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토론토에서 열린 글로벌 블록체인 행사 ‘Consensus 2025’에서 데이비드 S. 고이어는 단순한 SF 신작을 공개한 것이 아니었다. ‘Emergence’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이야기 창작의 주도권을 산업 중심에서 팬과 커뮤니티 중심으로 이동시키려는 본격적인 실험이자, AI와 블록체인 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창작경제 모델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SF 세계관을 플랫폼 위에 올리다: ‘Emergence’ 프로젝트의 정체
데이비드 고이어는 ‘다크 나이트’, ‘맨 오브 스틸’ 등 블록버스터의 스토리 개발과 각본을 써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영화관이 아닌 블록체인 플랫폼을 무대로 삼았다.
‘Emergence’는 Incention이라는 Web3 창작 플랫폼 위에서 진행되는 대형 트랜스미디어 프로젝트로, 소설, 게임, 애니메이션, 팟캐스트 등 다양한 형태로 확장 가능한 세계관을 기초로 한다.
고이어는 직접 2,500페이지 분량의 세계관 바이블을 작성하고, AI 캐릭터 ‘Atlas’를 훈련시켰다.
Atlas는 세계관에 대한 지식 기반을 제공하며, 커뮤니티 참여자들이 이 설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캐릭터, 이야기, 시나리오를 창작하도록 돕는다. 사용자는 이 과정에서 단순한 팬이 아니라, 하나의 IP 창작자로 인정받으며, 자신의 아이디어가 공식 스토리에 채택될 경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지적재산권을 코드화하다: ‘Story Protocol’의 역할
이 거대한 창작 실험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Story Protocol이다.
2023년 설립된 이 플랫폼은 Andreessen Horowitz(a16z), Hashed, Endeavor 등의 글로벌 VC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주목받았다. Story Protocol은 창작물의 온체인 등록, 변경 이력 추적, 2차 창작 권리 구분, 자동 로열티 분배 등 지적재산권(IP) 관리의 모든 과정을 스마트컨트랙트로 구현한다.
특히 생성형 AI가 콘텐츠를 대량 생산하는 시대에, Story Protocol은 “창작자의 기여를 증명하고 보상하는 투명한 시스템”을 제공하겠다는 비전을 내세운다. 공동 창업자 이승윤은 이를 “기계가 만든 콘텐츠도 투명하게 출처를 밝히고, 기여에 따라 보상을 나누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기존 미디어 질서에 던지는 도전: 팬이 창작자가 되는 구조적 전환
고이어는 현재의 미디어 산업 구조가 팬을 배제하고 창작을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이라고 비판한다. 디즈니, 넷플릭스, 워너브라더스 같은 기업들이 기획부터 제작, 배급, 머천다이징까지 독점하는 구조 속에서 팬은 단지 ‘소비자’일 뿐이다.
그러나 Emergence는 이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사용자는 캐릭터, 스토리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커뮤니티 투표와 에디토리얼 보드의 심사를 거쳐 공식 설정으로 편입될 수 있다. 이후 이 아이디어가 콘텐츠로 확장되면, 수익은 미리 정의된 스마트컨트랙트에 따라 기여자에게 자동 분배된다. IP 업데이트와 로열티 조정도 거버넌스 토큰을 통해 공동 의사결정으로 이뤄진다.
즉, 창작→소유→수익이 하나로 연결된 생태계 속에서 팬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실질적인 ‘참여 자산 보유자’가 된다. 이는 기존 미디어 경제가 상상하지 못했던 수평적 창작모델의 출현이다.
서사경제의 진화: AI 기반 집단 창작과 새로운 산업 모델
Emergence가 보여주는 미래는 단순한 플랫폼이 아니다. 그것은 ‘서사경제’(Narrative Economy)의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실험장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IP가 온체인에 등록되고, AI가 창작을 도우며, 참여자의 기여가 자동으로 수익과 연결되는 이 모델은 기존의 제작-소비 구조를 뛰어넘는다.
특히 이 모델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전환점을 제공한다.
첫째, IP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개방형 구조로 등록된다. 둘째, 생성형 AI를 통해 빠르고 다양한 콘텐츠 제작이 가능해진다. 셋째, 모든 기여가 블록체인에 기록되어 공정한 보상 체계를 형성한다.
이 세 가지 축이 맞물릴 때, Emergence는 “IP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새로운 콘텐츠 생산 체계를 여는 셈이다.
Emergence는 ‘이야기의 인터넷’을 만들 수 있을까
지금까지 IP는 법인과 대기업의 자산이었다. 그러나 Emergence는 그것을 블록체인 위에 올려 누구나 기여하고 소유할 수 있는 디지털 공유 자산으로 바꾸려 한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단지 새로운 SF 시리즈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콘텐츠 제작과 수익 분배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AI와 Web3 기술은 이야기의 창작 주체를 산업에서 커뮤니티로,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앞으로 Emergence와 Story Protocol의 확장이 실제 거버넌스 운영, 크로스체인 지원, 스토리지 시스템까지 진화할 경우, 이 구조는 단발성 프로젝트를 넘어 미디어 산업 전반을 흔드는 ‘이야기의 인터넷’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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