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베이=X] “데이터센터는 끝났다. 이제는 AI 팩토리의 시대다”
“A data center of the past.They are, in fact, AI factories.”
2025년 5월 19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 ‘COMPUTEX 2025’. 엔비디아(NVIDIA) CEO 젠슨 황은 무대 위에 올라 단 한 문장으로 산업의 판을 갈랐다. 그가 말한 ‘AI 팩토리’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미래 산업의 기본 단위를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그 발표는 상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대만’이라는 장소에서 이뤄졌다.
AI 팩토리를 움직이는 세 가지 핵심 기술
젠슨 황은 이날 연설에서 단지 개념만을 소개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새로운 시대를 가능하게 만들 세 가지 핵심 기술을 함께 공개했다. 바로 Grace Blackwell, NVLink Fusion, 그리고 Isaac Groot. 이 세 가지는 AI 팩토리를 구성하는 ‘두뇌’, ‘신경망’, ‘손과 발’에 해당하는 기술이다.
*Grace Blackwell – AI의 뇌
‘그레이스 블랙웰’은 GPU와 CPU를 하나로 결합한 NVIDIA의 최신 슈퍼칩이다. 이름은 컴퓨터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그레이스 호퍼와 데이비드 블랙웰에서 따왔다. 이 칩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처리하고, AI 모델을 학습하고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초당 1.4테라바이트(TB)의 데이터 처리 속도와 HBM3e라는 초고속 메모리가 결합돼, 복잡한 언어모델이나 영상모델도 빠르게 훈련시킬 수 있다. 젠슨 황은 이 칩이 “하루에 1조 개의 토큰을 처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GPT-5와 같은 초거대 AI 모델을 실제로 운영할 수 있는 수준이다.
*NVLink Fusion – AI의 신경망
하지만 칩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 팩토리에서는 수천 개의 Grace Blackwell 칩이 함께 연결돼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처럼 움직여야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바로 NVLink Fusion이다.
예전에는 여러 GPU를 연결하면 속도 저하나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나 NVLink Fusion은 이 문제를 해결했다. 모든 칩이 서로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마치 인간의 뇌에서 수많은 뉴런이 연결되어 정보를 처리하듯, AI 칩들이 하나의 거대한 AI 슈퍼컴퓨터로 작동하게 된다.
*Isaac Groot – 현실로 나오는 AI
마지막으로 소개된 기술은 Isaac Groot다.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기술은 AI가 디지털 세계를 넘어 물리 세계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쉽게 말해, 로봇이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운영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창고에서 물류를 옮기거나, 병원에서 약을 전달하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서빙하는 로봇이 있다면, 그 로봇들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판단하는 것이 바로 Isaac Groot다. 이 시스템은 AI 모델의 명령을 현실 세계의 행동으로 바꾸는 핵심 기술이며, 기존 시스템보다 훨씬 빠르고 직관적으로 로봇을 학습시킬 수 있다.
산업의 중심이 ‘연산’에서 ‘생산’으로 이동한다
젠슨 황은 이날 “앞으로 모든 기업이 자체 AI 팩토리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기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AI를 훈련시키고 적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미 제조, 금융, 교육, 의료, 콘텐츠 산업까지 AI를 핵심 생산 자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AI 팩토리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모든 산업의 공장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공장에는 새로운 과제가 따른다. AI 팩토리가 기존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많은 전기와 냉각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분명한 부담이다. 탄소 배출, 전력망 위협, 환경 규제 등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또한 GPU 공급이 여전히 글로벌 기업에 편중돼 있어, AI 인프라에 접근할 수 있는 국가와 기업 간 격차가 커지고 있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만큼, 이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게 만들고, 책임 있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
‘AI 주권’을 대만에 심다 – 신사옥 ‘엔비디아 콘스텔레이션’
젠슨 황은 이날 기조연설의 마지막 순간, 또 하나의 중요한 발표를 꺼내 들었다. 대만 타이베이 북부 베이터우(北投) 지역에 엔비디아의 새로운 대형 캠퍼스를 설립하겠다는 것이다. 신사옥의 이름은 ‘엔비디아 콘스텔레이션(NVIDIA Constellation)’, 직역하면 ‘별자리’다.
