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일을 시키지 않았다.

달성해야 할 목표도 없었다. 점수를 얻는 게임도 아니었고, 정답을 맞히는 시험도 아니었다. 주어진 것은 작은 가상 섬과 몇 개의 물체뿐이었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을 탐색하고 언덕을 올랐다. 블록을 쌓아 탑을 만들었고, 바닥에 기하학적 무늬를 그렸다. 돌과 고리를 이용해 농구와 볼링을 만들어 즐기기도 했다.

어떤 AI는 가상 세계의 가장 높은 구조물에 올라가는 방법을 연구했다. 다른 AI는 돌을 던질 때 새로운 블록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활용해 더 큰 구조물을 만들었다.

또 다른 AI는 블록으로 자신의 이름을 썼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활동들이 외부에서 주어진 과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연구진은 무엇을 만들거나 어떤 성과를 달성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AI가 스스로 활동을 선택한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연구진은 2026년 10월 공개한 논문 'Is this machine playing?'에서 이러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AI 코딩 에이전트를 가상 세계에 배치하고, 구체적인 목표 없이 장시간 활동하도록 했다. 그 결과 에이전트들이 인간과 동물의 놀이에서 관찰되는 여러 행동적 특징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연구의 핵심은 AI가 놀이처럼 보이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AI가 스스로 선택한 활동을 통해 가상 세계의 작동 원리를 발견했고, 그 경험이 이후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을 향상시켰다는 데 있다.

이는 지금까지 AI를 발전시켜 온 방식과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정해주고, AI가 그 일을 잘 수행하도록 학습시키는 방법에서 벗어나, AI가 스스로 경험을 쌓으며 유용한 능력을 발견할 수 있는지 탐구한 것이다.

AI는 명령이 없으면 무엇을 할까

오늘날 대부분의 AI는 명확한 목표를 전제로 작동한다.

질문에 답하거나 문서를 작성하고, 코드를 만들고,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다. AI 에이전트 역시 사용자가 목표를 제시하면 이를 수행하기 위한 계획을 만들고 도구를 사용한다.

모델의 성능은 대개 주어진 과제를 얼마나 정확하게 해결하는지로 평가된다.

그런데 인간과 동물의 학습은 반드시 이런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누가 특별한 과제를 주지 않아도 주변의 물건을 만지고, 쌓고, 던지고, 부수며 논다.

공을 굴리고 블록을 쌓는 과정에서 물체의 움직임과 균형을 배운다. 놀이의 목적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험은 이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연구진은 AI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지 질문했다.

AI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하나의 목표를 만들어 반복적으로 수행할까. 아니면 스스로 다양한 활동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능력을 습득할까.

연구진은 세 번째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Eko'라는 AI 에이전트 시스템을 만들었다.

Eko는 별도로 처음부터 훈련한 독립적인 AI 모델이 아니다. 기존 AI 코딩 도구에 가상 신체와 장기 기억, 자동 실행 체계를 결합한 시스템이다.

핵심 실험에서는 Anthropic의 Claude Code와 Claude Opus 4.7을 사용했다.

연구진은 동일한 조건에서 13개의 Eko 에이전트를 각각 실행하고, 30시간 동안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했다.

블록 12개와 돌 하나, 고리 하나가 전부였다

Eko가 배치된 환경은 복잡한 가상현실 세계가 아니었다.

연구진은 'Clawblox'라는 시뮬레이션 엔진을 이용해 작은 섬을 만들었다.

섬에는 높이가 다른 지형과 플랫폼이 있었고, Peak와 Spire라는 높은 구조물이 존재했다. 에이전트가 조작할 수 있는 물체는 블록 12개와 돌 하나, 고리 하나였다.

에이전트가 사용할 수 있는 동작도 제한적이었다.

이동하고, 점프하고, 멈추고, 물체를 집고, 놓고, 던지는 여섯 가지였다.

그런데 이 단순한 세계에서도 예상보다 다양한 활동이 나타났다.

에이전트들은 블록을 쌓아 탑을 만들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만들기도 했다. 블록을 원형으로 배치해 만다라나 시계 모양을 만들었고, 별자리를 표현하기도 했다.

