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 미술의 예술성 여부와 미술사적 담론에 기반으로 한 비평 기준, 2024
김진영
DOI: 10.23088/kama.2023..05.002

NFT를 ‘새로운 것’이라고 부르기 전에,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지 묻는다

NFT 미술을 둘러싼 논쟁은 오랫동안 두 극단 사이를 오갔다. 하나는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미술의 소유와 유통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가격 투기와 디지털 이미지 거래를 예술로 포장했을 뿐이라는 비판이다. 김진영의 「NFT 미술의 예술성 여부와 미술사적 담론에 기반으로 한 비평 기준」은 이 대립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질문 자체를 바꾼다. NFT가 예술인가 아닌가를 곧바로 판정하기보다, 기존 미술이 어떤 기준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논의해왔는지 먼저 살펴본 뒤 NFT를 그 역사 안에 놓는다. 논문은 이를 위해 NFT 미술을 매체, 생산, 수용이라는 세 층위로 나누고 여섯 가지 비평 기준을 제안한다.

이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NFT를 미술사와 단절된 기술적 돌연변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제와 전유, 비물질성, 기술자와의 협업, 탈숙련화, 데이터 처리, 관객 참여 등 NFT에서 새롭게 보이는 현상 상당수는 이미 현대미술 안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졌다. 다만 블록체인이 이 요소들을 거래 시스템과 직접 결합하면서 과거에는 분리되어 있던 문제들이 한 장소에 겹쳐 나타난다. 논문이 NFT를 해석하는 핵심은 바로 이 겹침에 있다.

복제 가능한 이미지에 희소성을 만드는 행위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첫 번째 기준은 거래와 복제, 전유, 소각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복제가 쉽다. NFT가 흥미로운 것은 이 복제를 막기보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환경에서 특정 토큰에 희소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작품 이미지만 보는 것으로는 NFT의 의미를 충분히 읽기 어렵다. 몇 개를 발행했는가, 어떤 방식으로 거래되는가, 실물과 NFT 중 어느 하나를 없애는가, 복제를 허용하는가와 같은 유통의 규칙까지 작품의 의미를 구성한다.

논문은 이 문제를 뒤샹의 《여행가방 속 상자》, 세스 프라이스의 《확산》, 이브 클랭의 비물질적 작품과 연결한다. 특히 클랭이 비물질적 작품의 영수증을 구매자와 함께 태운 행위는 NFT의 ‘소각’과 흥미로운 역사적 평행선을 만든다. 소유의 증거를 없애는 행위가 하나의 의식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오늘날 NFT에서 소각은 에디션 수를 줄여 희소성과 가격을 관리하는 방법으로도 사용된다. 같은 ‘소각’이라도 무엇을 위해 태우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논문은 이 차이를 통해 NFT의 기술적 기능보다 그 기능을 사용하는 작가의 태도를 비평해야 한다고 본다.

그림. 비플의 <매일: 첫 오천일>
그림. 비플의 <매일: 첫 오천일>

비플의 《매일: 첫 5000일》은 이 지점에서 중요한 비교 대상이 된다. 작품은 NFT에 머물지 않고 디지털 파일과 책 등 여러 형태로 다시 유통된다. 저자는 이를 뒤샹이나 클랭과 대비한다. 뒤샹과 클랭이 예술의 상품적 순환을 의심하고 교란하려 했다면, 비플은 오히려 이미지와 작품을 적극적으로 시장 순환 속으로 집어넣는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비슷한 복제와 전유가 나타난다고 해서 미술사적 의미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NFT를 비평하려면 ‘무슨 기술을 썼는가’보다 그 기술이 시장과 작품의 관계를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예술과 기술의 협업은 새로운 미감과 새로운 노동구조를 동시에 만든다

두 번째 기준은 예술과 기술의 협업이다. 여기서 논문은 NFT와 디지털 아트를 1960년대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의 계보와 연결한다. 예술가와 엔지니어의 협업은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기술을 매개로 지역사회와 관계를 형성하고, 정보에 접근할 권리와 민주적 참여의 문제로까지 확장됐다. 슈퍼플렉스의 ‘모든 데이터를 사람들에게’라는 작업이나 레픽 아나돌의 지역민·환경 데이터를 활용한 작업이 그 연장선에 놓인다.

