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있고, 친구와 다퉜다가 다시 화해한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내일이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굳이 ‘평화’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삶은 대체로 평화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뉴스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갈등을 접하고, 우리가 사는 한반도 역시 여전히 분단돼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환경과 문화,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시야가 넓어진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현실까지 보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18세 서소영 씨에게도 그랬다.

“어릴 때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그렇고 친구들과 지내는 것도 그냥 평화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뉴스를 보고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갈등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그에게 ‘평화’는 너무 당연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상에서, 한번쯤 스스로 질문해보고 싶은 주제가 됐다.

그리고 그 질문이 서울 청담동의 한 전시장으로 이어졌다.

《화이트 포피: 지속가능한 평화Ⅰ(white poppi: sustainable peace Ⅰ)》.

어린이와 청소년, 기성 작가들이 저마다 생각하는 평화를 작품에 담은 전시다.

그 전시를 기획한 사람은 이제 열여덟 살이다.

“제 소원은 전쟁이 멈추는 것이었어요”

기획자 서소영 씨(18)
《화이트 포피: 지속가능한 평화Ⅰ(white poppi: sustainable peace Ⅰ)》 기획자 서소영 씨

평화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훨씬 어릴 때였다.

영어 말하기 대회에 자주 참가했던 그는 어느 날 학교 영어 일기에 자신의 소원을 적었다.

‘전쟁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 글은 이후 영어 말하기 대회의 연설 주제가 됐다.

당시에는 국제정세나 정치적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던진 말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눈에 전쟁은 그저 누군가가 다치고 슬퍼지는 일이었고, 그래서 없어졌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후 어린이 기자 활동을 하면서 탈북 청소년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남북 정상회담에 관심이 높던 시기였다. 남한 학생들과 탈북 청소년들이 함께 모의 남북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그 경험은 막연했던 거리감을 조금 좁혀줬다.

“그전에는 북한이라고 하면 굉장히 멀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실제로 또래 친구들을 만나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이후 봉사와 합창 활동 등을 통해 인연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평화’라는 단어도 조금씩 넓어졌다.

처음에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떠올렸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환경과 문화적 차이, 사람 사이의 갈등까지 생각하게 됐다.

그가 내린 결론 가운데 하나는 ‘존중’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환경과 생각을 인정하며,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생각하는 것.

그에게 평화는 어느 순간 거대한 국제정치의 용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가까워졌다.

인터뷰 중 그에게 물었다. 열여덟 살인 자신에게 평화란 무엇이냐고.

한참 생각하던 그는 아주 짧게 답했다.

“그냥 싸우지 않는 거요.”

오히려 그 단순한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변화도 이야기했다.

“오히려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평화롭다는 게 당연한 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평화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도, 친구들과 뛰어노는 시간도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평화는 ‘이미 주어진 상태’라기보다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의 소개문에도 비슷한 문장이 적혀 있다.

“평화는 완성된 상태가 아닌, 기억과 증언, 애도와 돌봄을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실천입니다.”

열여덟 살의 기획자는 그렇게 자신이 알게 된 조금 더 복잡한 세상을, 다시 하나의 단순한 질문으로 되돌려 놓았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화이트 포피: 지속가능한 평화Ⅰ(white poppi: sustainable peace Ⅰ)》 기획자 서소영 씨(18)
《화이트 포피: 지속가능한 평화Ⅰ(white poppi: sustainable peace Ⅰ)》 기획자 서소영 씨

전시장에는 어린아이들이 그린 작품도 걸려 있다.

그중 서 씨가 유독 마음에 들어 하는 그림이 하나 있다.

노란색 꽃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그림이다.

복잡한 문장도, 거창한 상징도 없다.

그저 꽃이 하나 피어 있다.

“저는 그 그림이 좋았어요. 너무 많은 걸 설명하려 하지 않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냥 자기가 생각한 꽃 하나를 그린 거잖아요.”

그에게 그 그림은 이번 전시의 의미와도 닿아 있었다.

“평화를 꼭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전시장에 걸린 작품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차이도 나타난다.

어린 작가들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나이가 조금씩 올라갈수록 작품에는 더 많은 색과 상징, 글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표현 방식의 차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서 씨에게는 자신의 성장 과정과도 어딘가 닮아 보였다.

어릴 때는 세상이 단순했다.

성장하면서 알게 되는 것이 많아졌고, 평화 역시 조금 더 복잡한 문제가 됐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작품은 가장 단순한 꽃 한 송이였다.

어쩌면 이번 전시는 복잡해진 세상 속에서 다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평화를 한 공간에 놓다

전시 공간을 선택할 때도 중요하게 본 것이 있었다. 바로 공간 중앙이 열려 있다는 점이었다. 한쪽에는 학생들의 작품이, 다른 한쪽에는 기성 작가들의 작품이 자리한다. 분명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공간 전체를 바라보면 한눈에 함께 들어온다.

“이쪽을 보면 느낌이 다르고 저쪽을 보면 또 달라요. 그런데 한자리에서는 다 같이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평화를 바라보는 방식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린이가 생각하는 평화와 어른이 생각하는 평화가 같을 필요는 없다. 전쟁을 가까이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떠올리는 평화도 다를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그런 서로 다른 시선을 한 가지 답으로 묶기보다 한 공간에 함께 놓으려는 시도가 담겼다.

우크라이나 출신 작가를 비롯해 어린이와 청소년 작가, 기성 작가들이 참여했고, 전시 기간 동안 공연과 아티스트 토크, 도슨트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자립준비청년과 보호아동 등을 초청하는 프로그램도 기획했다.

작품만 걸어놓는 전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첫 기획에서 배운 것은 ‘연결의 어려움’

《화이트 포피: 지속가능한 평화Ⅰ(white poppi: sustainable peace Ⅰ)》 기획자 서소영 씨
《화이트 포피: 지속가능한 평화Ⅰ(white poppi: sustainable peace Ⅰ)》 기획자 서소영 씨

물론 머릿속의 기획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을 전시장으로 초대하는 과정에서 학교와 기관 등의 협조가 필요했고, 여러 단체와 연락하는 과정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를 알게 됐다. 자신에게 좋은 취지라고 해서 상대방에게도 반드시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평화’라는 단어조차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저마다 생각하는 평화를 작품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첫 전시를 준비하며 평화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 과정 자체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경험이었던 셈이다. 기획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일이었다.

서 씨는 앞으로 해외에서도 전시를 이어가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에는 이번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사회의 모습을 작품 안에 담아보고 싶은 생각도 갖고 있다. 세상을 관찰하다 발견한 질문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어떤 전시가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열여덟 살이기에 정해져 있지 않은 편이 자연스럽다. 이번 전시는 그의 완성된 답이라기보다 첫 번째 질문에 가깝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세상을 알기 전에는 평화를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을 알아갈수록 평화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럼에도 그가 전시장에 가져온 것은 거대한 해답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이 그린 꽃과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에게 평화가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아마 대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냥 싸우지 않는 거요.”

어쩌면 열여덟 살의 첫 전시는 그 짧은 문장을 조금 더 오래 생각해보자는 초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