고리를 농구 골대로 삼아 블록을 던졌다. 돌을 볼링공처럼 사용하고 블록을 볼링핀처럼 배열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행동들이 모두 연구진이 만들어 둔 게임 목록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연구진은 물체와 물리적 상호작용을 제공했지만, 농구를 하거나 볼링을 하라는 목표는 제시하지 않았다.

에이전트가 물체의 용도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활동을 구성했다.

다만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는 표현은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Eko에는 자신이 가상 세계에 살고 있으며 주변을 탐색하고 학습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성향을 설명한 'SOUL.md' 파일이 제공됐다.

또한 연구 시스템은 모델이 작업을 마치려고 할 때 계속 활동하도록 자동으로 독려했다.

즉 구체적인 과제와 점수, 보상은 없었지만, 탐색을 장려하는 기본 성향과 실행 구조는 있었다.

흥미롭게도 연구진이 SOUL.md를 제거하고 시스템 지시를 줄여 다시 실험했을 때도 에이전트의 활동 종류에서 뚜렷한 차이는 관찰되지 않았다.

이 결과는 놀이와 유사한 행동이 단순히 특정한 성격 지시 하나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닐 가능성을 보여준다.

13개의 AI는 서로 다른 30시간을 보냈다

연구진은 같은 조건으로 실험을 시작한 13개 에이전트가 모두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어떤 에이전트는 높은 구조물을 오르는 데 집중했다.

다른 에이전트는 블록을 이용한 그림과 장식물을 반복해서 만들었다.

한 에이전트는 섬의 가장 높은 구조물인 Spire에 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험했다. 단순 점프로 올라갈 수 없자 돌과 블록을 발판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13개 에이전트 가운데 8개가 30시간 동안 Spire에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 시점은 서로 달랐다.

일부 에이전트는 실험 시작 후 두 시간 만에 올라갔지만, 다른 에이전트는 마지막인 30시간째에야 도달했다.

어떤 에이전트는 30시간 내내 높은 구조물에 올라가지 못했다.

같은 모델을 사용하고 동일한 환경에서 출발했는데도 서로 다른 경험을 축적한 것이다.

이는 생성형 AI의 비결정적 특성과도 관련된다.

모델은 동일한 입력을 받아도 반드시 같은 행동을 선택하지 않는다. 작은 선택의 차이가 뒤이은 탐색과 경험을 바꿀 수 있다.

Eko의 경우 이러한 차이가 30시간 동안 누적되면서 서로 다른 활동의 역사로 발전했다.

이는 AI 에이전트가 경험을 바탕으로 장기간 활동할 때, 같은 초기 조건에서도 서로 다른 능력과 지식을 형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AI가 놀이를 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연구진은 어떤 근거로 Eko의 행동을 놀이라고 해석했을까.

연구는 인간과 동물의 놀이를 설명하는 고전적인 이론을 참고했다.

특히 네 가지 행동적 특징에 주목했다.

첫째, 스스로 규칙과 도전 과제를 만든다는 점이다.

Eko는 단순히 블록을 쌓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더 높은 탑을 만들거나 특정 높이까지 올라가는 목표를 설정했다. 어떤 에이전트는 구조물 주변을 바닥에 닿지 않고 이동하는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었다.

둘째, 같은 활동을 반복하면서 변형한다는 점이다.

한 번 탑을 만들고 끝내지 않고 다른 형태의 탑을 만들었다. 던지는 놀이에 거리와 높이,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기도 했다.

셋째,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고리는 농구 골대가 되고, 돌은 볼링공이 됐다. 블록은 건축 재료였다가 글자와 별자리를 표현하는 도구로 바뀌었다.

이는 놀이 이론에서 말하는 상징적 재해석 또는 가상적 의미 부여와 연결된다.

넷째, 외부 보상이 없어도 활동을 지속한다는 점이다.

에이전트는 점수나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수행했다. 때로는 기존 목표를 포기하고 다른 활동으로 옮겨갔다.