그림. 레픽 아나돌
그림. 레픽 아나돌

그러나 협업의 확대에는 다른 방향도 있다. 전문 제작회사와 대형 스튜디오가 등장하면서 예술가가 개념을 제시하고 수많은 기술자와 제작자가 실제 작품을 만드는 분업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이는 올라퍼 엘리아슨이나 아나돌 같은 현대의 대형 스튜디오에서도 익숙한 구조다. 기술 협업은 개인 예술가의 능력을 넘어서는 작품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누가 창작의 주체이며 누구의 노동이 작품의 가치로 흡수되는지를 묻게 한다. 논문은 NFT의 기술적 화려함을 평가할 때 이러한 제작 구조까지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NFT 비평의 초점은 이미지에서 시스템으로 옮겨간다. 화면에 무엇이 나타났는지만이 아니라 어떤 인력과 기술, 데이터, 자본이 결합되어 그것을 만들었는가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사회적 주제가 작품의 가치 판단에 들어오는 방식

생산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세 번째 기준은 사회적 주제 의식이다. 저자는 예술이 동시대의 사회적·역사적 상황을 포착하고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을 가진다는 전제에서 NFT 작품을 비교한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고가에 거래되거나 시각적으로 화려한 작품과 사회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작품 사이에 다른 평가선이 그어진다.

그림. 에드워드 스노든<stay free>(2021)
그림. 에드워드 스노든<stay free>(2021)

대표적인 사례가 팩과 줄리언 어산지의 《Censored》, 에드워드 스노든의 《Stay Free》다. 이 작품들은 DAO를 통한 모금과 후원을 결합하면서 작품의 거래를 정치적 행동과 연결한다. 조형적 완성도만으로 평가한다면 주변적인 요소로 보일 수 있는 블록체인의 모금·투표 시스템이 여기서는 작품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반대로 비플의 《매일》이나 아나돌의 《Unsupervised》를 둘러싼 비판을 논문은 사회적 주제 의식의 문제와 연결한다. NFT의 가치가 가격이나 기술적 새로움만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준이 작품의 ‘좋은 의도’를 칭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작품이 실제로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어떤 행동을 가능하게 했는지가 중요하다. DAO를 통한 후원처럼 기술적 구조가 작품의 주제를 실행하는 장치가 될 때, 메시지는 이미지 밖에서 작동한다.

서툰 기술도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서툴다는 사실만으로 예술이 되지는 않는다

네 번째 기준인 탈숙련화(deskilling)는 비플을 이해하기 위한 논문의 독특한 관점 가운데 하나다. 현대미술에서는 오래전부터 뛰어난 손기술 자체가 예술의 필수조건이라는 생각을 흔들어왔다. 콜라주, 레디메이드, 개념미술과 사진 개념주의에서 작품의 가치는 제작 기술보다 선택과 아이디어, 규칙의 설정으로 이동했다.

논문은 세스 프라이스의 해석을 따라 비플의 Cinema 4D 사용을 이 계보에서 바라본다. 비플은 초기 작업에서 툴을 충분히 숙련하기보다 매일 한 작품씩 만드는 행위를 지속했다. 따라서 미숙한 툴 사용이나 의도적 오용 역시 탈숙련화의 관점에서 해석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논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개념미술에서 숙련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숙련 대신 개념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결국 질문은 “기술적으로 잘 만들었는가”에서 “기술적 완성도를 포기할 만큼 강한 개념이 있는가”로 이동한다.

이 기준은 생성형 AI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 제작 난도가 낮아질수록 ‘만드는 데 얼마나 어려웠는가’는 점차 약한 기준이 된다. 반대로 왜 그런 방식으로 만들었으며 그 제작 조건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알고리즘을 작품의 도구가 아니라 작품이 세계를 보는 방식으로 읽는다

다섯 번째 기준은 데이터 알고리즘의 위험성이다. 이 부분에서 논문은 NFT 미술의 비평을 기술철학의 문제까지 확장한다. 에드 핀의 ‘알고리즘 읽기’와 하이데거의 ‘틀 잡기(enframing)’를 통해 데이터 기반 예술을 단지 새로운 시각적 표현 방식으로 보지 않고, 세계를 데이터로 변환하는 방식 자체를 묻는다.

그림. <Unsupervised - Data Universe - MoMA>(2022)
그림. <Unsupervised - Data Universe - MoMA>(2022)

아나돌의 《Unsupervised》가 대표 사례다. 작품은 MoMA의 방대한 소장품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켜 인간이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미술사적 데이터를 움직이는 이미지로 만든다. 이를 기술이 인간의 지각 범위를 확장한 사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논문은 반대 방향에서도 작품을 읽는다. 칼로, 모네, 고흐, 클림트처럼 서로 다른 역사와 조형언어를 가진 작품들이 알고리즘 안에서는 동일한 종류의 ‘데이터’로 변환된다. 기술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별 작품의 차이를 계산 가능한 요소로 평평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AI·NFT 작품을 평가할 때 결과 이미지의 아름다움만을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어떤 데이터가 입력됐고, 알고리즘은 그것을 어떤 형태로 분류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읽어야 한다. 기술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보다 기술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잘라내고 재배열하는가가 비평의 대상이 된다.

