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엔진 멈춘 한국, 미래 기술 전쟁에서 밀려날 위기

현대원 칼럼니스트

dhyun12@gmail.com | 2025-06-11 05:48:19

다음 성장엔진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도체의 착시에 갇힌 채
세계 기술사에서 점차 변방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거대한 전환의 문턱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과거 고도성장을 견인했던 제조업 기반의 산업구조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이제 세계는 바이오, 양자, 우주, 인공지능(AI) 등 이른바 핵심 신흥 기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술 패권 경쟁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문제는 이 경쟁에서 한국이 더 이상 선두 그룹에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최근 하버드 케네디스쿨 벨퍼 센터의 《핵심 신흥 기술 지수 2025》 보고서는 한국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종합 순위에서 한국은 25개국 중 5위를 기록했지만, 이는 전체 점수의 35%를 차지한 반도체 분야의 높은 평가 덕분이다. 실제로 AI(9위), 바이오(10위), 양자(12위), 우주(13위) 등 미래 산업의 핵심 분야에서는 모두 중위권 수준에 머물렀으며, 미국(1위)과 중국(2위)과는 점수 격차가 압도적이다. 특히 AI 모델의 정확도 및 알고리즘 부문에서는 ‘0점’을 기록했으며, 이는 기술 독립성은 물론이고 원천 기술 역량의 심각한 부재를 보여주는 결과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기술력 저하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인재 부족과 제도적 미비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의 우수 인력들이 의학계열로 쏠리는 구조는 기술 인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으며, 글로벌 수준에서 경쟁 가능한 창의·응용형 인재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벨퍼 센터가 제시한 AI 인재 지표에서 한국은 2.6점으로, 미국(19.1점), 중국(20점), 유럽(17.6점)과 비교해 현저히 낮았다. 이와 같은 인재 불균형은 향후 기술 추격은커녕 후발국의 추월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욱이 AI 생태계의 토대가 되는 데이터 활용과 알고리즘 개발은 규제 미비와 법제 정비의 지체로 인해 기업과 연구기관이 기술 혁신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표적인 예가 TDM(Text and Data Mining) 면책 조항의 부재다. 미국과 유럽. 일본과 중국은 이미 AI 개발의 핵심 자원인 데이터 채굴과 활용에 대한 법적 보호체계를 마련한 반면, 한국은 여전히 모호한 저작권 해석과 미완성된 법령 체계 속에서 민간 혁신이 억제되고 있다. AI 기본법과 산업인재 혁신법안이 추진 중이나, 기술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정책 대응이 지나치게 느리다.

이러한 문제는 디지털 전환에 뒤쳐졌던 이웃 경쟁국 일본과의 비교에서도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제 일본은 반도체(4위)와 바이오(4위)를 양대 축으로 삼아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AI(10위)와 양자(8위), 우주(9위) 분야에서도 중장기적 투자를 병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기초과학의 경쟁력을 산업·상용화로 연결하기 위해 산학연 협업 체계를 강화하고, 인재 유치와 글로벌 연구기관 유입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어, AI 분야에서는 전용 데이터센터 구축과 기업용 컴퓨팅 자원 보급에 국가 예산이 투입되고 있으며, 양자 기술에서는 RIKEN과 Fujitsu가 개발한 초전도 양자컴퓨터가 이미 실증 단계에 들어섰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반도체 단일 산업에 국가 경쟁력을 의존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장비·소재·설계 등 핵심 영역은 일본, 미국, 네덜란드에 의존하는 구조이다. AI, 바이오, 양자, 우주 등은 단순한 신산업이 아니다. 이들은 향후 10년간 세계 산업 지형을 재편할 지정학적 기술 패권의 열쇠이며, 이를 놓치는 국가는 성장 정체, 산업 공백, 고용 붕괴라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단순한 ‘빠른 추격자’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 질 높은 글로벌 수준의 인재 확보, 해외 석학 및 기관과의 기술 동맹, 규제 정비를 통한 산업 생태계 복원력 강화, 그리고 기술 기반 산업다각화 전략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TDM 면책 조항을 포함한 AI 관련 법·제도 정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데이터를 자산으로 전환하는 ‘법적 인프라 구축’은 시급하다.

대한민국이 다시 기술 전환의 선도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위기를 국가 전략의 대전환 시점으로 삼아야 한다. 다음 성장엔진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도체의 착시에 갇힌 채 세계 기술사에서 점차 변방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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