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둘이 일본에 다시 오자고 약속한 것은 2년 6개월 전이었다.
당시 우리는 오사카에 있었다.
여행 중 묵었던 숙소는 온야도 노노였다. 일본식 다다미 바닥이 깔려 있었고 대욕장이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고, 밤이면 무료로 라멘을 내어줬다.
아들은 그곳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아빠, 다음에는 우리 둘이 와.”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아들과 하는 약속은 대체로 그렇게 시작된다. 그 순간만큼은 뭐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쿨한 아빠가 되어 쉽게 약속한다.
문제는 지키는 일이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 살고, 집에서는 가장으로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흘러간다.
그렇게 2년 6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이번 여름, 나는 마침내 아들과 그 약속을 지키러 일본에 왔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행이 두 번이나 사라졌다.
원래 이번 여름의 목적지는 일본이 아니었다. 제주도였다. 숙소도 예약했고 비행기표도 끊었다. 휴가철이라 태국이나 세부, 호주 같은 해외여행지도 생각해봤지만 환율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우리 집 노견 우니였다. 나이가 많은 우니를 장모님 댁에 맡겨놓고 온 가족이 해외로 떠나는 것보다 차라리 함께 제주도로 가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결론은 어렵지 않았다.
“올여름에는 제주도로 가자.”
날짜를 정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숙소도 예약했다. 이번 여름휴가는 제주도에서 아내와 아들, 그리고 우니와 함께 평화롭게 보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출발을 사흘 앞두고 회사에서 일이 터졌다. 내가 담당하던 고객사에서 대형 사업의 RFP가 나왔다. RFP는 ‘Request for Proposal’, 우리말로는 제안요청서다. 발주사가 사업을 맡길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사업의 요구사항을 정리하고, 참여 업체들에게 ‘이 사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제안해 달라’고 요청하는 문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업의 제안PM을 맡게 됐다. 누구도 내게 여행을 취소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휴가는 이미 잡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제안PM이라는 자리를 맡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의 제안서를 만들어가는 상황에서 PM인 내가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가족에게 말했다.
“이번 여행에 나는 같이 못 갈 것 같아.”
아내는 나 없이 아들과 우니까지 데리고 제주도를 다녀오는 것은 버거울 것 같다고 했다. 결국 가족여행 자체를 취소했다. 항공권도 취소하고 숙소도 취소했다. 위약금도 적지 않았다.
제안PM을 맡지 않았다면 불과 사흘 뒤 우리는 제주도로 떠날 예정이었다. 아쉬웠다.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 가면 되지.’
그런데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나는 집에 거의 없었다. 한 달 가까이 새벽에 출근했고 퇴근할 때면 자정이 가까웠다. 주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들의 방학 동안 아들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빠는 이미 집에 없었다. 아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 있을 때가 많았다.
그 시간이 아들에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었던 모양이다.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들이었다. 전화를 받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우리 둘이 예전에 일본 가기로 했잖아.”
그리고 아들은 2년 6개월 전의 오사카 이야기를 꺼냈다. 온천이 있고, 목욕을 마치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고, 밤에는 라멘을 먹었던 호텔. 온야도 노노.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둘이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했던 약속이었다. 아들에게 말했다.
“그래. 이번 일 끝나는대로 우리 둘이 가자.”
내가 가겠다고 하자 아들은 엄마를 졸랐다. 아내도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카오톡으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오사카 항공권 예약 완료.
온야도 노노 예약 완료.
이번에는 정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제안룸으로 들어갔다. 이 일만 끝나면 아들과 일본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객사가 제안 마감 시한 일정을 일주일 연장했다.
제안PM인 내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더 생긴 것은 솔직히 반가운 일이었다. 처음 맡은 제안PM이라 미숙한 것도 많았다. 제안반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일사불란하게 이끌지도 못했다. 제안서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더 주어진 것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직장인인 나에게 생긴 그 일주일은, 아빠인 나에게는 또 하나의 약속을 깨야 하는 일주일이었다.
결국 오사카 여행도 취소했다.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위약금이 또 발생했다. 두 번이나 낸 위약금이 솔직히 너무 아까웠다.
그런데 돈보다 마음이 더 불편했다. 아들에게 미안했다. 두 번이나 항공편과 숙소를 찾고 일정을 준비했던 아내에게도 미안했다. 회사에서 일을 맡았다는 이유로 가족과의 약속이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안서를 제출했다. 더 이상 일정이 밀릴 일도 없었다. 나는 아들에게 연락했다.
“아들, 이번에는 어디든 진짜로 가자.”
문제는 시간이었다. 여름 휴가철이었다. 게다가 출발까지 며칠 남지도 않았다. 아들과 아내가 다시 항공편을 뒤지기 시작했다. 갈 만하다 싶은 곳은 이미 좌석이 없었다. 남아 있는 표는 평소의 두 배, 많게는 세 배였다.
항공권 가격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고 싶다면 급행료를 내시오.’
그러다 아들에게 카카오톡이 왔다.
“아빠, 요나고공항 가는 비행기는 상대적으로 저렴해.”
그리고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조용한 시골 같은 곳이래. 그리고 여기에도 우리가 갔던 온야도 노노가 있어. 온천도 할 수 있고.”
요나고.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지도부터 열어봤다. 오사카는 몇 번 가봤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요나고는 일본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조금 두려웠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보니 오히려 그래서 괜찮을 것 같았다. 아들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곳. 둘이 낯선 곳에 가서 헤매는 경험이라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좋아. 가자.”
그렇게 우리의 목적지는 요나고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