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뉴스의 ‘기상 특보’였던 이상 기후는 이제 일상적 풍경이 됐다.
유럽의 기록적인 폭염, 남미를 마른 땅으로 만든 가뭄, 아시아에 상처를 남긴 연이은 초강력 태풍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기후 변화는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 속도 또한 상상 이상이다. 산업화 이후 1.2도 상승한 지구의 평균 기온은 곧 1.5도의 임계점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으며, 이는 해수면 상승, 생물 다양성 붕괴, 기후 재난의 빈도 증가라는 도미노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한다.
문제는 명확하다. 시간이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십 년간 정부, 국제기구, 민간 기업이 기후 대응을 위해 온실가스 감축 정책, 친환경 기술, 탄소 배출권 거래제 등 다양한 시도를 이어왔지만, 대응 속도는 늦었고, 규모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지금, 이 절박한 국면에서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도구가 주목받고 있다.
AI는 아직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 열쇠는 아니다. 하지만 기후 위기의 복잡성과 데이터의 방대함 앞에서, AI는 우리가 그 어떤 기술보다 빠르고 정밀하게 ‘지구의 비명을 해석할 수 있는 도구’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질문은 달라졌다. AI는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가 아니라, 우리는 이 기술을 얼마나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로 바뀌고 있다.
AI는 기후 대응의 만능 키일까?
AI는 기후 위기의 마법 같은 해결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신속하게 문제를 진단하고 예측하는 도구로서 그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위성 이미지 판독, 탄소 흡수량 분석, 기상 예측 등은 사람의 눈과 손에 의존한 수작업으로 진행되어 왔다. 방대한 데이터를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예측 정확도 또한 떨어졌다. 그러나 AI는 이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통찰을 끌어내는 능력을 갖추면서, 기후 분석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예컨대, AI는 날씨 패턴을 분석해 태양광 발전량을 미리 예측하고, 전력망의 흐름을 분석해 비효율적인 에너지 소비 구조를 찾아내며, 극지방의 해빙 면적을 모니터링하여 정확한 해수면 상승 예측 모델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AI는 더 이상 단순한 분석 툴이 아니라 지구 환경을 해석하는 '디지털 감각 기관'이자 예측 기계로 진화하고 있다.
위기의 복잡성에 맞서 싸우기 위한 가장 똑똑한 도구, AI는 지금, 그렇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AI는 지금, 기후 현장에서 작동 중
인공지능은 이론 속 가능성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현실의 기후 대응 현장 속에서 실질적인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각국의 연구기관과 민간 기업들은 AI를 활용해 보다 정밀하고 즉각적인 환경 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점차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전 세계 숲을 그리는 눈: 글로벌 숲 지도(Global Forest Watch)
대표적인 사례는 메타(Meta)와 세계자원연구소(WRI)가 공동으로 개발한 ‘글로벌 숲 지도’다.
AI는 위성 사진을 1미터 단위로 정밀 해석해 전 세계 숲의 밀도, 훼손 정도, 벌채 위험 지역을 식별한다. 이 데이터는 오픈소스로 전 세계에 공개되어 누구나 접근 가능하며, 산림 보존 정책 수립, 기업의 탄소 감축 전략, 시민단체의 생태 감시 활동 등에 다양하게 활용된다.
특히 메타는 이 기술을 자사 ESG 전략의 핵심 인프라로 삼아, 2030년까지 넷 제로(Net-Zero) 달성이라는 구체적인 환경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 중이다.
이는 AI가 데이터 해석을 넘어서 정책 수립과 기업 전략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0.01초의 감지력: 극지방 빙산 추적 시스템
영국 리즈대학교 연구팀은 극지방의 변화 감지를 위한 AI 솔루션을 개발해 주목받고 있다.
남극의 해빙, 빙산, 구름은 모두 ‘흰색’으로 나타나 시각적으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AI는 미세한 질감과 패턴의 차이를 학습해 0.01초 만에 빙산의 이동을 감지한다.
이 기술은 해수면 상승 예측의 정확도를 대폭 향상시켰을 뿐 아니라, 극지방 생태계의 미세한 변화까지 정밀하게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과거에는 수작업으로 빙산을 하나하나 추적해야 했지만, AI는 이를 실시간 자동화함으로써 기후 관측의 차원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10분 단위 예보로 재난을 막는다: 국내 AI 홍수 예보 시스템
한국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한 기후 대응 기술이 현실화되고 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개발한 AI 홍수 예보 시스템은 강우량, 수위, 하천 흐름 등의 데이터를 학습해 10분 단위로 홍수 가능성을 실시간 예측한다.