이 논의에서 블록체인은 양면적이다. 논문은 에드 핀을 따라 블록체인이 중앙기관이 독점하던 금융 기록을 공개된 장부로 이동시키고, 중앙집중적 신뢰를 참여자들의 합의로 대체하려는 가능성을 가진다고 본다. 동시에 이 구조 역시 신뢰와 선의지가 유지되어야 작동한다. 히토 슈타이얼의 《Animal Spirits》가 NFT와 암호경제를 조롱하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 작품으로 제시되는 이유다.

관객은 작품을 보는 사람에서 작품의 가치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이동한다

마지막 기준은 자기표현과 하위문화적 수용이다. 이 부분은 기존 미술 비평과 NFT의 차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크립토펑크나 BAYC 같은 PFP NFT는 이미지를 감상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용자는 그것을 자신의 SNS 프로필에 붙이고 커뮤니티에 가입하며,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밈으로 확산시키고, 특정 프로젝트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림. 라바랩스<CryptoPunk> 콜렉션 중 일부
그림. 라바랩스<CryptoPunk> 콜렉션 중 일부

따라서 NFT의 이미지는 작품인 동시에 사회적 표지다. 가치 또한 작가가 완성해 작품 내부에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소유, 전시, 공유, 변형, 커뮤니티 활동을 거치며 계속 만들어진다. 《Nyan Cat》처럼 이용자들이 수많은 변형 이미지를 만들거나, DAO가 공동으로 자금을 모아 정치적 목적을 수행하는 사례에서 수용자는 소비자가 아니라 문화 생산 과정의 일부가 된다. 논문은 이러한 이동을 NFT 미술의 중요한 비평 지점으로 본다.

여기서 NFT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도 달라진다. “이 이미지가 얼마나 훌륭한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이 이미지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어떤 공동체와 행동을 만들어내는가?”, “소유가 어떤 정체성과 관계를 형성하는가?”까지 작품의 가치 판단에 들어온다.

NFT의 예술성은 이미지 안에서만 판정할 수 없다

논문의 결론은 하나의 절대적 판정 기준을 만드는 대신 여섯 개의 관점을 동시에 열어두는 데 있다. 거래·복제·소각, 기술 협업, 사회적 주제, 탈숙련화, 알고리즘, 수용자의 자기표현과 참여는 각각 NFT 미술의 서로 다른 층을 드러낸다. 저자는 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이 만든 미감, 사회적 관계와 정보의 평등성, 미술시장의 상품화에 대한 태도, 인권·환경·에너지와 같은 동시대적 문제, 그리고 커뮤니티의 참여가 모두 작품의 예술적 가치 판단에 관여한다고 정리한다.

이 논문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NFT를 옹호하기 위해 미술사를 끌어오는 것도, NFT를 미술사 밖으로 밀어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NFT가 새롭다고 주장하는 요소들을 하나씩 과거로 되돌려 보내본다. 소각은 클랭에게서, 복제와 유통은 뒤샹과 세스 프라이스에게서, 기술 협업은 E.A.T.에서, 탈숙련화는 개념미술에서, 참여와 유통을 통한 가치 생산은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에서 이미 발견된다. 그렇게 보면 NFT의 새로움은 각각의 요소 자체보다 이들이 블록체인이라는 거래·소유 시스템 안에서 동시에 결합된 방식에 놓여 있다고 읽을 수 있다.

동시에 논문은 기술 변화의 속도에도 주목한다. NFT가 충분히 비평되기도 전에 미술계의 관심은 이미 text-to-image와 생성형 AI로 이동했다. 그러나 아나돌의 《Unsupervised》처럼 NFT와 AI는 서로 교체되는 기술이 아니라 이미 한 작품 안에서 중첩되고 있다. 저자가 결론에서 NFT와 AI의 상호작용을 향후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제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이 논문이 남기는 가장 유용한 관점은 “NFT가 예술인가?”라는 질문을 오래 붙잡지 않는 데 있다. 대신 무엇이 거래되고, 누가 만들고, 어떤 데이터가 사용되며, 어떤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고, 관객이 무엇을 수행하는가를 차례로 묻는다. 이 질문들을 거치면 NFT의 높은 가격이나 기술적 신기함에서 한발 벗어나 작품이 실제로 작동하는 구조를 볼 수 있다. NFT 이후 생성형 AI와 블록체인이 뒤섞이는 미술을 비평할 때도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