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
규제 개편과 정책적 지원 고민 필요
2017년, 우리나라 가상자산 시장이 급격히 과열되면서 정부는 강력한 규제책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금융회사 및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가 금지되었고, 법인의 실명계좌 발급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국내 블록체인 산업은 위축되었다. 그러나 2024년,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 시행과 함께 글로벌 시장이 법인을 중심으로 가상자산을 제도화하는 흐름 속에서 우리도 규제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법인의 참여를 단계적으로 허용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2024년 11월, 첫 가상자산위원회에서는 법집행기관과 비영리법인을 대상으로 실명계좌 개설 허용이 검토되었으며, 2025년 2분기부터 거래소, 비영리법인, 법집행기관이 현금화 목적으로 법인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허용될 예정이며, 하반기에는 상장법인과 대형 투자법인의 가상자산 매매가 가능해지며, 이에 따른 자금세탁방지 기준과 공시 의무도 한층 강화된다. 일반 법인의 전면적인 가상자산 거래 허용은 외환 및 세제 관련 제도 정비 이후 장기적으로 검토될 전망이다.
2025년 2월, 정부는 ‘법인의 가상자산시장 참여 로드맵’을 공식 발표하며, 상반기에는 법인 유형별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하반기 이후에는 자금세탁방지 및 시장 모니터링 방안을 강화하는 등 보다 체계적인 규제 개편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규제에서 혁신으로의 전환을 통해 글로벌 가상자산 산업의 흐름을 반영하고, 법인의 참여를 통해 블록체인 산업 활성화와 금융 혁신을 이루어나갈 필요가 있다.
디지털 자산 Vs. 가상 자산
‘가상자산(Virtual Assets)’이라는 용어는 한국의 금융 규제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지만, 미국에서는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s)’이 법적 용어로 자리 잡았다. 두 용어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그 사용 배경과 의미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미국의 디지털 자산 관련 법안과 금융 규제 기관은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s)’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FIT21(Financial Innovation and Technology for the 21st Century Act),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와 CFTC(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의 규제 문서, 2022년 바이든 행정부의 대통령 행정명령, 미국 의회의 디지털 자산 관련 청문회 및 보고서, 법원 판결문 등에서 ‘디지털 자산’이라는 표현이 일관되게 사용된다. 이러한 용어는 단순한 암호화폐를 넘어 NFT(대체불가토큰),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증권 등 다양한 블록체인 기반 금융상품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가상자산(Virtual Assets)’라는 용어는 주로 국제 금융기구(FATF, IMF, UN)에서 자금세탁방지(AML) 및 금융범죄 방지를 목적으로 사용된다. FATF(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는 2019년 발표한 ‘Virtual Asset and Virtual Asset Service Providers (VASPs)’ 가이드라인에서 공식 용어로 채택했으며, IMF(국제통화기금)와 UN(국제연합) 역시 일부 문서에서 가상자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금융 당국과 규제 기관에서는 가상자산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미국이 ‘가상자산(Virtual Assets)’ 대신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s)’을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가상(Virtual)’이라는 단어는 게임 내 아이템, 메타버스 재화, 전자상거래 포인트 등 물리적 실체가 없는 모든 자산을 포함할 수 있어 법적 정의가 모호하다. 둘째, 미국 금융 규제에서는 디지털 주식(Digital Securities), 디지털 채권(Digital Bonds), 토큰화 자산(Tokenized Assets) 등의 등장으로 인해, ‘가상(Virtual)’이라는 표현보다는 ‘디지털(Digital)’이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셋째,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s)’은 블록체인 기반으로 발행되거나 디지털 형식으로 존재하는 금융 자산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어 암호화폐뿐만 아니라 블록체인 기반의 다양한 금융상품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이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s)’이라는 용어를 채택한 것은 금융 시스템 내에서 법적 명확성과 규제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가상자산(Virtual Assets)’이라는 용어는 국제 금융기구의 자금세탁방지 정책과 관련된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며,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 금융 규제의 틀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각국의 금융 규제 방향을 파악하고, 디지털 자산 시장의 발전을 전망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국의 규제 혁신, 우리의 방향성을 제시하다
2025년 1월,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며 가상자산 정책의 구체화를 위한 행정명령을 발동했고, 이를 계기로 미국은 가상자산 제도화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규제 혁신 사례는 한국이 가상자산 시장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명확히 해야 함을 시사한다. 미국은 규제의 명확성이 디지털 자산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시장 발전과 금융 보호를 동시에 고려하는 균형 잡힌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2024년 5월 22일, 미국 하원은 H.R. 4763, ‘Financial Innovation and Technology for the 21st Century Act (FIT21)’을 통과시키며 디지털 자산 산업을 위한 역사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 FIT21은 미국 디지털 자산 시장의 명확한 규제 체계 확립, 소비자 보호 강화, 기술 혁신 촉진을 목표로 하며, 미국이 글로벌 디지털 자산 시장에서 혁신의 중심지로 남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안이다.