현재 이 시스템은 전국 223개 지점에서 가동 중이며, 특히 기존에 예측이 어려웠던 상류 지역에서 정확도와 반응 속도 모두에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예보관은 AI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보다 신속하고 정밀한 경보를 발령할 수 있어, 기후 재난 조기 대응의 실효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처럼 AI는 숲, 바다, 도시를 가리지 않고 지구 전역의 기후 감지 능력을 넓히고 있다. 이제 AI는 단순한 기술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인류가 지구와 ‘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감각 기관이자, 위기 앞에서 방향을 제시해주는 길잡이다.
아마존 창업자 베조스의 도전: ‘AI 그랜드 챌린지’와 기술의 현장화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 접근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이를 AI와 결합한 보다 실천적인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가 설립한 ‘베조스 어스 펀드(Bezos Earth Fund)’는 총 100억 달러 규모의 기후 대응 기금을 마련했고, 이 중 1억 달러는 ‘AI 그랜드 챌린지(AI Grand Challenge)’라는 이름으로 AI 기반 환경 프로젝트에 직접 투입된다.
이는 단순한 투자라기보다, 기후 대응에 인공지능을 전면적으로 적용하겠다는 명확한 선언이자, 기술의 즉시 현장화를 목표로 한 전략적 기획이라 볼 수 있다.
2025년 5월 현재, 24개 프로젝트가 1차로 선정됐으며, 각 프로젝트에는 초기 지원금으로 5만 달러씩이 지급됐다. 이들 중 최대 15개 팀은 후속 심사를 통해 200만 달러까지 추가 지원을 받게 되며, 본격적인 기술 개발과 현장 적용에 돌입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지원 과제의 실용성과 다양성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재활용해 단백질을 생산하는 AI 기반 바이오 기술, 오디오 데이터를 활용해 야생 동물 밀렵 활동을 실시간 감지하는 생태 보존 시스템, 기존 전력망을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최적화하는 AI 모델 등, 이들 프로젝트는 모두 현장에서 바로 적용 가능성을 염두에 둔 ‘실전형 AI 기술’을 지향하고 있다.
베조스 어스 펀드는 이 챌린지를 통해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술이 당면한 기후 문제에 어떻게 현실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직접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이는 AI가 기후 기술의 이론적 가능성을 넘어서 현장의 에너지, 자원, 생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핵심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략적 움직임이다.
AI는 이제 기후 데이터 분석을 넘어, 문제 해결의 도구이자 행동의 동력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AI도 완벽하지 않다: 기술의 그림자
기후 위기 앞에서 인공지능은 분명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동시에, 그 도구가 새로운 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AI는 문제 해결을 가능케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술적·윤리적 역설 또한 불러일으킨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문제는 데이터 편향(Bias)이다.
AI는 학습된 데이터에 기반해 판단한다. 그러나 이 데이터가 주로 선진국 중심의 기후, 인프라, 지형 조건에 치우쳐 있을 경우,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의 기후 예측 정확도는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이는 결국 기후 적응과 자원 배분에서 지역 간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한계는 AI 자체가 만들어내는 탄소 발자국이다.
초거대 AI 모델(GPT, BERT 등)의 학습과 운용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실제로 일부 연구에서는 “AI 모델 하나를 학습하는 데 필요한 전력이 자동차 수십 대가 1년간 배출하는 탄소량과 맞먹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처럼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이 역설적으로 기후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는, AI 활용의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결국 핵심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이 기술을 사용하는가”에 있다.
AI가 제안한 해법이 정책 결정, 자원 배분, 공공 서비스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다면, 그 책임의 주체, 판단의 기준, 오류 발생 시 대응 체계 등 윤리적·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기술은 나침반, 항해는 인간의 몫
AI는 분명 강력한 도구다.
복잡한 기후 시스템을 빠르게 분석하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패턴을 포착하며, 재난을 미리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능형 예측기계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기후 위기란 단지 과학이나 기술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정치적 이해관계, 경제적 비용 부담, 사회적 불평등, 문화적 습관, 그리고 윤리적 딜레마가 얽혀 있다.
기후 대응은 수학 공식을 푸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합의하고 함께 움직여야 하는 복합적 전환의 과정이다.
AI는 우리에게 어떤 방향이 더 안전하고, 어떤 선택이 더 지속가능한지 알려주는 나침반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방향으로 실제로 항해할지 말지는 인간의 몫이다.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은 데이터나 알고리즘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공동체의 연대, 그리고 실행을 뒷받침할 제도와 협력 체계다.
기술은 길을 제시하지만, 그 길을 걷는 주체는 언제나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후 위기 앞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기술에만 기댈 것인가, 아니면 기술과 함께 책임 있는 변화의 주체로서의 인간성을 다시 세울 것인가. 답은 여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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