 네트워크를 갖췄다고 설명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AI 서비스는 점점 더 중앙 데이터센터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사용자는 전 세계에 있고, 기업 고객은 지연시간과 안정성, 보안, 데이터 위치, 비용을 모두 따진다. 특히 AI 에이전트가 실제 업무와 애플리케이션 흐름 안으로 들어가면, 응답 속도와 네트워크 안정성은 사용자 경험의 핵심이 된다.
분산 클라우드는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법이다.
모든 요청을 소수의 거대 리전에 몰아넣는 대신, 사용자와 가까운 위치에서 일부 워크로드를 처리하고, 보안과 라우팅, 데이터 전처리, 캐싱, 경량 연산을 분산시킬 수 있다. Akamai가 “core to edge”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계약은 Akamai에도 전환점이다.
Akamai는 이미 올해 고객 기반 전반에서 28억 달러 이상의 다년간 Cloud Infrastructure Services 계약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Anthropic과의 116억 달러 계약이 더해지면서, Akamai Cloud는 단순한 CDN 확장이 아니라 AI 워크로드 인프라 사업으로 재정의될 가능성이 커졌다.
Akamai의 톰 레이튼 CEO는 Anthropic이 AI 혁명을 진전시키고 있으며, Akamai의 역량을 AI 인프라 구축과 운영에 선택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Akamai의 글로벌 풋프린트와 대기업 고객 지원 경험을 바탕으로, 보안성과 책임 있는 AI 애플리케이션 및 워크로드를 위한 인프라 공급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Akamai가 내세우는 차별점은 세 가지다.
첫째, 분산성이다.
Akamai는 전 세계에 퍼진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다. AI 서비스가 글로벌하게 확장될수록, 지연시간과 접근성, 네트워크 효율성은 중요해진다. 중앙집중형 데이터센터만으로는 모든 사용자와 기업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어렵다.
둘째, 보안이다.
Akamai는 보안 사업에서도 강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AI 워크로드가 기업 업무와 결합될수록 보안은 인프라 선택의 핵심 조건이 된다. 모델 호출, API, 데이터 처리, 에이전트 도구 사용, 기업 네트워크 연결은 모두 공격면이 될 수 있다.
셋째, 운영 경험이다.
AI 기업은 모델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대규모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수요가 급증할 때도 버텨야 하고, 기업 고객의 SLA와 보안 요구를 충족해야 하며, 지역별 성능과 비용을 관리해야 한다. Akamai는 자신이 이 운영 영역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 계약의 재무 구조도 주목할 만하다.
Akamai는 이번 116억 달러 계약과 관련한 총 자본지출을 약 55억 달러로 추정했다. 또 2026년 매출 가이던스에는 영향이 없지만, 메모리를 포함한 핵심 공급망 부품을 확보하고 사전 구매하기 위해 2026년 자본지출이 약 17억 달러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이는 AI 인프라 계약이 단순히 매출 계약이 아니라 자본집약적 확장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클라우드 사업자는 대형 AI 고객을 확보하면 장기 매출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그 매출을 실현하려면 먼저 데이터센터, 서버, 네트워크, 메모리, 전력, 냉각, 공급망에 투자해야 한다. AI 인프라 경쟁은 수요가 있다고 바로 공급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장기 계약, 선투자, 부품 확보, 설비 확장이 함께 움직인다.
Anthropic 입장에서도 이번 계약은 전략적이다.
Anthropic은 Claude를 중심으로 기업용 AI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대화형 모델을 넘어 코딩, 분석, 문서 작업, 에이전트형 워크플로, 기업 데이터 처리까지 확장하려면 안정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특히 기업 고객은 성능뿐 아니라 안정성, 보안, 확장성, 비용 예측 가능성을 요구한다.
Akamai와의 장기 계약은 Anthropic이 인프라 병목을 줄이고, CPU 기반 주변 워크로드를 대규모로 처리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 계약은 AI 클라우드 시장의 경쟁 구도에도 의미가 있다.
AI 인프라 시장은 대형 하이퍼스케일러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 AWS, Microsoft Azure, Google Cloud 같은 사업자가 대규모 GPU 클러스터와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AI 수요가 폭증하면서 대체 인프라 공급자와 전문 클라우드, 엣지 클라우드, 분산 인프라 기업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Akamai는 이 틈을 노리고 있다.
모든 AI 워크로드가 같은 형태는 아니다. 거대 모델 학습에는 초대형 GPU 클러스터가 필요하지만, 실제 서비스 운영에는 분산된 CPU, 네트워크, 보안, 엣지 처리, 글로벌 라우팅이 중요하다. Akamai는 자신이 바로 이 영역에서 차별화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번 계약은 또 하나의 흐름을 보여준다.
AI 기업들이 인프라를 단일 공급자에만 의존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다.
