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력 아닌 인재 쟁탈전… “지식전쟁의 전선은 사람이다”
대만 법무부 조사국은 최근 중국 반도체 위탁생산기업 SMIC(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를 포함한 중국계 기술 기업 11곳은, 위장 회사를 활용해 대만 반도체 기술 인력을 조직적으로 유출하려 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발표했다.

문제가 된 위장 기업은 사모아(Samoa)에 법인 등록된 페이퍼 컴퍼니 형태로 운영되며, 대만 신주(Hsinchu)에 사무소를 차리고 현지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은밀한 스카우트를 진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지역은 TSMC 본사가 위치한 대만 반도체 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기술 유출 위험이 특히 높은 지역이다.
대만 수사당국은 이와 관련해 34곳에 대한 압수수색과 90명에 대한 면담을 진행했으며, 2020년 이후 유사 사건만 100건 이상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 ‘장비보다 인력’에 집중하는 중국의 반도체 전략
SMIC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중국 내 최대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다. 미국의 수출 통제로 인해 최첨단 노광 장비(ASML, EUV 등) 확보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기술 인력 유치가 유일한 우회로로 떠오른 것이다.
TSMC와 UMC 등 대만 기업 출신 엔지니어들은 미세공정 기술, 공정자동화 시스템, 공급망 운영 노하우 등 핵심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직은 곧 기술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
■ 글로벌 인재 쟁탈전 가속화
세계 각국이 반도체 자국화 전략을 강화하면서, 인재 확보 경쟁이 장비 투자보다 중요한 전략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대만은 전체 GDP의 약 15% 이상이 반도체 산업에서 발생할 만큼, 국가 차원의 전략산업으로 기능하고 있어 기술 유출은 곧 국가 경쟁력 약화를 의미한다.
중국은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차단에 대응하기 위해 국산화 + 인재 흡수 전략을 병행하고 있으며, 해외 유수 대학 졸업생 및 기술직 인력 스카우트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 ‘인재 이적’은 합법인가, 안보 위협인가
이번 사건은 단순한 채용 문제가 아닌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인식된다.
대만은 2020년 개정된 국가안전법을 근거로 핵심 기술의 불법 유출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번 SMIC 사례는 향후 더 강력한 처벌과 규제 강화로 이어질 전망이다.
중국 기업들은 통상 “개인 이직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사모아를 통한 페이퍼컴퍼니, 은밀한 채용 사무소 운영 등의 정황은 계획적 유출 시도로 해석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는 ‘인재 라인전’이 펼쳐지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도 자국 반도체 인력을 보호하거나 확보하기 위해 반도체 교육 강화, 기술 인재 비자 제도 도입, 기술보호법 강화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대만의 사례는 선제적 대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국경 없는 채용 시장 vs 기술 안보의 경계선
기술 산업은 본질적으로 글로벌 인재를 필요로 하지만, 첨단기술이 국가경쟁력과 결합될 때, 인재 유출은 곧 기술 주권 침해로 간주된다.
국제무역연구원(2022)은 보고서에서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될수록, 인재 확보는 장비보다 장기적 효과가 크다”고 분석했다.
미국 GAO 보고서(2023)에서는 “중국의 기술 인재 스카우트는 단순한 HR 행위가 아닌 국가 전략”이라고 명시하고, 관련 대응 체계 마련을 강조했다.
독일 프라운호퍼 연구소도 최근 보고서에서 “인재 유출은 장비 수출 통제보다 더 민감한 이슈로, 유럽 기업의 방어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고 경고했다.
■ 각국의 대응 전망
- 대만: 기술보호법 추가 개정 가능성
국가안전법을 넘어, 기술보호 전문법 제정과 반도체 인력 수출 통제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 중국: 인재 확보 위한 우회 전략 지속될 것
장비 수입의 어려움이 지속되는 한, 고급 엔지니어 영입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홍콩, 동남아 등 제3국을 통한 우회 채용이 증가할 수 있다.
- 미국 및 서방 국가: 공조 필요성 확대
미국과 유럽은 대만 사례를 주시하며 기술 유출 대응 전략 재정비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국제 협력 하의 기술 인력 보호 체계 논의가 본격화될 수 있다.
- 글로벌 기업들: 내부 정보 보호 강화 필요
TSMC, ASML, Intel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은 내부 인력의 유출 리스크에 대비한 사전 교육, 정보 접근 통제, 비밀유지계약(NDA) 강화 등을 필수적으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SMIC와 사모아 위장 기업을 통한 기술 인력 유출 사건은, 기술 패권 경쟁이 장비나 소재를 넘어 ‘사람’을 둘러싼 전쟁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채용 문제가 아닌, 국가 안보와 산업 주권의 경계를 시험하는 사안이다.
이번 대만의 대응은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 전체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기술은 사람이 만든다. 기술 유출의 시작은 결국 사람의 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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