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코드와 아트, 사운드, 기획 초안까지 빠르게 만들어내는 시대다. 게임을 '구현'하는 일 자체의 진입장벽이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비슷한 도구를 손에 쥔 환경에서 게임사의 경쟁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지난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경기 판교 넥슨 사옥 일대에서 열린 '2026년 넥슨 개발자 콘퍼런스(NDC 26)'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올해 행사의 무게중심은 분명했다. 누적 1만여 명의 관람객이 강연장을 찾았고 온라인 생중계 조회수는 6만 3천여 회를 기록했으며, AI 활용이 실무 현장에서 보편화된 상황을 전제로 실제 적용 과정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넥슨은 AI 세션을 대폭 확대했고, 이정헌 넥슨 일본법인 대표는 개막식에서 AI 전환을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규정했다. 변화 자체는 이미 업계의 상수가 됐다는 신호였다.
구현이 쉬워지는 시대, 우리는 무엇으로 경쟁하는가
행사의 문제의식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은 강대현 넥슨코리아 공동대표의 기조강연이었다. 강연 제목부터가 '구현이 쉬워지는 시대, 우리는 무엇으로 경쟁하는가'였다. 만드는 능력이 흔해진 시대에 진짜 변수는 '구현'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문제 설정이다.
강 대표가 제시한 답은 '맥락 자본'이라는 개념이었다. 개발팀이 다져온 노하우, 유저와 맺어온 관계, 커뮤니티 문화처럼 시간으로만 축적되는 자산을 맥락 자본으로 정의하고, 그렇게 쌓아 올린 맥락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AI로 복제할 수 있는 코드나 에셋과 달리, 시간이 빚어낸 맥락은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강 대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맥락의 복리'라는 개념을 꺼냈다. 맥락은 단순히 시간에 비례해 쌓이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연결될수록 가치가 커진다는 것이다. 금융의 복리처럼 맥락도 축적과 연결이 맞물리며 가속도가 붙고, 이것이 곧 AI 시대의 경쟁력이 된다는 논리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개발 노하우와 유저 관계, 커뮤니티 문화는 각각 분리된 자산이 아니다. 오래 운영해온 IP가 쌓은 세계관, 그 IP를 둘러싼 유저 커뮤니티, 운영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판단의 경험이 서로 맞물릴 때 후발 주자가 단기간에 복제하기 어려운 해자(垓字)가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추상적인 개념이 행사 전체를 관통하는 틀로 기능했다는 점이다. NDC 26의 세션들은 크게 세 갈래의 맥락 자본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입증하고 있었다. 축적된 개발 노하우, 라이브 운영이 정제한 데이터, 그리고 IP와 유저가 맺어온 관계가 그것이다.
① 노하우 — 실패까지 복기하는 축적의 힘
첫 번째 갈래는 개발팀이 시행착오를 통해 쌓은 노하우다. 가장 상징적인 세션은 차민서 넥슨게임즈 RX스튜디오 PD가 진행한 '블루 아카이브 포스트 모템 - 게임 디렉터의 관점에서'였다. 글로벌 흥행작의 개발기를 다뤘지만, 마케팅성 성공담이 아니라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가감 없이 복기하는 자리였다는 점이 핵심이다.