프런티어 AI 기업은 모델 개발과 서비스 운영에 막대한 컴퓨팅 자원이 필요하다. 특정 클라우드나 특정 가속기 공급망에만 묶이면 비용, 협상력, 장애 리스크, 지역 확장성에서 제약이 생길 수 있다. Anthropic이 Akamai와 장기 관계를 확대하는 것은 인프라 공급망을 다층화하려는 전략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번 계약에는 리스크도 있다.
Akamai 입장에서는 막대한 자본지출을 감수해야 한다. 116억 달러 계약은 장기 매출 기회를 제공하지만, 이를 위해 약 55억 달러의 자본지출이 필요하다. 수요 예측이 빗나가거나, AI 워크로드의 구조가 바뀌거나, 경쟁 압력으로 가격이 내려가면 수익성에 부담이 될 수 있다.
Anthropic 입장에서도 장기 인프라 약정은 유연성을 제한할 수 있다.
AI 기술은 빠르게 변한다. 모델 구조, 추론 방식, 하드웨어 효율성, 에이전트 아키텍처, 데이터 처리 방식이 바뀌면 현재의 인프라 수요 예측도 달라질 수 있다. CPU 워크로드가 크게 늘 것이라는 판단이 맞더라도, 어떤 위치와 어떤 형태의 인프라가 최적인지는 계속 바뀔 수 있다.
워런트 구조 역시 양면적이다.
Anthropic은 Akamai와의 관계가 확대될수록 Akamai 지분 상승에 참여할 수 있다. Akamai는 대형 고객을 장기적으로 붙잡는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양사의 이해관계를 더 강하게 묶는다. 클라우드 구매 계약이 단순 비용 거래를 넘어 자본시장적 이해관계와 결합되는 것이다.
이는 최근 AI 인프라 시장에서 반복되는 패턴이기도 하다.
AI 모델 기업과 클라우드·반도체·데이터센터 기업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단순 구매, 지분 투자, 선불 계약, 공급 보장, 수익 공유, 워런트, 장기 약정이 결합된다. AI 인프라가 워낙 자본집약적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단순한 단기 계약보다 장기적 금융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이번 발표에서 Akamai가 밝힌 미래 전망 문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Akamai는 이번 거래의 기대 효과, 워런트 발행의 잠재 영향, Anthropic과의 관계 확대 가능성, 재무상태와 가이던스에 대한 영향 등이 모두 미래예측진술에 해당하며, 실제 결과는 경쟁, 가격 압박, 데이터센터 용량, 공급망 제약, 자본 조달, 보안 침해, 거시경제와 규제 변화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AI 인프라 계약이 얼마나 많은 불확실성 위에 서 있는지 보여준다.
AI 수요는 강하다.
하지만 수요가 수익으로 이어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계약은 크다.
하지만 인프라를 제때 구축하고 운영해야 한다.
고객은 확실하다.
하지만 기술과 비용 구조는 계속 바뀐다.
그럼에도 이번 계약의 방향성은 분명하다.
AI 산업은 더 많은 컴퓨팅을 필요로 한다.
그 컴퓨팅은 GPU 학습 클러스터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CPU 기반 워크로드, 분산 클라우드, 엣지 인프라, 보안, 네트워크 운영이 함께 중요해진다.
프런티어 AI 기업은 모델 회사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인프라 수요자가 된다.
클라우드 기업은 AI 수요를 잡기 위해 막대한 선투자와 전략적 지분 인센티브까지 동원한다.
Anthropic과 Akamai의 116억 달러 계약은 이 변화를 상징한다.
AI 경쟁은 모델 성능 경쟁에서 인프라 공급망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누가 더 똑똑한 모델을 만드는가만큼, 누가 그 모델을 더 안정적으로, 더 빠르게, 더 안전하게, 더 전 세계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Akamai는 이번 계약을 통해 자신을 AI 시대의 분산 클라우드 인프라 공급자로 다시 설명하려 한다. Anthropic은 Claude와 에이전트형 AI 서비스의 성장을 뒷받침할 장기 인프라를 확보하려 한다.
결국 이번 계약의 본질은 “Anthropic이 Akamai 클라우드를 쓴다”는 데 있지 않다.
AI 서비스가 실제 산업 인프라가 되기 위해 필요한 컴퓨팅이 얼마나 넓고 복잡해졌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AI 시대의 병목은 모델 하나가 아니다.
GPU도 필요하고, CPU도 필요하다.
중앙 데이터센터도 필요하고, 엣지도 필요하다.
속도도 필요하고, 보안도 필요하다.
단기 사용량도 중요하지만, 7년짜리 장기 공급망도 중요하다.
Anthropic과 Akamai의 계약은 AI 인프라 전쟁이 이제 데이터센터 안쪽을 넘어, 전 세계 분산 클라우드 네트워크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