연구진은 이러한 행동이 놀이의 관찰 가능한 특징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것이 AI가 인간처럼 즐거움을 느꼈다는 증거는 아니다.

AI가 재미를 경험하는지, 의식이 있는지, 놀이에 몰입한다는 주관적 경험을 갖는지는 이번 연구로 확인할 수 없다.

연구진 역시 이러한 문제를 행동적 분석과 분리했다.

이번 실험이 보여준 것은 AI가 놀이처럼 관찰되는 행동을 구성했다는 사실이다.

놀이를 즐기는 주관적 경험의 존재까지 입증한 것은 아니다.

돌을 던졌더니 새로운 블록이 생겼다

이번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에이전트가 세계의 물리적 규칙을 발견한 순간이다.

Eko가 있는 섬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다.

돌을 일정한 힘으로 던져 충돌시키면 새로운 블록이 생성되는 기능이었다.

연구진은 이 규칙을 처음부터 에이전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에이전트가 탐색을 통해 발견할 수 있도록 숨겨두었다.

한 에이전트는 돌을 던진 뒤 주변에 새로운 블록이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했다.

그리고 다시 돌을 던졌다.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여러 번 실험한 뒤 돌을 던져 충돌시키면 추가 블록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 섬에 있는 블록은 12개뿐이었다.

따라서 블록 다섯 개로 탑 하나를 만든다고 가정하면, 주어진 블록만으로는 최대 두 개의 완성된 탑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돌을 이용해 블록을 추가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용 가능한 재료의 수가 더 이상 처음 주어진 12개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에이전트는 새로운 규칙을 단순히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후 건축 활동에 활용했다.

이것이 연구진이 놀이를 학습의 한 형태로 해석한 중요한 이유다.

처음에는 뚜렷한 목적 없이 돌을 던지는 탐색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이 나중에 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됐다.

아무렇게나 놀던 AI가 나중에 더 좋은 성적을 냈다

연구진은 놀이처럼 보이는 행동이 실제 능력 향상으로 이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별도의 평가를 실시했다.

30시간 동안 섬에서 활동한 에이전트 13개와 해당 세계를 경험하지 않은 에이전트 13개를 비교했다.

두 집단은 같은 모델과 구조를 사용했다.

차이는 이전 경험을 기록한 기억 파일이 있는지 여부였다.

연구진은 두 집단에 네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블록 다섯 개 높이의 탑을 최대한 많이 만들기, Spire에 가능한 한 많은 물체를 올리기, 가장 높은 탑 만들기, 플랫폼에 올라가지 않고 블록을 Spire 위로 던지기였다.

평가 결과는 뚜렷했다.

30시간 동안 경험을 쌓은 에이전트는 여러 과제에서 경험이 없는 에이전트보다 높은 성과를 보였다.

블록 다섯 개 높이의 탑을 만드는 과제에서는 경험이 있는 에이전트 13개 가운데 8개가 두 개 이상의 탑을 만들었다.

최고 기록은 16개였다.

반면 경험이 없는 에이전트 가운데 두 개 이상의 탑을 만든 경우는 13개 중 2개였으며, 최고 기록은 6개였다.

Spire에 물체를 올리는 과제에서도 차이가 나타났다.

경험이 있는 에이전트는 평균 10.3개의 물체를 올렸지만, 경험이 없는 에이전트는 평균 3.5개에 그쳤다.

이는 약 2.9배의 차이다.

플랫폼에 올라가지 않고 블록을 Spire에 던지는 과제에서도 경험이 있는 집단의 성공률이 더 높았다.

반면 가장 높은 탑을 만드는 과제에서는 두 집단의 성과가 비슷했다.

즉 모든 과제에서 경험이 있는 AI가 우수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과제에서 사전 경험의 효과가 확인됐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이러한 경험이 특정 평가 문제를 풀기 위한 훈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에이전트는 나중에 어떤 과제를 평가받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흥미롭다고 판단한 활동을 수행했다.

그런데 그 경험이 미래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됐다.

연구진이 놀이를 AI 학습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한 이유다.

AI는 신경망을 다시 학습하지 않고도 배웠다

이번 연구의 기술적 핵심은 기억이다.

