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베이=X] 5월 20일 오전 9시(현지 시각), 대만 타이베이 난강전시장역 앞.
이른 아침부터 역 주변은 분주했다.
각국에서 모여든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가방을 멘 채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는 사람들 사이로 ‘COMPUTEX 2025’ 로고가 새겨진 배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IT 박람회, 컴퓨텍스(COMPUTEX)가 다시 열리는 날이다.
마지막으로 이 전시회를 찾은 건 2010년.
그때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에 막 공세를 강화하던 시기였고, 나는 전시장 한쪽에서 받았던 반도체 회로도 인쇄물을 여전히 기억한다. 정교하게 설계된 칩의 도식이 A4 용지 위에 얹혀 있었고, 그걸 보며 ‘이런 기술을 직접 눈앞에서 본다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겠지’ 하고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다시 이 전시장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감회였다.
![[대만 타이베이=X] COMPUTEX 2025 전시관 앞](https://metax.kr/news/data/2025/05/20/p1065605546215990_733_thum.jpg)
이번 컴퓨텍스 2025는 그 사이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전 세계 34개국, 1,400개 전시 업체가 참가해 아시아 최대,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하드웨어 기반 IT 전시회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단순한 부품 전시가 아닌, 데이터센터, AI 서버, 로봇 시스템, AR·VR, 스마트시티 플랫폼까지 망라하는 기술의 총집합이 된 것이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내 기억 속 그때의 컴퓨텍스를, 지금은 얼마나 뛰어넘었을까?’
전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그런 궁금함과 설렘이 묻어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다시 찾은 이가 골목 풍경을 살피듯, 나 또한 기술의 풍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하나하나 눈에 담기 시작했다.
![[대만 타이베이=X] COMPUTEX 2025 전시관](https://metax.kr/news/data/2025/05/20/p1065605546215990_582_thum.jpg)
화려함과 단조로움 사이: 두 개의 전시장, 다른 얼굴
컴퓨텍스 2025는 난강전시장 1홀과 2홀, 두 공간에서 나뉘어 진행됐다. 하지만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직후, 마음속에 맴돈 문장은 이것이었다.
“CES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기대가 크면 실망도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그간의 기술 트렌드를 바탕으로 머릿속에 그려왔던 ‘화려하고 압도적인 기술 쇼’는 생각보다 담백했고, 오히려 낯선 침묵과 일관된 톤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쩌면 그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던 탓일지도 모른다.
특히 1홀 전시장은 하드웨어 중심의 전시 부스들로 빽빽했다. CPU, GPU, 메인보드, 팬, 라우터, 케이스. 산업의 뼈대를 구성하는 이 장비들이 일렬로, 그리고 일정한 형식 안에서 반복적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기술을 잘 아는 이들에겐 익숙한 풍경일 수 있다. 하지만 관람객 모두가 엔지니어나 개발자는 아니다. 기술을 조금 아는 사람에겐 ‘다 비슷비슷한 장비들의 나열’처럼 느껴질 수 있었고, 기술을 잘 모르는 이들에겐 아예 ‘해석되지 않는 풍경’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술의 진화만큼 중요한 건, 그 기술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문법’의 진화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AI 없는 전시는 없다 — 그러나 설명은 어디에
이제 어떤 전시장이든 ‘AI’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는다. 컴퓨텍스 2025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부스가 AI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고, 로고 위에는 ‘AI Powered’, 제품 소개에는 ‘AI’라는 문구가 자연스럽게 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 ‘AI’는 대부분 하드웨어 기반 AI에 머물러 있었다. 서버, GPU, 칩셋, 냉각장치, 연산 모듈 등.
AI 기술 자체보다는 AI가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기초 인프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요즘 전시회장을 돌 때마다 느끼는 건 하나다. AI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쓰이고 있다는 사실. AI를 붙이지 않으면 관심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은 이해하지만, 그 의미에 대한 설명 없이 그저 ‘붙여넣기’식으로 사용되는 AI는 결국 기술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예전의 ‘메타버스’가 그랬다.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메타버스'란 단어만 남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단어는 유행이 되기도 전에 ‘거품’이 되었고,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지금 AI 전시에서 느끼는 이 묘한 피로감은, 그때의 메타버스를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에서 가장 아쉬웠던 건 설명의 부재였다.