그는 “파트너십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으며, 대만 내 엔지니어 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기존 사무공간으로는 더 이상 감당이 어렵다”며 이번 프로젝트의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단순한 오피스 확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신사옥은 미국 실리콘밸리 본사(약 5만 제곱미터 규모)에 필적하는 거대한 AI 거점으로, 사실상 엔비디아의 아시아 AI 팩토리 본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이면에는 엔비디아가 대만에 'AI 주권의 근거지'를 세우겠다는 전략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황 CEO는 “AI 시대에 대만은 기술 생태계의 중심에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단지 칩을 생산하는 파운드리(Foundry) 차원을 넘어, AI 기술 개발, 모델 훈련, 물리적 인프라 운영까지 모든 과정을 대만에서 자체적으로 구축하고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선언은 최근 글로벌 기술 환경을 고려하면 더욱 의미가 크다. 미국과 중국 간의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있고, 반도체를 둘러싼 고율 관세, 공급망 불확실성, 지정학적 리스크는 글로벌 기업들에게 인프라 재배치 전략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결국 엔비디아는 생산시설은 물론 기술의 본부까지도 ‘탈중심화’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대만을 선택한 것이다. 이곳에서 AI 칩이 설계되고, AI 모델이 훈련되며, 로봇 플랫폼이 개발될 수 있는 ‘풀스택 AI 생태계’를 통째로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베이터우는 단순히 부지가 넓은 곳이 아니라, 대만 정부가 첨단 기술 기업의 거점을 유치하기 위해 제도적·세제적 인센티브를 집중하고 있는 전략지이기도 하다. 엔비디아의 결정은 대만 정부의 산업 정책과도 맞물려 있으며, 이는 향후 대만이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AI 기술을 생산하고 조율하는 국가적 플랫폼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강화한다.
즉, ‘엔비디아 콘스텔레이션’은 건물 이름을 넘어서, AI 산업의 권력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젠슨 황이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준비되어 있는가?
COMPUTEX 2025의 주 무대는 분명 ‘AI 팩토리’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전환의 흐름 속에서, 한국 기업들의 존재감은 비교적 조용하게 느껴졌다.
삼성디스플레이가 OLED 패널 전시를 통해 자사의 디스플레이 기술을 강조한 것은 의미 있는 행보였지만, 데이터와 연산을 중심으로 한 AI 인프라 전략, 특히 ‘팩토리화’라는 글로벌 전환 흐름과는 결이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기업들이 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주요 기업과 스타트업들은 이미 GPU 수급 불안정, 고성능 연산 자원의 공급 제약, 데이터 주권과 개인정보 규제 문제 등 여러 현실적인 장벽 속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일부 기업들은 자체 언어모델 개발, 클라우드 연산 최적화, 경량화된 AI 모델 도입 등 현실적인 해법을 실험 중이다. 그들의 고민은 작지 않으며, 기술 격차를 좁히기 위한 노력 또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 개별적인 시도들이 아직 국가적 산업 전략이나 생태계 구조로 명확히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AI 팩토리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 AI 학습에 필요한 고품질의 대규모 데이터셋
- 초거대 모델을 안정적으로 학습시킬 수 있는 국산 연산 인프라
- 연구와 운영이 함께 작동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모델 유지 체계
- 연산 자원을 운영하기 위한 탄소 중립적 전력·냉각 클러스터 설계
이 요소들이 각각 흩어져 있고, 기업·연구소·정부 간 협력이 구조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AI 팩토리’라는 완성형 모델로 나아가기 어렵다. 퍼즐은 존재하지만, 아직 맞춰지지 않은 셈이다.
더 근본적인 위험은 ‘의존 구조’에 있다. 지금처럼 미국, 대만, 혹은 중국 등 해외 AI 인프라 기업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가 고착된다면, 한국은 AI 모델을 스스로 학습하고 배포하는 주권을 상실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기술은 단순히 개발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에서 훈련되었는가,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배포하는가, 이 권한의 문제는 미래 산업의 통제권과 직결된다.
데이터는 한국에서 수집되지만, 연산은 외부에서 이뤄지고, 결과물은 다시 한국 시장에 유통되는 이 구조는 디지털 경제의 관점에서 ‘생산력의 외주화’를 뜻할 수도 있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할 때다.
"우리는 단지 AI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AI를 ‘생산’하고 ‘배포’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한국 기업들이 조용히 고민하며 축적해온 기술력은 분명 의미 있는 자산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축적된 가능성을 하나의 전략으로 연결하고, AI 팩토리를 설계할 수 있는 국가적 결단과 투자다.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아직 가능하다.
AI는 이제 '코드'가 아니라 '공장'이다
젠슨 황은 언제나 기술의 변곡점을 먼저 감지해온 인물이다. 그가 이번 COMPUTEX 2025 무대에서 던진 메시지는 단순한 신기술 소개가 아니었다. 그의 말은 산업의 본질을 다시 묻는 선언이었다.
더 이상 AI는 ‘코드를 짜는 기술’이 아니다. 이제 AI는 데이터를 넣고, 연산을 돌리고, 지능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그리고 경쟁의 중심은 ‘누가 더 좋은 AI를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그 AI를 만들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로 이동했다.
‘AI 팩토리’는 단순한 데이터센터의 확장이 아니다. 그것은 AI를 산업의 중심에 두고, 그 위에 모든 가치사슬을 재편하는 새로운 구조다. 제조업이 공장을 통해 세계를 바꿨듯, 앞으로는 AI 팩토리를 가진 자가 산업의 미래를 설계할 것이다.
이제 질문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우리는 AI 팩토리를 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공장은 누구의 것이며,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은 더는 미래형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기업과 국가가 답을 써내려가고 있다. 우리의 답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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