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한컴은 대구공공시설관리공단과 손잡고 공공행정용 AI 실증에 나섰다. 보고서와 업무 매뉴얼 같은 내부 문서를 AI가 읽고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실제 행정업무에서 답변 정확도와 활용 가능성을 검증하는 사업이다. 앞서 국회사무처와 국회도서관, 한국서부발전 등에도 문서 검색과 작성, 데이터 변환을 위한 AI 솔루션을 공급하며 공공·기업용 AI 사업을 확대해왔다.
한컴이 최근 집중하는 분야는 단순한 AI 챗봇이 아니다. HWP·HWPX·PDF·OOXML 같은 기존 문서를 AI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로 바꾸고, 이를 검색과 질의응답, 보고서 작성, 업무 지원으로 연결하는 방향에 가깝다. 여기에 여러 AI 에이전트와 기존 업무 시스템을 연결하는 ‘에이전틱 OS’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눈여겨볼 점은 이 새로운 AI 사업의 출발점이 결국 한컴이 오랫동안 다뤄온 ‘문서’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기술로 방향을 틀었지만, 그 기반에는 수십 년 동안 축적된 HWP와 문서 처리 기술이 놓여 있다. 그래서 최근의 변화는 오래된 HWP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Microsoft Office와 Google Workspace가 문서 작성의 보편적인 도구가 되면서, HWP의 사용 영역은 과거보다 많이 좁아졌다. 민간에서는 Word나 클라우드 기반 문서 도구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HWP는 공공·행정의 일부 영역과 기존 업무 시스템에만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오랜 기간 공공기관의 문서 양식과 업무 시스템이 HWP를 중심으로 구축되면서 다른 문서 형식으로 전환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졌고, 그만큼 호환성이나 특정 프로그램 의존 문제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굳이 별도의 HWP 문서 생태계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어찌 보면 HWP는 시장 경쟁만으로 살아남았다기보다, 한국의 행정 시스템과 오랫동안 맞물리며 생태계를 유지해온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AI 시대의 변화가 흥미로워진다. 과거에는 특정 문서 형식에 대한 의존으로 비판받았던 HWP가, 이제는 오히려 AI와 연결되는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HWP는 정말 기술적으로도 ‘과거의 문서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HWP는 정말 낡은 문서 형식인가
HWP를 떠올리면 흔히 한국에서만 쓰이는 오래된 문서 형식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기존 HWP는 바이너리 기반의 독자적인 포맷이었고, 다른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열거나 편집할 때 제약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HWP 생태계를 과거의 모습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컴은 2010년 HWP 파일 형식을 공개했고, 이듬해인 2011년에는 XML 기반의 개방형 문서 규격 OWPML이 국가표준(KS X 6101)으로 제정됐다. 현재 사용되는 HWPX는 이 OWPML을 기반으로 한 문서 형식이다.

HWPX는 문서 안의 텍스트뿐 아니라 문단, 표, 스타일, 이미지 같은 요소를 구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압축 패키지 안에 XML과 각종 리소스를 담는다는 점에서는 Microsoft의 DOCX와 기본적인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문서 형식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모두 문서의 내용과 구조를 기계가 읽고 처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셈이다. 결국 HWP의 불편함은 문서 형식 자체가 오래돼서라기보다, Microsoft Office와 Google Workspace가 보편화된 환경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의 문서 생태계로 남았기 때문에 더 크게 느껴졌다고 볼 수 있다.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문서 형식이 다르면 변환과 호환 과정에서 불편이 생기기 마련이고, HWP 역시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HWPX의 구조만 놓고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XML 기반으로 문서의 내용과 구조를 표현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다른 주요 문서 형식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사람만 읽고 편집하는 파일이 아니라, 다른 시스템이 문서의 구조와 내용을 읽고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는 뜻이다.