이 제품이 정확히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기술이 적용됐는지, 왜 이 기술이 특별한지에 대한 안내는 거의 없었다.
어떤 부스는 마치 ‘설명서를 잃어버린 컴퓨터 수리점’ 같았다.
제품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주변에 선 직원들은 수동적이었다. 간단한 질문에도 적극적으로 답하지 않거나, 단순한 스펙 나열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설명 없는 전시’가 관람객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략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관람객이 그 기술을 해석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단서는 제공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략이 아닌 방치, 전시가 아닌 진열에 불과하다.
기획의 승부, 부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모든 부스가 그렇게 단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브랜드는 전시 공간 자체를 ‘설명 없는 진열’이 아닌, 브랜드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대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그 중 단연 돋보였던 곳은 기가바이트(Gigabyte)였다. 입구부터 압도적인 크기의 구조물을 세우고, 2층에는 마치 전시관 안에 또 다른 건축물을 세운 듯한 큐브형 공간을 조성했다. 관람객들은 그 안에 들어가 제품을 만져보고, 영상을 체험하고, 브랜드가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와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작은 세계. 기획의 정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시였다.
![[대만 타이베이=X] COMPUTEX 2025 기가바이트 전시관](https://metax.kr/news/data/2025/05/20/p1065605546215990_722_thum.jpg)
이처럼 관람객의 관심을 끌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려면, 단순히 제품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제품이 왜 필요한지,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경쟁사와 무엇이 다른지, 기술이 어떤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지를 전시 자체가 말해줘야 한다.
오늘날 AI는 기술의 중심축이자 모든 산업의 화두다. 그러나 AI라는 키워드를 걸어두고, 관람객이 스스로 의미를 찾아주길 바라는 전시 방식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컴퓨텍스 2025는 전 세계 기술 산업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귀한 무대다. 하지만 이 전시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술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이 필요하다.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불친절한 응대는, 이 기회를 놓치는 실수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전시의 성공은 결국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기술을 잘 모르는 이에게도 기술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전시는 말이 없지만, 기획이 곧 언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는 누구에게나 읽히고, 느껴져야 한다.
컴퓨텍스는 1981년 시작해 대만의 기술 산업 성장과 궤를 함께 해왔다. 초기에는 OEM·부품 중심의 박람회였지만, 이제는 글로벌 반도체, AI 인프라, 데이터센터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는 B2B 중심 행사로 진화했다.
하지만 그 진화가 관람객의 시선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전시는 단지 기술자들만의 행사로 끝날지도 모른다.
![[대만 타이베이=X] COMPUTEX 2025 전시관 전경](https://metax.kr/news/data/2025/05/20/p1065605546215990_464_thum.jpg)
마무리하며
15년 만에 다시 찾은 대만 컴퓨텍스.
분명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화했다. AI, 반도체, 로봇, 센서, 네트워크 인프라… 단어만 나열해도 무게감 있는 기술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술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전시의 본질적인 질문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제 필요한 건 기술의 나열이 아니라, 기술이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전시 같았다.
AI라는 거대한 흐름을 그저 ‘트렌드’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어떻게 우리 삶에 닿는지를 설명 가능한 형태로 제시하는 시도랄까.
그리고 이 고민은 컴퓨텍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국내외 전시장을 다니다 보면 비슷한 감정이 든다.
적게는 800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
그런 큰 비용과 노력을 들여 출사표를 던졌을 텐데, 막상 그 부스에 서 있는 사람의 태도, 기획된 공간의 메시지는 너무도 제한적이다.
기술 전시는 결국 사람을 설득하는 작업이다. 스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 기술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하는 것.
기술이 아무리 빠르게 진화해도, 사람의 이해와 공감 없이는 그 기술은 구매자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컴퓨텍스 2025, 그 거대한 무대 위에서 가장 필요한 건 ‘기술을 말하는 사람의 언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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