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탈=현대원 칼럼리스트] AI 시대 국가경쟁력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GPU와 데이터센터, 파운데이션 모델이다. 얼마나 많은 컴퓨팅 자원을 확보했는지, 얼마나 큰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는지, 자국의 경쟁력 있는 AI 모델을 보유하고 있는지가 국가 AI 경쟁력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AI를 움직이는 이러한 물리적 기반 없이 AI 강국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이틀간 디지털정부와 AI 정책 현장을 직접 살펴보면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AI 시대의 국가경쟁력은 과연 기술 인프라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번 방문에서 에스토니아 정보시스템청(RIA)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확인한 것은 오히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인프라였다. 데이터 거버넌스, 디지털 신원체계, 기관 간 협업, 사이버보안, 정부에 대한 신뢰, 그리고 시민과 공무원의 디지털·AI 리터러시다. 나는 이것을 AI 시대의 ‘사회적 인프라(social infrastructure)’​라고 부르고 싶다.

디지털정부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에스토니아의 디지털정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X-Road와 전자신분증(e-ID)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요한 것은 개별 기술 자체보다 이들이 만들어진 순서와 원칙이다. 에스토니아는 먼저 시민의 디지털 신원을 확립하고, 서로 다른 정부기관과 민간기관의 데이터가 안전하게 교환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그 위에 수많은 디지털 공공서비스를 하나씩 올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스토니아가 정부 데이터를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모으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 기관은 여전히 자신의 데이터를 관리한다.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책임도 진다. 대신 필요할 때 다른 기관의 데이터와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즉 에스토니아 디지털정부의 핵심은 중앙집중(Centralization)이 아니라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에 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정부의 사일로(silo)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 흔히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거나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에스토니아가 보여주는 방식은 다르다. 각 기관의 책임과 전문성은 유지하면서 서로 연결한다. 그리고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각 기관은 자신의 데이터 품질과 시스템 운영에 더욱 책임을 져야 한다. 한 기관의 데이터가 잘못되면 그 데이터를 사용하는 다른 서비스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기술보다 어려운 것이 거버넌스다. 각 부처에는 고유한 법적 권한과 기능이 있다. 각자의 정보시스템과 데이터가 있고 예산과 조직이 있다. 데이터를 공유하거나 업무를 연결하려 하면 항상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한국에서도 정부 데이터 공유와 부처 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많은 정책적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 조직들이 데이터를 공유하고 함께 일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래서 이번 방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 가운데 하나는 매우 단순했다. “It is mainly about governance.” 즉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거버넌스가 핵심 이슈라는 점이다.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규칙으로 연결하고, 누가 책임지고, 기관들이 어떻게 협력하도록 만들 것인가다. 에스토니아에서도 X-Road 하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각 부처와 기관의 책임, 국가 공통 디지털 인프라를 담당하는 RIA의 역할, 정치적 조정, 민간기업과의 협력, 그리고 비교적 수평적인 행정문화가 함께 작동한다.

특히 에스토니아 정보시스템청(Information System Authority: RIA)는 단순한 IT 지원기관이 아니다. 국가 정보시스템의 상호운용성과 사이버보안을 담당하면서 정부기관들이 공통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중복된 투자를 줄이며, 새로운 디지털 기술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번 방문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육이었다. 즉 ‘AI 시대에도 다시 교육이 핵심이다’라는 교훈이다.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성공을 이야기하면 흔히 X-Road와 e-ID를 떠올리지만, 현지에서는 1990년대 시작된 Tiger Leap의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학교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보급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교사와 학생이 디지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함께 키웠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뒤 에스토니아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에스토니아는 비슷한 접근을 AI에서 다시 시도하고 있다. ‘AI Leap’ 프로그램이다. 2025~2026년 파일럿에서는 약 2만 명의 학생과 4,800명의 교사가 대상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에게 AI를 먼저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사 교육을 먼저 시작했다. AI 사용법뿐 아니라 교육심리, 평가방법, 학생의 자기주도학습과 비판적 사고까지 함께 다뤘다. AI를 학교에 들여놓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AI가 존재하는 시대에 교육 자체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AI Leap은 2026~2027년 직업교육과 새로운 학생군으로 확대되고, 이후 검증된 방식을 교육시스템과 교육과정에 통합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 접근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AI 인프라는 GPU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도 인프라다. 이번 에스토니아 방문을 통해 나는 국가 AI 경쟁력을 두 종류의 인프라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는 보이는 인프라(Visible AI Infrastructure)​다. GPU,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전력, 데이터, 파운데이션 모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Invisible AI Infrastructure)​다. 데이터 거버넌스, 디지털 신원, 기관 간 협업, 사이버보안, 제도적 신뢰, 교육과 AI 리터러시, 그리고 책임체계다. 전자는 AI를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이고, 후자는 AI가 사회와 국가 시스템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인프라다.

에스토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GPU를 가진 국가도 아니고 세계 최고 수준의 파운데이션 모델을 자체 개발하는 국가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가 정부와 사회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다음 단계를 빠르게 실험할 수 있는 이유는 지난 20여 년 동안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인프라를 축적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한국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AI 경쟁력을 이야기하면서 보이는 인프라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GPU와 데이터센터를 확보하고 좋은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AI가 의료, 교육, 행정, 복지, 산업현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누가 데이터에 접근할 것인가. 기관 간 데이터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AI에게 어디까지 권한을 줄 것인가. 잘못된 판단이 발생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민은 그 시스템을 신뢰할 것인가. 그리고 시민은 AI를 제대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GPU의 숫자만으로 얻을 수 없다.

AI 대전환의 경쟁이 본격화될수록 국가 간 경쟁의 초점 역시 기술 확보에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거버넌스 역량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탈린에서 만난 에스토니아의 디지털정부는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그 다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AI가 시민에게 답하는 것을 넘어, 시민을 대신해 행동한다면 국가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그 질문의 중심에 에스토니아가 추진하고 있는 ‘에이전틱 국가(Agentic Stat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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