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와 TSMC는 지난 10여 년간 반도체 산업의 황금기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팹리스–파운드리’ 파트너십이었다. 엔비디아는 설계에, TSMC는 제조에 특화된 구조로, 양사는 GPU 및 AI 칩 시장을 선도하며 서로의 성장을 견인해왔다.
하지만 2025년, 양사 관계는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엔비디아가 발표한 ‘미국 내 AI 슈퍼컴퓨터 완전 자체 제조’ 계획은 기존 공급망의 위계를 뒤흔드는 전환점이자, 기술 주도권을 둘러싼 새로운 긴장의 서막이다.
AI 수요 폭증 속에서 전통적 반도체 공급망의 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팹리스와 최대 파운드리 간의 관계는 이제 단순한 ‘위탁 생산’이 아닌, 기술 주도권과 공급망 통제권을 둘러싼 치열한 전략 게임으로 진입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미국 내 제조 전환 선언
2025년 4월, 엔비디아는 자사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내에서 완전한 AI 슈퍼컴퓨터를 자체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TSMC는 여전히 ‘블랙웰(Blackwell)’ 칩의 생산을 담당하지만, 생산 거점은 애리조나에 있는 TSMC 미국 공장으로 전환되었고, 패키징과 테스트는 앰코와 SPIL, 조립은 폭스콘과 위스트론이 맡는 등 공급망의 분산 및 다극화가 명확해지고 있다.
2025년 4월 14일, 엔비디아는 블랙웰(Blackwell) 칩 생산을 애리조나 TSMC 공장에서 시작했다고 밝히며, AI 슈퍼컴퓨터 완제품까지 미국 내에서 전 공정을 수행할 것이라 발표했다. 조립과 테스트는 각각 폭스콘과 위스트론, 앰코와 SPIL이 담당하며, 엔비디아는 사실상 독자적인 미국형 AI 생산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드러냈다. 이는 단순한 생산지 이전이 아니라, 설계사였던 엔비디아가 제조의 일부를 직접 통제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움직임이 공급망 내 ‘힘의 중심’을 바꾸는 신호라고 분석한다.
과거에는 TSMC가 기술력과 생산 역량을 앞세워 고객사 위에 군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AI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반도체가 ‘경제 안보’ 이슈로 격상되면서 설계사의 위상이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처럼 자체적인 AI 팩토리 비전을 가진 기업은 더 이상 제조를 외주화하는 소비자가 아닌, 제조 방식까지 설계하는 전략 파트너로 변모하고 있다.

관계 구조 변화는 세 가지 가능성으로 전망된다.
첫째, 양사가 미국 내에서 손을 맞잡고 전략적 동맹을 강화하는 시나리오다. TSMC는 애리조나 공장을 엔비디아 중심으로 특화하고, 양사는 AI 전용 생산 라인을 구축한다. 이는 공급망의 안정성과 리스크 분산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식이다.
둘째, 엔비디아가 점진적으로 TSMC 의존도를 줄이며 수직계열화를 강화하는 방향이다. 이미 패키징과 조립은 다른 파트너사와 분산했고, 향후 제조의 일부도 자체적으로 흡수하거나 새로운 파운드리 파트너를 육성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경우, 엔비디아는 팹리스에서 팹리스+인프라 기업으로 확장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셋째, 공급망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 수 있다. 애플, AMD, 인텔 등도 TSMC의 핵심 고객인 만큼, AI 칩 우선 배정이나 공정 기술 접근을 두고 조율이 어려워질 수 있다. TSMC 입장에서는 특정 고객에 지나치게 종속되는 구조를 경계할 수밖에 없고, 엔비디아는 AI 시대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독자적인 제조 통제를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술적인 이슈를 넘어 지정학적 맥락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및 AI 산업의 자립화를 강조하며 자국 내 생산을 유도하고 있고, 엔비디아의 제조 내재화는 이에 정면으로 부합한다.
반면, TSMC의 본사는 여전히 대만에 있으며, 미중 갈등 속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는 여전히 존재한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TSMC에 대한 절대 의존을 줄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필요해진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엔비디아와 TSMC의 관계는 단순히 기술적 효율을 넘어, AI 산업의 권력 지형을 가르는 축으로 진화하고 있다. 설계사가 공급망의 설계자까지 되려는 흐름, 제조사가 고객 포트폴리오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맞물리는 이 구조는 한편의 전략 게임과 같다.
이들은 앞으로도 협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 협력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 될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AI 시대, 공급망은 수직계열화로 이동 중
AI 산업의 급격한 팽창은 반도체 공급망의 구조 자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오랜 시간 업계의 기본 틀로 작동해온 ‘팹리스–파운드리’ 모델, 즉 설계는 팹리스 기업이 하고, 제조는 TSMC와 같은 파운드리 기업이 수행하는 분업 구조가 AI 중심 산업에서는 점점 한계에 직면하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수요 예측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생산 병목 현상이 빈번해지고 있다.
특히 대규모 병렬 연산을 요구하는 AI 칩은 고난도 공정과 정밀한 공급 타이밍이 필수인데, 예측이 어긋날 경우 전체 생산라인의 가동률과 납기 일정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단일 공급자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는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
엔비디아, 애플, AMD 등 글로벌 기업 다수가 TSMC에 의존하는 구조는 공급 우선순위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만약 한 쪽에 문제가 생길 경우 전체 AI 산업 생태계가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구조다.
지정학적 불안정성 역시 결정적인 변수다. 특히 TSMC 본사가 위치한 대만은 미중 갈등의 중심에 서 있으며, ‘대만 해협 변수’는 실제 공급망 차단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AI 시대는 기술의 속도와 유연성이 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 그러나 기존 파운드리 모델은 기술 공동 진화보다는 공급 안정성과 효율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고속으로 진화하는 AI 산업의 수요를 충족하기엔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많은 글로벌 AI 기업들이 수직계열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엔비디아다.
과거 단순한 반도체 설계사였던 엔비디아는 이제 자사의 AI 칩을 설계할 뿐 아니라, 패키징·조립·테스트는 물론 AI 슈퍼컴퓨터 공장 운영까지 직접 참여하며 ‘AI 인프라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설계에서 제조, 나아가 공장 설계 및 운영까지 수직으로 통합해가는 흐름은 AI 생태계 내에서의 통제력을 높이는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TSMC 역시 기존 고객 중심의 제조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AI 공정 기술의 주권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고도화된 3나노 이하 공정과 칩렛 패키징 기술을 무기로 AI 팩토리에 특화된 제조 역량을 키우고 있으나, 특정 고객(예: 애플, 엔비디아 등)에 대한 과도한 종속은 향후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고도 제기된다.
결국, AI 산업에서의 경쟁력은 더 이상 기술의 정교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설계하고, 누가 제조하며, 어느 나라에서 어떤 속도로 만들어지는가, 이 모든 과정이 산업 주도권을 결정짓는 핵심이 되고 있다.
파운드리 중심의 분업 구조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위에 새롭게 형성되는 수직계열화와 자국 제조 전략이 앞으로의 AI 시대 공급망의 판을 바꿀 것으로 전망된다.
[저작권자ⓒ META-X.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