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기술로 큐레이션할 수 있을까' 디지털 시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신뢰의 선택' 앞에 선다. 어떤 병원을 가야 할지, 어떤 콘텐츠를 믿고 공부할지, 어떤 변호사를 만나야 할지, 어떤 지역 가게를 응원해야 할지. 그러나 우리는 그 선택을 검증되지 않은 후기와 광고, 평점에 의존하고 있다. TCR(Token Curated Registry)은 이런 질문에 대해 기술과 커뮤니티가 결합한 새로운 답변을 제시한다. 중앙화된 인증 시스템 대신, 공동체가 토큰을 걸고 직접 신뢰 대상을 큐레이션하는 구조. 그 실험은 지금,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확산되고 있다. MetaX는 이 시리즈를 통해 TCR이라는 기술이 ‘신뢰의 재구성 도구’로서 교육, 지역, 행정, 의료, 법률의 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이 시리즈는 단순한 기술 해설이 아니라, 신뢰와 공동체, 탈중앙성과 공공성, 그리고 Web3 이후 사회가 품어야 할 질문들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편집자주] |
시민은 행정을 감시하고, 행정은 시민을 설득한다.
그러나 이 관계가 늘 건강한 긴장 속에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매년 반복되는 민간위탁 논란, 수의계약 불투명성, 보조금 집행의 형식적 감사, 그리고 그 너머의 “이 단체가 진짜 자격 있는가?”라는 회의.
공공행정의 많은 영역에서 이제는 단순한 예산 집행이나 서비스 제공보다, ‘누구에게 신뢰를 맡길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TCR(Token Curated Registry)는 ‘공공의 신뢰’를 공동체가 참여해 직접 설계할 수 있는 구조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중앙화된 행정 절차가 놓치고 있는 참여와 검증의 과정을, 토큰 기반 커뮤니티 큐레이션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이 단체, 진짜 일 잘합니까?” - 공공영역에서의 TCR 응용
지방자치단체는 매년 수많은 보조금 사업을 위탁하거나 수행기관을 공모한다. 그중 일부는 진짜 지역 현안을 해결하지만, 또 일부는 형식적 실적과 관행적 네트워크에 기대는 낙하산 구조로 비판받는다.
그럴수록 행정은 위축되고, 예산은 의심받고, 시민은 불신한다. 결국 신뢰의 단절이 행정의 작동 자체를 마비시키는 셈이다.
그렇다면 TCR(Token Curated Registry) 모델이 이 구조에 개입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 TCR 기반 공공 파트너 큐레이션 시나리오 ]
|
이 구조는 단체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실시간으로 검증하는 동시에, 자율적 책임 구조를 형성한다.
TCR을 행정에 적용할 때 기대할 수 있는 혁신
TCR이 행정에 도입될 경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공공위탁 신뢰 구조의 혁신이다.
기존에는 수의계약이나 보조금 사업이 일부 네트워크나 비공식 추천에 의존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종종 형식적인 심사나 불투명한 결정 과정을 낳았다. 그러나 TCR을 활용하면, 시민 커뮤니티가 직접 참여해 후보 기관을 평가하고 검증하는 구조로 전환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행정은 보다 객관적이고 신뢰받는 절차를 확보하게 된다.
이와 함께 TCR은 실질적인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까지 행정 참여는 공청회나 온라인 설문 등 형식적 통로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지만, TCR 구조는 시민이 단순한 의견 제시를 넘어 사업 수행자 선정에 직접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수렴이 아닌, 실질적인 권한 이양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정책에 대한 수용성과 책임성을 함께 높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TCR은 데이터 기반의 행정 신뢰 시스템 구축에도 기여한다.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 계약을 통해 단체 선정 과정 전반이 기록되고,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됨으로써, ‘왜 이 단체가 선정되었는가’에 대한 근거가 명확히 제시된다. 이러한 구조는 감시와 감사가 사후에 이뤄지는 방식에서 벗어나, 감시 기능 자체가 행정 시스템에 내재화되는 형태로 진화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TCR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능성은, 신진 주체들의 등장 기회를 확대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행정 네트워크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청년 창업가나 소규모 사회적 기업, 새로운 실험을 준비하는 지역 공동체 등에게도 공정한 경쟁의 장을 제공할 수 있다. 관행적 연결이 아닌, 공개된 실적과 커뮤니티 기반의 평가를 통해 누구나 행정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단순한 기술 적용을 넘어, 행정 신뢰 구조와 시민 참여의 방식 자체를 재설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TCR은 기존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고, 보다 투명하고 지속 가능한 행정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제도 설계 시 고려해야 할 요소들
TCR이 공공 행정에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구조를 넘어 제도 설계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큰 보유 편중을 방지하는 설계다. 블록체인 기반 거버넌스는 참여자에게 투표권한을 부여하지만, 토큰이 소수에게 집중될 경우 의사결정이 왜곡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단순한 토큰 보유량 외에도 실제 커뮤니티 활동 이력이나 공공 기여도를 함께 반영하는 혼합형 평가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영향력은 공정하게 분산되고, 시스템은 더욱 신뢰를 얻게 된다.
또한, TCR이 단순한 ‘의견 수렴 플랫폼’에 머물지 않고 공식적인 행정 절차와 연동되기 위해서는 명확한 제도적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TCR 기반의 검증 리스트가 실제 보조금 선정이나 수의계약 평가 기준으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행정 내 가이드라인 제정, 지침화, 조례 반영 등의 제도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단순한 실험으로 그치지 않고 실효성 있는 정책 도구로 발전하려면 제도권과의 연결이 핵심이다.
법률적 검토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사업 평가 자료나 참여자 신원 정보가 온체인에서 기록되고 공유되는 구조인 만큼, 개인정보 보호법, 행정정보공개법, 전자정부법 등 다양한 법률과의 충돌 가능성을 사전에 점검해야 한다.
특히, 실명 기반의 행정 절차와 익명성을 중시하는 블록체인 기술 간의 긴장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 모든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참여 유도 구조가 반드시 설계되어야 한다. 주민 참여가 일회성 이벤트나 형식적 활동에 그치지 않도록, 마일리지, 지역화폐, 거버넌스 포인트 등 다양한 형태의 인센티브와 보상을 연계할 필요가 있다.
참여자들이 실질적인 권한과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TCR 기반 행정 모델은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다.
결국, TCR의 도입은 단순히 ‘기술을 도입한다’는 차원을 넘어, 행정, 법제, 커뮤니티 구조 전반을 다시 설계하는 복합적인 시도다. 그만큼 구조 설계 단계에서부터 신중한 논의와 테스트가 병행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공공 영역에서도 신뢰 가능한 분산형 거버넌스 모델이 현실화될 수 있다.
행정은 이제 ‘큐레이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행정은 규칙을 만들고 예산을 나누는 ‘중앙 기획자’의 역할에 머물렀다. 하지만 앞으로의 행정은 공동체의 집단 지성을 조율하고, 신뢰를 매개로 자원을 큐레이션하는 ‘분산형 운영자’로 진화해야 한다.
TCR은 그 변화를 위한 실험이자 도구다. 공공은 더 이상 통제와 감시만으로 신뢰를 만들 수 없다. 이제는 시민이 직접 신뢰를 생산하고, 그 신뢰를 기술로 투명하게 기록하고, 그 기록을 기반으로 함께 결정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 단체, 믿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그건 우리가 직접 큐레이션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행정 생태계.
TCR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저작권자ⓒ META-X.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