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언어가 되다.
가장 빠른 성장, 가장 비싸게 거절된 이름
2025년 여름, 피그마(Figma)가 마침내 뉴욕 증시에 상장했다.

공모가는 주당 33달러였지만, 상장 첫날 주가는 115달러까지 치솟았다. 단숨에 기업가치는 600억 달러를 넘어섰고, 불과 10년 전 실리콘밸리의 작은 공유오피스에서 시작한 이 디자인 툴 스타트업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술 플랫폼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IPO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주가 상승 때문만은 아니다. 피그마는 불과 2년 전, Adobe의 200억 달러 인수 제안을 규제 당국의 개입으로 무산시키며 "디자인 산업의 독점에 맞선 스타트업"이라는 서사를 만든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피그마는 독립적인 상장을 성공시켰고, 시장은 오히려 그들의 가치를 인수 제안보다 더 높게 평가했다.
피그마는 무엇인가: 브라우저 위에서 태어난 협업 도구
피그마(Figma)는 2016년 정식 출시된 웹 기반 인터페이스 디자인 툴이다.
기존의 디자인 툴들이 무거운 설치형 소프트웨어에 의존했다면, 피그마는 브라우저만 열면 언제 어디서든 디자인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실시간 클라우드 협업 툴을 지향했다.
그 철학은 구글 독스를 연상시키는 실시간 동시 작업성과 협업 기능으로 구현되었다. 디자이너, 기획자, 개발자 모두가 같은 화면 위에서 디자인을 편집하고, 코멘트를 달고, 피드백을 즉시 반영할 수 있는 구조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초기에는 스타트업과 개발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졌고, 프로덕트 중심 조직에서의 민첩한 협업 니즈와 맞물려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후 Spotify, Dropbox, Netflix 등 글로벌 기업들이 빠르게 도입하면서, 피그마는 단순한 UI 툴을 넘어 ‘디지털 프로덕트 협업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2023년에는 자체 코드 컴포넌트 관리 기능인 ‘Variables’, 인터랙션 테스트 기능, 버전 히스토리, 자동화된 디자인 시스템 연동 기능 등을 잇따라 도입하며 엔터프라이즈급 워크플로우까지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브레인스토밍 도구인 FigJam, Slide, Buzz 등의 기능을 추가하며 다양한 플러그인 생태계, 코드 핸드오프 기능까지 갖춘 풀스택 ‘디자인 시스템 플랫폼’으로 진화 중이다.
피그마 vs 어도비: 두 플랫폼의 철학 차이, 그리고 역전의 시간
2022년 9월, Adobe는 Figma를 20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는 Adobe 역사상 가장 큰 인수였으며, 전통적인 크리에이티브 소프트웨어 시장과 SaaS 협업 툴 시장의 빅 테크-스타트업 통합 사례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Adobe는 Illustrator, Photoshop, XD 등의 제품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고, 피그마의 빠른 성장세가 자체 툴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보다는 통합을 택한 결정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업계 반응은 엇갈렸다.
피그마는 브라우저 기반의 경량 툴이자 협업 중심의 구조를 바탕으로, 스타트업과 신생 개발 조직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디자이너만을 위한 툴이 아니라, 팀 전체가 함께 쓰는 플랫폼”이라는 철학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반면 Adobe는 여전히 전문가 중심, 무거운 데스크탑 기반 툴에 의존한 구조였다.
이 둘의 합병은 단순한 M&A가 아니라, 플랫폼 철학 간 충돌로 인식되었고, 커뮤니티에서는 “피그마가 Adobe의 하위 툴로 흡수되어 본래의 정체성을 잃을 것”이라는 우려가 급속히 확산됐다.
2023년 초, 미국 FTC(연방거래위원회)는 이 인수가 디자인 툴 시장의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독점 심사에 착수했다. Figma가 Adobe XD의 명백한 경쟁자이며, 특히 교육·스타트업 시장에서 혁신의 촉진자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었다.
유럽과 영국의 규제 당국도 공조에 나서면서 인수 절차는 장기화됐고, 2023년 말, 결국 Adobe와 Figma는 자발적으로 인수 계획을 철회한다. 이는 기술 산업에서 규제 당국이 플랫폼 경쟁 구도를 실질적으로 바꿔낸 보기 드문 사례로 남게 된다.

놀라운 건 그 이후였다. Figma는 자체 기능 고도화, AI 통합, 엔터프라이즈 시장 확대, 디자인 시스템 중심의 플랫폼화 전략을 잇따라 실행하며 독립적으로 성장했고, 2025년 7월 31일, 상장 첫날 시가총액은 60B 달러를 넘어서며 Adobe의 인수 제안가를 훌쩍 뛰어넘는 성과를 기록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지 기업 간의 인수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플랫폼 시대에 어떤 철학이 더 빠르게 성장하고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가, 그리고 디자인 툴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기도 했다.
피그마는 ‘툴’이 아니라 ‘방식’이 되었고, Adobe는 경쟁자를 흡수하지 못한 대가로 시대의 리듬을 놓친 셈이 되었다.
피그마, 하나의 언어가 되다.
피그마의 성공은 단지 새로운 디자인 툴의 부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기술이 어떻게 더 열려 있고, 더 가볍고, 더 협업 중심일 때 시장과 사용자로부터 선택받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플랫폼 철학의 승리였다.
빠르고, 어디서나 접속 가능하며, 실시간으로 함께 만들 수 있는 도구—이것은 디자이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조직이 창의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 경험의 구조였다.
피그마는 결과물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과정’ 자체를 기술화한 플랫폼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디자인은 더 이상 특정 전문가의 영역이 아닌, 협업과 소통, 구조화된 사고의 언어로 확장되었다.
오늘날 피그마는 단순한 기능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협업의 새로운 문법이자, 일하는 방식의 공용어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피그마는 툴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협업과 창작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언어다.
[METAX = 김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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