이 법안은 디지털 자산 시장의 규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투자자와 이용자가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강력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며, 미국의 금융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FIT21은 단순한 규제 강화를 넘어, 미국이 블록체인과 디지털 금융 기술을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적 기반을 제공한다.
지지금까지 미국의 디지털 자산 규제는 SEC(증권거래위원회)와 CFTC(상품선물거래위원회) 두 기관이 담당해 왔으나, 적용 방식이 일관되지 않고 복잡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일부 정책 입안자들은 기존 법률과 규제 체계만으로도 디지털 자산을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입안자들은 보다 명확한 규제 권한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왔다. FIT21이 법률로 최종 확정될 경우, 미국은 디지털 자산 규제에서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최초의 연방 차원의 법적 프레임워크를 갖추게 된다.
법안의 주용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CFTC와 SEC의 규제 권한 구분
FIT21은 디지털 자산 규제의 명확성을 확보하기 위해 CFTC와 SEC의 역할을 구분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CFTC는 ‘디지털 상품(Digital Commodities)’에 대한 규제 권한을 담당하며, 현물(spot) 시장에서의 거래를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SEC는 ‘투자계약 형태로 제공된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s as part of an Investment Contract)을 감독하며, 투자계약을 기반으로 발행된 디지털 자산의 2차 시장 거래를 허용하는 절차를 마련한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시장 참여자들은 자신이 거래하는 디지털 자산이 어떤 규제 기관의 감독을 받는지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강력한 소비자 보호 조치 도입
또한, FIT21은 디지털 자산 시장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정보 공개 및 자금 보호 조치를 도입했다. 디지털 자산 개발자는 프로젝트의 운영, 소유권, 구조와 관련된 투명한 정보를 공개할 의무를 가지며, 디지털 자산 거래소, 브로커, 딜러는 고객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고객 자금과 회사 자금을 분리하여 보관하는 자금 보호 체계를 강화하고, 등록 및 운영 요건을 준수하여 이해상충을 방지하는 조치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소비자들은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디지털 자산을 거래할 수 있으며, 시장 내 불공정 행위를 방지하는 강력한 보호 장치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3. 디지털 자산 프로젝트 보호 및 시장 활성화
FIT21은 단순한 규제 마련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 자산 프로젝트를 보호하고 시장을 활성화하는 역할도 한다. 디지털 자산 개발자들은 새로운 자금 조달 방안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시장 참여자들은 특정 디지털 자산 거래가 SEC 또는 CFTC의 규제를 받을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술 혁신과 투자 기회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디지털 자산 시장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다.
4. 명확한 등록 및 규제 프레임워크 마련
SEC와 CFTC 간 규제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여 중복 규제를 방지하는 것도 FIT21의 주요 내용 중 하나다. 디지털 자산 서비스 기관(거래소, 브로커 등)이 합법적으로 고객을 지원할 수 있도록 포괄적인 등록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규제의 일관성을 높이고 시장 참여자들이 보다 명확한 규제 체계 아래에서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미국의 규제 혁신이 주는 시사점: 한국의 대응 방향은?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위원장인 패트릭 맥헨리(Patrick McHenry)는 초당적 지지를 바탕으로 FIT21 법안이 통과했음을 밝히며, FIT21의 핵심이 규제 명확성과 소비자 보호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 혁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FIT21은 미국의 디지털 자산 생태계가 번창할 수 있도록 명확한 규제 체계와 강력한 소비자 보호 조치를 제공한다. 또한, 이 법안은 미국이 미래 금융 시스템을 주도하고 기술 혁신의 중심지로 남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
미국이 블록체인 기술과 디지털 금융 혁신을 선도할 수 있도록 FIT21과 같은 명확한 규제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최종적으로 법률로 제정될 경우, 미국 디지털 자산 산업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안전한 투자 환경을 조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기존의 모호한 규제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기업과 투자자들이 보다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며, 나아가 미국이 글로벌 디지털 자산 시장에서 확고한 리더십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미국 내 규제 개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상자산 시장을 둘러싼 국제적인 규제 환경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여전히 규제 불확실성으로 인해 산업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법제 정비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미국이 명확한 규제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투자자 보호와 시장 활성화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만큼, 한국 역시 이를 벤치마킹하여 글로벌 트렌드에 맞는 규제 혁신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2025년 2월 발표될 ‘법인의 가상자산시장 참여 로드맵’은 한국이 보다 체계적인 규제 개편을 통해 글로벌 디지털 자산 시장과 보조를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신호다. 하지만 여전히 법인의 전면적인 시장 참여 허용 여부, 외환·세제 개편, 자금세탁방지 기준 강화 등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 단순히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명확하고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 과제다.
한국이 가상자산 시장에서 혁신과 성장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규제를 "위험 회피의 수단"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글로벌 금융 질서가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는 가운데, 한국도 미국과 같은 규제 명확성의 원칙을 바탕으로 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 이제는 규제에서 혁신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며, 가상자산 산업이 금융 시장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규제 개편과 정책적 지원을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저작권자ⓒ META-X.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