차 PD는 성공 요인으로 명확한 '비전 빌드' 구축과 일정 준수를 꼽았다. 개발 초기에 오픈부터 전투까지 흐름을 담은 5분 분량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해 팀 전체가 방향성을 공유했고, 이를 토대로 권한을 빠르게 위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2018년 4월 개발을 시작해 약 34개월 만인 2021년 2월 일본 출시까지, 신규 IP로서는 이례적으로 일정을 지켜냈다. 동시에 그는 예상치를 크게 웃돈 접속량과 초기 서버 안정성 문제 같은 시행착오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 세션이 보여준 것은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통했고 무엇이 어긋났는지를 조직이 기록하고 되짚는 능력이다. 같은 메시지는 박용현 넥슨게임즈 대표의 멀티 스튜디오 세션에서도 반복됐다. 서로 다른 게임을 동시에 개발하는 시도가 RPG 역량을 토대로 새로운 장르와 경험을 탐색해온 결과이자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설명이었다. 여러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쌓은 경험 그 자체가 자산이라는 관점은, AI가 코드는 대신 써줘도 '무엇을 시도하고 무엇을 버릴지'에 대한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② 데이터 — 라이브 운영만이 쌓을 수 있는 맥락
세 갈래 중에서도 올해 행사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두 번째, 라이브 게임 운영이 데이터의 형태로 정제해낸 맥락이었다. 둘째 날 열린 'AI 시대, 넥슨은 데이터로 무엇을 준비하는가' 세션은 입장 줄이 이어질 만큼 관람객이 몰렸고, 강 대표가 기조강연에서 던진 '맥락 자본'을 가장 구체적인 실물로 번역해 보여줬다.
세션의 출발점은 통념을 뒤집는 진단이었다.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테니 데이터는 자연히 따라올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는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넥슨 측은 적지 않은 기업이 자사 데이터가 아직 AI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답한다는 점을 들며, AI 모델은 빠르게 발전하지만 자사 게임과 서비스의 맥락이 담긴 데이터는 결코 대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AI 기술의 변화 속도와 무관하게 일관되게 쥐고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데이터이며, 결국 AI 전환 시대의 승부처는 모델이 아니라 데이터라는 것이다.
이 추상적 명제를 떠받친 것은 전사 데이터 플랫폼 '모노레이크'의 사례였다. 넥슨은 게임마다 따로 쌓여 서로 공유되지 않던 '데이터 사일로'를 허물기 위해 게임·플랫폼·업무 데이터를 단일 플랫폼으로 통합하고, 표준화된 데이터 파이프라인과 거버넌스를 구축했다. 그 결과 하루 평균 약 100TB씩 생성되는 450억 개 이상의 게임 로그를 조회하는 데 걸리던 시간이 기존 두 시간에서 5분 안팎으로 줄었고, 구축 과정에서 저장 비용은 25% 절감되고 성능은 17배 이상 개선됐다는 수치가 제시됐다. 라이브 게임을 오래, 그리고 대규모로 운영해본 회사만이 가질 수 있는 데이터의 부피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주목할 점은 이 데이터가 단순한 기록 보관을 넘어 운영 현장의 속도로 직결됐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운영이나 고객 응대(CS) 조직이 데이터를 얻으려면 개발팀에 추출을 요청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누구나 직접 데이터에 접근하게 되면서 유저 응답 속도가 크게 빨라졌다. 유저 커뮤니티에서 "넥슨이 드디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는 설명은, 데이터 자산이 곧 유저와의 관계로 환원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모노레이크 2.0'이다. 1.0이 사람이 데이터를 쉽게 쓰도록 만드는 단계였다면, 2.0은 AI가 데이터의 의미와 맥락을 스스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AI 레디 데이터' 환경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넥슨은 개별 데이터에 정확한 의미와 데이터 간 관계, 현업의 핵심 판단 기준을 입히는 온톨로지 기반의 구조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 위에서 자연어 질의만으로 리포트를 만드는 'AI 서치', 매출이나 동시접속자 변동의 원인을 자동 분석하는 기능, 사람이 지표를 확인하기 전에 AI가 먼저 이상 징후를 감지해 알리는 능동형 에이전트가 작동한다. 나아가 특정 보스를 넘지 못하는 유저나 캐릭터의 행동 패턴을 AI가 파악해 개별 유저에게 맞춤형 케어를 제공하는 초개인화 서비스도 내부 테스트 단계에 있다.
같은 날 무대에 오른 자회사 엠바크 스튜디오의 사례는 라이브 운영 데이터의 밀도를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아크 레이더스'를 만든 이 스튜디오는 게임 속 모든 총알의 궤적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방식을 공유했는데, 플레이 과정에서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게임을 다듬는 작업이야말로 서비스를 직접 운영하는 주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외부에서 사 올 수도, AI가 대신 만들어줄 수도 없는 이 데이터의 결이 곧 맥락 자본의 핵심이라는 점이 반복적으로 확인됐다.
