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스포츠 투자를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한동안 PIF(사우디 국부펀드)는 축구, 골프, 복싱, 테니스, e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며 세계 스포츠 산업의 흐름을 흔들었다. 거액의 자본을 앞세워 기존 질서에 빠르게 진입하고, 세계적인 선수와 대회를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일부 스포츠 투자에서 조정 신호가 나타나면서, 사우디가 그동안의 공격적인 투자 전략에서 물러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사우디가 스포츠와 e스포츠 투자금을 줄이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퍼졌다. 얼핏 보면 사우디가 무제한으로 돈을 쓰던 시기를 지나, 스포츠와 e스포츠 투자 전반을 축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흐름을 단순히 “사우디가 돈을 줄인다”는 말로만 정리하면 핵심을 놓칠 수 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투자 철회라기보다 투자 방식의 변화에 가깝다. 사우디의 e스포츠 전략은 ‘돈을 덜 쓰는 방향’이라기보다, 돈을 어디에 남길 것인가를 다시 고르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LIV 골프가 보여준 조정 신호
이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LIV 골프 사례를 짧게 짚을 필요가 있다. LIV 골프는 2022년 사우디 국부펀드 PIF의 후원을 받아 출범한 신생 프로 골프 리그다. 기존 남자 프로골프의 중심이던 PGA 투어와 별도로 운영됐고, 거액의 계약금과 상금을 앞세워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세계 골프 산업에 큰 충격을 줬다.

LIV 골프는 사우디 자본이 기존 스포츠 질서에 얼마나 빠르게 균열을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였다. 돈은 시장 진입 장벽을 빠르게 낮출 수 있다. 새로운 리그를 만들고, 스타 선수를 데려오고, 전 세계 미디어의 시선을 끌어오는 데 자본만큼 빠른 수단은 많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LIV 골프는 막대한 비용을 계속 투입해야 하는 모델의 부담도 드러냈다. 새로운 리그가 장기적으로 유지되려면 선수 영입과 상금만으로는 부족하다. 안정적인 시청자, 중계권, 스폰서, 팬덤, 기존 제도권과의 관계가 함께 따라와야 한다. 결국 돈으로 시작한 리그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돈 이외의 산업 구조가 필요하다.
PIF가 LIV 골프에 대한 지원을 2026시즌 이후 중단하기로 했다는 보도는 그래서 중요하다. 이것은 사우디가 스포츠에서 완전히 물러난다는 뜻이라기보다, 모든 프로젝트에 무제한으로 돈을 쓰던 단계에서 비용 대비 효과와 장기 전략을 따지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스포츠도 흔들리나
그렇다면 e스포츠도 같은 방식으로 줄어드는 것일까. 현재 확인되는 흐름만 보면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Esports World Cup은 여전히 사우디 게임·e스포츠 전략의 핵심 축에 가깝다.
EWC 2026은 총상금 7,500만 달러 이상, 24개 게임과 25개 토너먼트, 2,000명 이상의 선수와 200개 이상의 클럽 참여를 내세운 대형 행사로 발표됐다. 개최지는 당초 리야드였으나 이후 파리로 변경됐다. 다만 공식 발표는 이를 사우디가 e스포츠에서 빠지는 신호가 아니라, EWC를 장기적으로 세계 주요 도시로 확장하려는 비전의 일부로 설명한다. 동시에 리야드는 EWC의 고향이자 장기적 미래에서 여전히 중심이며, 2027년 복귀 의향도 밝혔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EWC 2026의 파리 개최는 사우디가 e스포츠를 접는다는 신호라기보다, 사우디가 만든 e스포츠 플랫폼을 리야드 밖으로 확장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세계 e스포츠를 사우디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사우디가 설계한 대회 형식과 브랜드를 다른 도시로 내보내는 방식도 가능해진 것이다.
전략의 중심, Savvy Games Group
사우디의 게임·e스포츠 투자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축은 Savvy Games Group이다. Savvy는 PIF가 보유한 게임·e스포츠 전문 기업이다. PIF는 Savvy를 게임과 e스포츠 산업의 장기 성장, 전략적 인수, 투자, 상업적 사업을 추진하는 포트폴리오로 설명한다.
이 구조가 중요한 이유는, 사우디의 관심이 단순한 상금 지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Savvy는 ESL FACEIT Group과 Scopely를 주요 포트폴리오로 보유하고 있다. ESL FACEIT Group은 글로벌 e스포츠 대회 운영과 연결되고, Scopely는 모바일 게임 시장과 연결된다. 즉 사우디는 대회, 게임사, 모바일 이용자, 클럽, 팬덤을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보려 한다.
Moonton 인수 사례도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ByteDance는 Mobile Legends: Bang Bang 개발사 Moonton을 사우디 PIF 소유 게임 기업에 매각하기로 했다. Mobile Legends는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강한 모바일 e스포츠 생태계를 갖고 있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단순한 게임사가 아니라, 이용자 기반과 대회 확장성을 함께 가진 IP를 확보하는 의미가 있다.

상금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
e스포츠에서 영향력은 누가 돈을 많이 주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상금은 가장 눈에 잘 보이는 요소지만, 더 오래 남는 것은 따로 있다. 누가 대회를 운영하는가, 어떤 게임이 들어오는가, 어떤 클럽이 참여하는가, 방송과 콘텐츠가 어디서 유통되는가가 중요하다.
EWC는 바로 이 구조를 시험하는 무대다. 여러 게임 종목을 하나의 시즌에 묶고, 클럽 단위의 경쟁 구조를 만들며, 세계적인 팀과 선수를 한 무대에 모은다. 팬에게는 대회지만, 사우디 입장에서는 도시 브랜딩이자 산업 전시이며, 동시에 글로벌 게임·e스포츠 허브 전략을 보여주는 장치다.
그래서 사우디의 e스포츠 전략을 볼 때 상금 규모만 보면 부족하다. 봐야 할 것은 상금 뒤에 있는 구조다. 어떤 게임이 선택되는가. 어떤 팀과 클럽이 연결되는가. 어떤 도시가 무대가 되는가. 어떤 게임 IP가 사우디의 포트폴리오 안으로 들어오는가. 이 질문들이 사우디 e스포츠 전략의 핵심에 더 가깝다.
따라서 “사우디 e스포츠 투자 축소”라는 표현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일부 고비용 스포츠 투자는 실제로 조정되고 있다. LIV 골프 지원 중단은 그 대표적인 신호다. 수익성이나 장기 전략과 맞지 않는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e스포츠 철회를 뜻하지는 않는다. EWC는 여전히 확대된 규모로 추진되고 있고, Savvy Games Group은 PIF의 게임·e스포츠 전략에서 중심축으로 남아 있다. Moonton, ESL FACEIT Group, Scopely 같은 자산은 사우디가 게임과 e스포츠의 운영 구조까지 보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사우디의 e스포츠 전략은 축소가 아니라 선별이다. 예전에는 시장에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해 공격적으로 돈을 썼다면, 이제는 어떤 투자가 산업 지배력과 국가 브랜드에 남는지를 따지는 단계다. 돈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계산해서 쓰는 것이다.
앞으로 봐야 할 질문도 달라진다. 사우디가 e스포츠에 투자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어떤 게임이 EWC에 남는가. 어떤 클럽이 사우디 자본과 연결되는가. 어떤 모바일 IP가 선택되는가. 어떤 도시가 새로운 무대가 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기존 e스포츠 생태계의 중심을 어디로 옮기는가.
사우디는 e스포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e스포츠만 남기려 하고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e스포츠 산업의 다음 경쟁이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