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나는 처음 해보는 일을 맡았다.
제안 PM.
그동안 선제안 업무의 일부를 경험한 적은 있었지만, 제안 전체를 책임지고 사람과 일정, 결과물을 이끌어가는 역할은 처음이었다.
마침 내가 담당하던 분야에서 중요한 사업이 나왔다. 마음 한편에서는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만 허락해주신다면, 처음이긴 하지만 이번 제안PM을 제가 맡아보고 싶습니다.”
말을 꺼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졌다.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중요한 제안을 맡긴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팀장님도 고민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성장해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마흔 후반에도 새로운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가 아직 나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는 것. 그 믿음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제안팀을 꾸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여러 부서에 협조를 요청하고, 필요한 사람을 찾고, 한 명씩 제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정신없이 사람을 모으다 보니 어느새 제안은 시작돼 있었다.
그런데 나는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
킥오프 미팅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사람만 모이면 각자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맡은 역할을 설명하고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 자연스럽게 제안서가 완성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제안을 시작한 지 2주가 지나고서야 알게 됐다.
킥오프 미팅은 단순히 일정과 업무를 공유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이유로 모인 사람들에게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누가 무엇을 맡고, 언제까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지 합의하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함께 일할 것인지 기준을 세우는 시간이었다.
같은 공간에 모였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말로 일을 대신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역할보다 주변의 움직임을 살폈다. 누군가는 정해진 업무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듯했다.
반대로 자신이 맡은 일 이상을 해내려는 사람도 있었다. 일이 늦어질까 봐 먼저 움직이고,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면 말없이 메워주는 사람도 있었다.
제안 PM은 그 서로 다른 마음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입찰 마감일에서부터 거꾸로 일정을 계산하고, 제안서 작성과 검토, 수정과 디자인, 제출 준비까지 촘촘하게 계획해야 했다. 각자가 맡은 일을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도록 계속 확인해야 했다.
누가 무엇을 맡았는지 혼선이 생기지 않게 조정하고, 서로의 결과물이 충돌하지 않도록 연결해야 했다. 협력사와도 끊임없이 소통해야 했고, 일정이 늦어지면 이유를 확인하고 다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제안서의 품질도 챙겨야 했다.
문장의 방향이 맞는지, 고객이 원하는 이야기가 담겼는지, 우리가 가진 강점이 제대로 드러나는지 살펴야 했다. 자료를 모으는 것만으로는 제안서가 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사람이 작성한 내용을 하나의 목소리로 이어 붙이는 일도 필요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람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일이 몰리지 않도록 해야 했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역할을 부여해야 했다. 날카롭게 지적해야 할 순간에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표현을 골라야 했다.
때로는 다 큰 어른을 다독이듯 설명해야 했고,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척 다시 물어야 했다. 한 사람과의 갈등이 전체 분위기를 흔들지 않도록 감정을 삼켜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여러 얼굴을 보았다.
처음 맡은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용히 도움을 건네는 사람들.
어떻게든 이번 제안이 잘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시간과 체력을 내어주는 선배와 후배들.
경험이 없는 제안PM을 보며 자신의 편의를 먼저 챙기려는 사람들.
그리고 특별히 잘되지도, 잘못되지도 않은 채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람은 일이 어려울 때 자신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번 제안을 통해 나는 제안서를 쓰는 방법보다 사람을 더 많이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나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마지막까지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제안서를 붙잡고 있는 나를 보며 식사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일이 끝났는데도 남아서 다른 사람의 자료를 확인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첫 제안 PM이라 불안해하는 나에게 괜찮다며 한마디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마음들 덕분에 나는 아직 이 일을 버티고 있다.
그럼에도 자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경험 없는 PM의 시행착오로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만 주고 있는 것일까.'
인생은 아픔을 통해 성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경험은 선명한 아픔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깝다. 무엇이 잘되고 있는지,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판단하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하나를 수습하면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던 것은 없는지, 누군가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긴 것은 아닌지, 내가 결정을 미뤄 일이 복잡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잘해보고 싶어서 누구보다 일찍 출근한다. 늦게까지 남아 제안서를 쓰는 사람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아 함께 자리를 지킨다. 한 명이라도 더 챙겨보려 애쓰고,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하지만 나에게도 어려움이 있다. 예전보다 단호해지는 일이 쉽지 않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불필요한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상대가 선을 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질게 말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한 사람을 강하게 제지했다가 팀 전체의 분위기가 흔들릴까 걱정한다. 갈등이 커져 사람들이 일보다 감정에 매달리게 될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머뭇거린다. 말해야 할 순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지적해야 할 때 표현을 다듬는다. 그러는 사이 상대는 나의 망설임을 여유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결정을 잘 내리는 사람보다, 결정의 결과를 감당하는 사람이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 마음을 모아 한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
힘든 사람을 다독이고, 느린 사람을 기다리고, 멈춘 사람을 움직이게 하면서도 이미 달리고 있는 사람이 지치지 않도록 살피는 것.
그것이 리더의 일이라면, 리더는 참 어려운 자리다.
나는 한때 직책자가 되어보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사람들과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더 넓은 책임을 맡으면 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나는 직책자와 맞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고.
조직을 이끌고 사람을 통제하는 삶보다,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며 조용히 살아가는 편이 나에게 더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쉰이 되면 조금은 욕심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달리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모습.
세상의 중심에 서려 하기보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예전 같으면 그것을 포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물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만이 성장도 아닐 것이다.
다만 이번 제안이 끝날 때까지는 조금 더 가보려고 한다.
잘해서가 아니라, 아직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통해 내가 리더가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첫 경험의 혼돈만으로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닫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금 잘하는 PM이 아니라, 처음 PM이 되어가는 사람이다.
실수한 만큼 배우고, 놓친 만큼 다시 살피고, 망설였던 만큼 다음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성장은 어느 날 갑자기 유능해지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어제는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고, 오늘 하지 못한 말을 내일은 조금 더 담담하게 꺼낼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혼돈 속에서도 끝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정도라면 나는 지금도 아주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흔 후반의 나는 또 하나의 역할을 처음 배우고 있다.
능숙하지 않고, 여전히 흔들리며, 때로는 내가 선택한 도전이 버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내 안에는 아직 새로운 일을 맡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
여전히 나를 믿고 기회를 건네는 사람이 있고, 내 곁에는 늦은 밤까지 함께 버텨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이번 이야기를 실패한 리더의 이야기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을 모으고, 서로 다른 마음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뒤늦게 배워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아직 로딩 중인 마흔 후반의 삶에 새롭게 더해진,
또 하나의 성장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