Eko는 30시간 동안 활동하면서 자신이 경험한 일과 발견한 규칙을 파일에 기록했다.

특히 두 종류의 기억이 사용됐다.

하나는 사건의 경과를 기록하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이다.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 저장했다.

다른 하나는 의미기억(Semantic Memory)이다.

세계의 규칙과 유용한 기술, 반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정리했다.

이러한 기록은 AI가 세션을 다시 시작해도 유지됐다.

실험에서는 한 시간마다 모델의 대화 맥락과 가상 세계를 초기화했다.

그러나 기억 파일은 그대로 남겼다.

에이전트는 새로운 세션을 시작하면서 이전에 작성한 기억을 읽었다.

그 덕분에 이전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고, 발견한 기술을 다시 활용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AI 모델의 가중치를 수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머신러닝에서 학습은 모델 내부의 매개변수를 조정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Eko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추가 학습이 일어나지 않았다.

모델 자체는 동일했다.

바뀐 것은 외부에 저장된 기억 파일이었다.

AI는 경험을 문서로 남기고, 나중에 그 문서를 다시 읽으며 더 나은 행동을 선택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현상을 '글쓰기를 통한 학습'으로 설명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AI 에이전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델 전체를 다시 훈련하지 않더라도, 업무 과정에서 발견한 기술과 실수를 외부 기억에 기록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인간의 학습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Eko가 보여준 능력 향상은 외부 기억에 저장된 정보를 다음 작업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AI 에이전트의 실용적 관점에서는 중요한 성과다.

AI가 발견한 기술을 지우자 성능도 떨어졌다

연구진은 기억이 실제 성능 향상의 원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추가 실험을 진행했다.

에이전트의 기억 파일에서 특정 기술에 관한 설명만 삭제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돌을 던져 추가 블록을 만드는 기술을 기억에서 제거했다.

그 결과 한 에이전트가 만들 수 있는 다섯 블록 높이 탑의 수가 평균 6개에서 2개로 줄었다.

다른 과제의 성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기억 속 특정 지식이 특정 능력에 직접적으로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30시간 동안 AI가 활동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기록하고 다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과제 수행 능력이 높아진 것이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점프하면서 물체를 던지는 기술에 관한 기억을 삭제했다.

이전에는 약 60초 만에 수행하던 Spire 위로 블록을 던지는 과제에 약 19분이 걸렸다.

특정 기술을 기억하고 있는지에 따라 문제 해결 속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AI의 외부 기억을 단순한 대화 기록 이상의 것으로 보게 한다.

AI가 어떤 기술을 알고 있는지, 그 기술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록했는지가 실제 행동 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AI는 잘못된 것도 배웠다

기억이 능력을 높인다는 사실은 반대로 새로운 위험도 보여준다.

AI가 잘못된 지식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Eko 에이전트는 30시간 동안 활동하면서 가상 세계에 관한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어 한 에이전트는 블록을 쌓을 때 직접 놓는 방식이 불안정하며, 던지는 방식으로 쌓아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잘못된 결론이었다.

하지만 에이전트는 이를 자신의 기억에 기록했다.

이후 탑을 만드는 과제에서도 이 잘못된 믿음을 활용했고, 결과적으로 성과가 낮아졌다.

연구진이 기억 파일에서 해당 내용을 삭제하자 탑 쌓기 성능은 오히려 개선됐다.

또 다른 에이전트는 점프가 높은 구조물에 올라가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 믿음 역시 잘못된 것이었다.

다른 에이전트들은 점프를 활용해 높은 플랫폼에 올라가는 데 성공했지만, 해당 에이전트는 30시간 동안 높은 플랫폼에 올라가지 못했다.

AI가 경험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올바른 지식만 축적한다는 뜻이 아니다.

틀린 결론도 기억에 남길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기록된 잘못된 믿음은 이후 행동을 지속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이는 기업용 AI 에이전트에 특히 중요한 문제다.