결국 HWP가 불편하게 느껴졌던 이유와 문서 형식 자체가 기술적으로 오래됐는지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HWP는 사용 범위가 좁아지면서 호환의 불편이 커졌지만, 현재의 HWPX까지 기술적으로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만 이런 문서 생태계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HWP처럼 자국의 언어와 업무 환경에 맞춘 별도의 문서 생태계를 유지해온 사례는 한국만의 일일까. 그렇지는 않다.

일본에는 JustSystems의 ‘이치타로(一太郎)’가 있다. 1985년 처음 출시된 일본어 워드프로세서로, 관공서와 교육기관에서도 오랫동안 사용돼왔다. 지금은 Microsoft Word의 영향력이 훨씬 커졌지만 제품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JustSystems는 지금도 매년 새로운 버전을 내놓고 있으며, 2026년 2월에는 ‘이치타로 2026’을 출시해 개인정보 검사, 음성 입력, 음성·영상의 문자 변환 같은 기능을 추가했다. 40년이 넘은 워드프로세서가 현재 환경에 맞춰 계속 갱신되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는 Kingsoft의 WPS Office가 있다. WPS의 출발도 오래됐다. Kingsoft는 1988년 중국 DOS 환경을 위한 첫 WPS 워드프로세서를 선보였고, 이후 Windows용 제품과 오피스 제품군으로 확장했다. 2001년에는 문서·스프레드시트·프레젠테이션을 묶은 WPS Office 형태로 발전했고, 2014년부터 글로벌 시장에서도 WPS Office라는 이름을 사용해왔다. 현재는 PDF와 클라우드 기능, WPS AI까지 포함하는 통합 오피스 플랫폼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국 오피스 문서 형식과 전자공문 관련 국가표준도 마련해 왔는데, 이는 특정 프로그램 하나의 생존보다는 자국 소프트웨어와 문서 체계를 함께 유지하려는 성격이 더 강하게 드러나는 사례이다.
반대로 유럽의 여러 국가는 특정 자국 기업의 문서 형식을 유지하기보다 ODF(OpenDocument Format) 같은 개방형 국제표준을 활용하는 방향을 택해왔다. 자국 기업의 포맷을 고집하기보다는 여러 소프트웨어가 같은 문서를 읽고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선택한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문제의식은 비슷하다. 문서를 어떤 형식으로 만들고, 누가 그 형식을 관리하며, 시간이 지나도 다른 시스템에서 계속 읽고 활용할 수 있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다만 한국은 조금 다른 위치에 있다. HWP의 사용 영역은 과거보다 좁아졌지만, 공공·행정 시스템과 맞물려 축적된 문서가 상당량 남아 있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자체 문서 기술도 함께 유지돼왔다. 이처럼 오랜 기간 쌓인 문서와 이를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함께 남아 있다는 사실은, 생성형 AI가 문서를 새로운 데이터로 활용하기 시작한 지금, 또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AI 시대, 오래된 문서가 데이터 자산이 되다
생성형 AI가 확산되면서 문서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이 읽고 편집하는 파일로 보는 시각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AI가 검색하고 요약하고 새로운 업무에 활용하는 데이터로도 다뤄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문서가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가가 아니다. AI가 내용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제목과 본문, 표와 각주, 문단의 관계처럼 문서 안의 구조까지 함께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구조화된 문서 형식은 HWPX만의 특징은 아니다. DOCX를 비롯한 주요 오피스 문서 역시 문서의 내용과 구조를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담고 있다.
