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빠르지만, 법은 늘 늦는다'
새로운 기술이 나와도, 이를 허용할 법이 없으면 현실에선 ‘불법’이 된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를 운영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임시기준 제도’가 등장했다.
가상융합산업이 실험 단계를 넘어, 제도권 안에서 정식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샌드박스는 ‘허용’의 실험장… 그다음은 무엇이었을까?
규제 샌드박스는 기존 법령이 신기술과 충돌할 때, 일정 조건 하에 한시적으로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해주는 제도다. 드론을 활용한 비대면 물류배송, 자율주행차 시범 운행, 원격의료 서비스 등 법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기술이라도, 샌드박스를 통해 일정 기간, 제한된 환경에서 실증이 가능하도록 허용한다.
정부는 2019년부터 총리실 주도로 규제 샌드박스를 본격 운영해 왔다. 이는 ‘기술이 먼저 나오고, 법은 나중에 따라오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정책의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일종의 대응 장치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실증이 성공하더라도 정식 사업화로 이어지기 위해선 별도의 법령 개정 절차가 필수적이며, 이 과정에서 수년이 소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샌드박스의 규제 유예는 개별 기업에만 일시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산업 전반의 확산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신청과 승인 또한 건별 심사 중심으로 운영돼, 제도 전개 속도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샌드박스는 신기술에 ‘실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그쳤다. 산업화의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는 제도적 해법으로는 미완의 도구였던 셈이다. 이 같은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최근에는 샌드박스를 넘어서는 보다 진일보한 방식으로 ‘임시기준 제도’가 등장하고 있다.
‘임시기준’, 샌드박스를 넘어선 법적 진화
이러한 샌드박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정부는 2023년 「가상융합산업 발전 및 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이하 가상융합진흥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단순한 실증 실험을 넘어, 신기술을 제도 안으로 수용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새롭게 마련한 데 의의가 있다. 핵심은 바로 ‘임시기준(Temporary Standards)’ 제도의 도입이다.
임시기준이란, 기존 법령이 없거나 불명확해 기술 적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가 자체적으로 합리적 기준을 설정해 해당 기술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관리하는 제도다. 기존 규제를 일시 유예하는 샌드박스가 특례적 예외에 가깝다면, 임시기준은 제도권 내에서 정식으로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교로 기능한다.

임시기준 제도는 여러 면에서 샌드박스를 뛰어넘는 구조적 장점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이 제도는 총리실이 아닌 소관 부처 중심으로 운영되며, 가상융합산업의 경우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가상융합산업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판단을 내린다. 이에 따라 보다 현장 밀착형·전문성 기반의 기준 설정이 가능해졌다.
또한 임시기준은 특정 사업자에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 업종 내 모든 기업에 적용 가능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이는 산업 전반의 확산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해당 기준은 향후 법령이 개정되기 전까지 사실상의 ‘공식 가이드라인’ 역할을 수행하며, 규제 공백 상태에서도 기술이 사장되지 않고 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무엇보다 임시기준의 강점은 속도와 유연성이다. 법 개정이 수년을 요할 수 있는 반면, 임시기준은 수개월 단위로 마련될 수 있어 시장 수요와 기술 변화에 실시간으로 대응 가능하다.
결국, 임시기준 제도는 법의 부재로 인해 기술이 ‘불법’이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실용적 대응이자, 산업화로 가는 길목에서의 제도적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기술들이 ‘임시기준’을 통해 빛을 보았나?
가상융합진흥법이 시행된 이후, 임시기준 제도는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며 새로운 기술들이 제도권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 그동안 법적 근거가 없어 적용이 어려웠던 기술들이, 임시기준을 통해 실질적인 사회적 효용을 인정받고 활용 범위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XR(확장현실) 기반 교육훈련 콘텐츠다.
군사와 의료 분야에서는 정교한 가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감형 훈련을 진행할 수 있는 기술이 이미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지만, 기존 법령 체계에는 이를 정식 교육훈련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실습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시기준이 마련되면서 해당 콘텐츠는 교육 및 훈련 목적의 공식 콘텐츠로 채택될 수 있게 되었고, 현장 적용의 길이 열렸다.
또 다른 사례는 가상공간 내 산업안전 체험 서비스다.
산업 현장에서의 사고 예방을 위한 고위험 체험 콘텐츠들은 높은 교육 효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는 ‘게임물’로 분류되어 법적 제약을 받아왔다. 하지만 임시기준은 이러한 콘텐츠를 ‘교육 훈련 목적의 실감형 콘텐츠’로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기업 안전교육과 직업훈련 기관 등에서의 공식 활용이 가능해졌다. 이는 교육 콘텐츠 분류체계의 경직성을 넘어선 유의미한 변화로 평가된다.
세 번째로는 디지털 트윈 기반 재난 대응 훈련 시스템이 있다.
정밀한 가상환경을 구현해 소방, 지자체 등의 재난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이 시뮬레이션 기술은, 현실에서는 법적 인정의 부재로 인해 사업화가 어려웠던 대표적 기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임시기준 도입 이후 해당 시스템은 공공 프로젝트의 정식 훈련 도구로 채택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재난 대응의 효율성과 교육의 실효성 모두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임시기준 제도가 단지 규제를 유예하는 도구가 아닌, 새로운 기술의 사회적 수용성과 제도적 안착을 뒷받침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이 ‘기다려주는’ 시대에서, ‘따라가는’ 시대로
임시기준 제도의 가장 큰 가치는, 기술의 속도를 법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점에 있다.
기존에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복잡하고 느린 절차를 거쳐야 했다.
먼저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해 한시적으로 실증을 진행하고, 그 실증이 성공하면 정부와 국회를 설득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은 수년이 걸리기도 했고, 기술은 그 사이 발이 묶이기 일쑤였다.
임시기준은 이 같은 구조를 과감히 재설계했다.
“기술이 도착한 지금, 필요한 규범을 먼저 만든다”는 적극적인 접근을 통해, 제도는 더 이상 기술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행정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을 넘어, 스타트업에는 사업화의 시간, 연구자에게는 실험의 기회, 투자자에게는 정책적 확신을 제공하는 실질적 정책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임시기준은 ‘법이 기다려주는 시대’를 끝내고, ‘법이 기술을 따라가는 시대’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이는 가상융합 시대에 걸맞는 법제 혁신의 방향이기도 하다. 기술은 이미 움직이고 있고, 이제는 법도 그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
기술은 기다리지 않는다. 이제 법도 기다려선 안 된다
가상융합진흥법이 도입한 ‘임시기준’은 단순한 행정적 장치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미래 기술이 법의 부재로 인해 ‘불법’이 되는 상황을 방지하고, 제도적 공백을 메워주는 사회적 안전장치이자 정책적 약속이다.
나아가 이는 기존 샌드박스 제도의 한계를 넘어, 신기술이 정식 산업화로 나아갈 수 있는 제도적 출입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과제는 남아 있다. 임시기준이라는 틀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운영이 빠르고, 투명하며, 신뢰 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특정 기업이나 기술만을 위한 예외가 아닌, 산업 전반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공정하고 일관된 적용 체계가 필수적이다.
기술은 이미 한참 앞서 나가고 있다. 법이 그 뒤를 망설이며 따라가서는 안 된다.
이제는 법과 제도도 기술의 속도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따라가는 체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고, 기업의 기회를 확장하며, 나아가 산업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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