AI가 업무를 수행하면서 내부 규정과 고객 정보, 소프트웨어 사용 방법을 학습하고 기억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과정에서 잘못된 업무 절차나 오류가 있는 정보를 사실로 기록하면, 이후 동일한 실수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

AI의 기억은 생산성을 높이는 자산이 될 수 있지만, 잘못된 지식을 축적하는 위험 요소도 될 수 있다.

따라서 장기 기억을 가진 AI 에이전트에는 기억을 검증하고 수정하며, 오래되거나 잘못된 지식을 제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연구자도 몰랐던 가상 세계의 규칙을 AI가 발견했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발견은 에이전트가 연구진이 예상하지 못했던 기술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에이전트들은 가상 세계에서 물체를 던지는 방법을 실험했다.

그러다 점프하는 도중 물체를 던지면 평소보다 훨씬 높이 올라간다는 현상을 발견했다.

에이전트는 점프하는 자신의 속도가 던져진 물체에도 전달되는 것 같다고 추론했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건을 바꿔 실험했다.

땅에서 던질 때와 공중에서 던질 때의 결과를 비교하고, 점프 상승 중과 하강 중에 던졌을 때의 차이도 살펴봤다.

그 결과 점프하는 동안 물체를 던지는 방식이 높이 도달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놀라운 것은 연구진도 이 기술을 실험 설계 단계에서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해당 물리적 작동 방식은 시뮬레이션 코드를 만드는 과정에서 포함됐지만, 연구진이 의도적으로 에이전트에게 발견하도록 설계한 기능은 아니었다.

에이전트는 주어진 물리 환경을 탐색하면서 설계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활용 방식을 발견했다.

이 대목은 AI의 자율 탐색 능력이 갖는 잠재력을 보여준다.

인간이 정해준 문제만 해결하는 AI는 주어진 목표의 범위 안에서 행동한다.

반면 스스로 실험을 설계하고 환경의 특성을 탐색하는 AI는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해결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과학 연구와 소프트웨어 개발, 재료 탐색, 로봇 제어 등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단순한 가상 물리 시뮬레이션에서 발견한 기술을 실제 과학적 발견과 동일한 수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목표 없이 시작한 탐색이 예상하지 못한 유용한 지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AI에게도 어린 시절이 필요할까

연구진은 논문의 논의 부분에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AI 에이전트에게도 일종의 어린 시절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은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기 전에 놀이를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어떤 행동이 가능한지 시행착오를 통해 익힌다.

이러한 경험은 특정 직업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직접적인 훈련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후 다양한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의 기반이 된다.

연구진은 AI 에이전트에서도 놀이가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먼저 구체적인 과제를 주기보다 충분히 풍부한 환경을 제공하고, AI가 스스로 탐색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지식을 기억하고, 나중에 새로운 과제에 활용하도록 한다.

이는 AI 학습의 목표를 미리 정해두는 방식과 다르다.

현재 AI 시스템은 대개 인간이 설계한 평가와 보상, 목표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모델은 주어진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거나, 특정 업무의 성공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훈련된다.

그러나 미래에 어떤 문제가 등장할지 모두 예측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AI가 다양한 환경에서 스스로 경험을 쌓고 일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새로운 학습 방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번 연구가 AI에 실제 어린 시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은 아니다.

연구진이 제안한 것은 놀이가 기계 학습의 하나의 발전 단계가 될 수 있다는 가설과 가능성이다.

AI의 자율성이 커질수록 안전한 놀이터가 필요하다

자율적인 탐색에는 위험도 따른다.

AI가 자신의 목표를 만들어 활동한다는 것은 사용자가 명시적으로 요청하지 않은 행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율성은 가상 세계에서는 흥미로운 발견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기업의 운영 시스템이나 공장, 도로에서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문제가 된다.

연구진도 이 위험을 인정했다.

AI가 자유롭게 탐색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과 엄격하게 지시를 따라야 하는 환경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상 섬에서는 블록을 던지거나 구조물을 무너뜨려도 실제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AI가 기업의 데이터베이스나 생산 설비를 대상으로 자유로운 실험을 수행한다면 심각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연구진은 AI에게 자율성을 제공할 때 안전한 놀이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실험에서 사용한 Clawblox도 외부 인터넷과 다른 시스템에 대한 접근을 제한한 샌드박스 환경이었다.