함께 자리한 외부 전문가의 진단도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대규모 언어모델은 잘못된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만큼 데이터의 정확성과 의미론적 맥락이 중요하며, 탄탄한 데이터 기반이 없으면 AI 역시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놓기 어렵다는 것이다. 좋은 모델은 누구나 같은 것을 가져다 쓸 수 있지만, 그 모델에 의미 있는 답을 만들게 하는 '재료'는 사후에 사들이거나 단번에 만들어낼 수 없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그리고 그것이 표준화되어 서로 연결될수록 가치가 커진다는 점에서 라이브 운영 데이터야말로 '맥락의 복리'가 가장 또렷하게 작동하는 영역인 셈이다.
③ IP와 관계 — 시간이 만든 세계관의 재발견
세 번째 갈래는 IP와 유저가 오래 맺어온 관계다. '레거시에서 플랫폼으로 - NEXON Replay가 사랑받던 IP를 되살리는 법' 세션은 이 지점을 정면으로 다뤘다. 서비스가 종료된 '에버플래닛', '택티컬커맨더스'는 물론 라이브 중인 '어둠의전설', '아스가르드', '일랜시아' 같은 IP를 외부에 개방하게 된 배경과 판단 과정이 공유됐다.
주목할 점은 단순히 IP 사용권만 열어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준 없이 개방하면 저품질 콘텐츠가 쌓이거나 원작의 부활을 기다려온 팬들의 기대가 오히려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원본 자료를 안전하게 검수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원작에 대한 이해와 운영 경험 가이드라인을 함께 제공했다. 되살릴 가치가 있는 IP, 그 IP를 기다려온 팬, 그리고 오래 운영하며 쌓은 라이브 노하우가 맞물려야 비로소 부활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쌓아 올린 세계관과 팬덤 그 자체가 자산이라는 맥락 자본론의 가장 직접적인 사례다.
이런 관점은 행사 마지막 날 대담에서도 확인됐다. 짧고 빠른 콘텐츠가 범람하는 환경에서 게임사와 크리에이터, 팬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한 이 세션은, 결국 유저와의 장기적 관계를 어떻게 자산으로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했다. 강연장 밖 풍경도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7년 만에 외부에 전면 개방된 게임아트 전시 'NEXTAGE'와 넥슨 IP를 활용한 체험존, 라이브 음악 공연은 모두 게임이 오랜 시간 쌓아온 문화적 맥락을 외부로 드러내는 장치였다.
무엇을 축적할 것인가
물론 맥락 자본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래 버텨온 대형사의 우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읽힐 수 있고, AI가 유저 분석과 커뮤니티 운영까지 파고들면 맥락의 일부도 복제 가능해진다. 쌓인 맥락이 관성으로 굳어 변화를 가로막는 순간, 자산은 곧 족쇄가 된다. 시간이 만든 것이 해자가 될지 족쇄가 될지는 결국 그것을 다루는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포스트모템으로 실패를 기록하고, 라이브 운영 데이터를 AI가 읽을 수 있게 정제하고, 잠들어 있던 IP를 다시 깨우는 일. NDC 26의 세션들은 서로 다른 무대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경쟁력은 더 이상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에서 갈리지 않는다. 만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워졌기 때문이다. 진짜 격차는 그동안 무엇을 축적해왔는가, 그리고 그 축적을 어떻게 연결해 복리로 굴리는가에서 벌어진다. AI는 그 맥락을 대신 만들어주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쌓인 맥락을 증폭하는 도구다.
이정헌 대표가 개막식에서 남긴 한마디가 이 모든 것을 압축한다.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용자는 결국 재미있는 게임을 기억하고 다시 찾는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같은 도구를 쥔 시대에 차이를 가르는 것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안목이라는 것이다.
도구는 이미 모두의 것이 됐다.
그 도구로 무엇을 쌓고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게임사의 경쟁력을 결정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