한컴의 차이는 문서 형식 자체의 특별함보다는, 한국의 공공·행정 영역에 오랫동안 축적된 HWP 문서와 이를 처리해온 경험에 있다.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공문과 보고서, 규정과 업무 자료가 HWP 계열로 남아 있고, 한컴은 그 문서를 만들고 읽고 변환하는 기술을 함께 축적해왔다. 여기에는 문서의 양과는 다른 종류의 경험도 포함된다. 공공·행정 문서는 국가나 기관에 따라 서식과 문서 구조, 결재 체계, 표와 첨부 자료를 다루는 방식 등이 달라질 수 있다. Word가 전 세계적으로 훨씬 방대한 문서 생태계를 갖고 있다면, 한컴은 한국의 행정문서라는 특정 영역을 오랫동안 다뤄온 경험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한컴의 AI 사업이 연결된다. 한컴은 HWP·HWPX·PDF·OOXML 같은 문서를 AI가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한컴데이터로더’, 내부 문서를 검색하고 질의응답에 활용하는 ‘한컴피디아’, 문서 작성과 업무 지원을 돕는 ‘한컴어시스턴트’ 등을 앞세우고 있다. 대구공공시설관리공단과 진행하는 공공행정용 AI 실증도 같은 흐름에 있다. 이미 축적된 보고서와 업무 매뉴얼을 AI와 연결하고, 실제 행정업무에서 검색과 답변, 문서 작성에 활용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려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공기관에 HWP 문서가 많이 쌓여 있다는 사실이 특정 문서 형식에 대한 의존의 결과로 보였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같은 축적물이 조직의 지식 자산으로 다시 읽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HWP라는 확장자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된 문서와 업무 지식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조화하고 검색하며 새로운 시스템과 연결할 수 있느냐에 있다.
결국 한컴이 가진 자산은 특정 문서 포맷 하나가 아니다. 한국의 공공·행정 영역에 축적된 문서를 오랫동안 다뤄온 경험과, 그 문서를 실제 업무 시스템과 연결해온 기술에 가깝다.
HWP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선택권’을 지키는 것
그렇다고 HWP를 계속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갈 필요는 없다. 사용자가 불편하다면 더 편리해져야 하고, 다른 문서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이 부족하다면 개선돼야 한다. 특정 프로그램이 없으면 문서를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운 구조 역시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HWP라는 파일 형식 자체를 지키는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문서와 그 안에 축적된 지식을 어떤 기술로 저장하고, 읽고, 검색하고, 다른 시스템과 연결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일이다.
문서 작성 환경이 몇몇 글로벌 플랫폼으로 통합되면 사용은 훨씬 편리해질 수 있다. 하지만 문서를 만들고 저장하는 것뿐 아니라 검색하고 분석하고, AI가 이를 읽고 업무에 활용하는 과정까지 하나의 플랫폼 안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때부터 조직의 문서는 단순한 파일이 아니라 플랫폼이 관리하는 데이터가 되고, 그 데이터를 어떤 방식으로 검색하고 연결하고 활용할 것인지도 해당 기업의 기술과 정책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결국 조직이 문서 도구를 선택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이 저장되고 검색되고 AI에 활용되는 방식까지 플랫폼에 의해 선택당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자국의 문서 기술과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생태계가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필요에 따라 글로벌 서비스와 연결할 수도 있고, 보안이나 데이터 관리가 중요한 환경에서는 자체 시스템을 구축할 수도 있다. 새로운 AI 기술이 등장했을 때 기존 문서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활용할 가능성도 남는다.

한컴의 의미도 이 지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세계의 오피스 시장이 몇몇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동안, 한컴은 한국어 문서 기술과 공공·행정 영역의 문서 생태계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과거에는 이 구조가 특정 포맷에 대한 의존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AI 시대에는 그 안에 쌓인 문서와 경험을 새로운 기술에 연결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가능성도 생겼다. 물론 그 가능성이 자동으로 경쟁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사용자와 공공시장에 기대는 데 머문다면 독자적인 문서 생태계를 유지하는 의미도 점차 약해질 수 있다. 포맷을 더 개방하고, 다른 시스템과 연결하기 쉽게 만들며, 사용자가 특정 프로그램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신의 문서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 함께 따라야 한다.
결국 지켜야 할 것은 HWP라는 확장자 자체가 아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문서와 지식을 특정 기업이나 특정 해외 플랫폼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옮기고 연결하고 활용할 수 있는 선택권이다.
HWP가 불편하다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과 자국의 문서 기술과 생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AI 시대에 한컴이 지켜야 할 것은 ‘한글 문서’라는 이름이 아니라, 한국의 문서와 지식이 다음 기술로 넘어갈 때 그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