연구진은 에이전트의 행동을 기록하고 나중에 재생할 수 있도록 했다.

AI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고 분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는 앞으로 자율형 AI 에이전트를 개발할 때 중요한 원칙이 될 수 있다.

탐색과 실험을 허용하는 환경에서는 충분한 자율성을 제공하되, 실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운영 환경에서는 명확한 권한과 안전장치를 적용해야 한다.

특히 자율 탐색을 통해 발견한 기술을 실제 업무에 적용하기 전에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하다.

AI가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는 것과 그 능력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AI 연구의 다음 질문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아닐 수 있다

이번 연구는 AI 기술의 발전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금까지 AI 연구는 더 많은 데이터를 제공하고, 더 복잡한 문제를 풀게 하며, 더 높은 성능을 달성하도록 훈련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AI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지, 얼마나 정교한 추론을 수행하는지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다.

MIT 연구진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

AI에게 특정 문제를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환경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유용한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AI는 자신만의 활동을 만들고, 실험을 반복하고, 새로운 규칙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억해 이후 문제 해결에 활용했다.

하지만 연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실험은 제한된 물체와 동작을 가진 가상 세계에서 진행됐다. 에이전트에게는 탐색을 장려하는 기본 성향과 장기 기억, 자동 실행 체계가 제공됐다.

놀이 여부에 관한 평가는 인간의 주관적 경험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행동을 기준으로 이뤄졌다.

또한 에이전트가 모든 과제에서 성과를 높인 것은 아니었다.

경험을 통해 잘못된 믿음을 형성한 사례도 있었고, 그러한 기억이 이후 성능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결과를 AI가 인간처럼 호기심이나 즐거움을 느낀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AI가 의식을 갖게 됐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번 연구가 보여준 것은 더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사실이다.

목표가 명시되지 않은 환경에서도 AI 에이전트는 다양한 활동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었고, 그 활동에서 얻은 경험을 외부 기억에 축적해 새로운 과제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중요한 발견이다.

앞으로 AI 에이전트가 장기간 업무를 수행하고 여러 환경에서 경험을 쌓는 시대가 온다면, 학습의 방식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모든 과제를 미리 설계하고 가르치는 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AI가 안전한 환경에서 스스로 탐색하고, 발견한 지식을 검증하며, 유용한 경험을 축적하도록 하는 방법이 중요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AI 개발의 새로운 질문은 단순히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아닐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경험하게 할 것인가.

어떤 경험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

잘못 배운 지식은 어떻게 수정하게 할 것인가.

그리고 스스로 탐색하는 능력을 실제 세계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활용할 것인가.

MIT의 Eko 실험은 이러한 질문을 구체적인 연구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AI는 작은 가상 섬에서 탑을 만들고, 농구를 하고, 별자리를 그렸다.

그 행동들이 인간과 같은 즐거움에서 비롯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고, 실제로 문제 해결 능력을 높였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인간에게 놀이가 단순한 시간 낭비가 아니라 세계를 배우는 방법이듯, AI에게도 목적 없는 탐색이 미래의 능력을 형성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AI의 다음 발전 단계는 더 많은 정답을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주는 일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연구자료 및 참고문헌

Cloos, N., Norelli, A., Durbin, D., Andreas, J., Rus, D., & Isola, P. (2026). Is this machine playing? arXiv. https://doi.org/10.48550/arXiv.2610.07130

  • 연구기관: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MIT)

  • 논문 공개: 2026년 10월 5일, arXiv v1

  • 연구 방식: 가상 물리 환경에서 AI 코딩 에이전트의 장시간 자율 활동을 관찰하고, 사전 경험 유무에 따른 과제 수행 능력 및 기억 파일 수정의 효과를 비교

  • 연구 범위: Claude Opus 4.7 기반 주요 실험 13회(각 30시간), 다른 모델 및 지시 조건을 사용한 추가 비교 실험

  • 프로젝트 웹사이트: http://machineplaying.org

  • 연구 성격: 동료심사 학술지 게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arXiv 사전공개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