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고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시작됐다.
아침 온천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서두르지 말자'
어디를 꼭 가야 한다는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유명한 관광지를 몇 군데 더 봐야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냥 아들과 전기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세운 ‘계획 없는 계획’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전기자전거 두 대를 빌렸다. 2시간 무료. 1시간 초과당 200엔 요금 부과.
페달을 밟자 모터가 등을 살짝 밀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힘을 많이 주지 않아도 자전거는 앞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오토바이처럼 빠르지도 않았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 바람을 느끼기에는 충분히 빠르고, 주변을 바라보기에는 충분히 느린 속도였다.
문득 전날 노천탕에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늘 최고출력으로 달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조금만 힘을 주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삶에도 이런 속도가 필요한 순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호텔 주변에는 문을 연 가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몇 블록만 벗어나자 분위기가 금세 달라졌다.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조금 과장하면 도시 전체를 아들과 나 둘이 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큰길가로 나아가자 자동차가 제법 다녔다. 낯선 일본 도로에서 아들과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차들과 섞여 달리는 것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들, 우리 골목으로 다니자.”
“응.”
우리는 큰길에서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선택이 좋았다.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동네가 보였다.
작은 집. 오래된 가게. 문을 닫은 상점. 세월의 흔적이 남은 간판. 그리고 사람 없는 골목.
전날까지의 나는 여행에서도 계속 ‘다음’을 생각했다.
다음 장소. 다음 열차. 다음 식당. 다음 일정.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조금 천천히 달리니 그동안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들과 세븐일레븐에 들어갔다.
콜라 두 개. 팝콘. 초콜릿. 아들이 좋아하는 젤리.
몇 개 집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계산하고 보니 우리 돈으로 만 원이 훌쩍 넘었다.
‘일본 편의점 물가가 이렇게 비쌌나.’
한국에서는 콜라를 살 때 대개 1+1 행사부터 찾는다. 그러다 보니 정가가 얼마인지조차 크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일본 편의점에는 1+1이 없다. 엔화로 지불하다보니 가격에 대해 다소 무감각해진 탓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을 왔다는 건 돈을 쓰겠다고 작정한 것이니 더욱 쉽게 결제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숙소 주변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보니 슈퍼마켓 하나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 편의점에서 산 콜라가 떠올랐다.
비슷한 제품이 거의 절반 가격이었다.
“아들, 우리 아까 괜히 편의점 갔는데?”
아들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렇게 별것 아닌 데서 하나씩 배운다.
사카이미나토에서는 편의점보다 슈퍼마켓을 먼저 볼 것.
그런데 안으로 더 들어가자 콜라 가격 따위는 금세 잊어버렸다.
해산물 코너가 꽤 훌륭했다. 참치회가 있었고, 초밥이 있었고, 장어도 있었다.
도시락 코너에는 규동과 닭꼬치가 있었고 튀김도 종류가 많았다. 사카이미나토가 항구도시라는 사실은 유명 관광지를 찾아갔을 때보다 이런 슈퍼마켓에서 더 실감났다.
여행을 가면 보통 그 지역의 유명 식당부터 찾아다닌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먹으며 살아가는지 알고 싶다면 시장이나 슈퍼마켓에 가보는 것이 더 빠른지도 모른다.
나는 맥주를 세 캔 골랐다. 아사히. 삿포로. 기린. 종류별로 한 캔씩.
온천을 마치고 객실에서 한 캔씩 마실 생각이었다.
아들은 사과 곤약젤리를 골랐다. 요괴가 그려진 기념 티셔츠도 사고 펜도 샀다. 이날은 뜻하지 않게 우리에게 작은 쇼핑데이가 됐다.
다만 사카이미나토에서는 ‘풀소유’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사고 싶어도 살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이 도시답게 느껴졌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깨달은 게 있다. 이곳에는 정말 요괴가 많다. 역에도 있고, 거리에도 있고, 상점에도 있다. 기념품에도 있고, JR 열차에도 요괴가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관광지 캐릭터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계속 마주치다 보니 궁금해졌다.
‘대체 이 도시는 왜 이렇게 요괴가 많은 걸까.’
찾아보니 사카이미나토는 처음부터 ‘요괴의 도시’였던 곳은 아니었다. 원래는 항구와 철도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도시였다. 그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이야기가 도시의 새로운 정체성이 됐다.
그의 대표작 《게게게의 기타로》에 등장하는 요괴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였다. 사카이미나토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기존 상점가에 요괴 조형물이 하나둘 들어섰고, 그것이 지금의 ‘미즈키 시게루 로드’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거대한 테마파크를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원래 있던 마을에 이야기를 입혔다. 지역 출신 만화가의 세계관을 기존 상점가와 철도, 공항, 기념품에 하나씩 연결했다.
거리에는 요괴들이 등장했고, 사카이선을 달리는 열차에도 기타로와 요괴가 그려졌고, 공항 이름에도 ‘기타로’가 붙었다.
거리 곳곳에는 스탬프가 놓였다. 관광객들은 요괴를 찾아 거리를 걸으며 스탬프를 하나씩 모았다. 그리고 한때는 한 해 수백만 명이 이 작은 항구도시를 찾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한때 이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걸었을까.’
내가 보고 있는 거리는 조용했다. 사람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을 달리다가 스탬프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그 상자를 닦고 있었다. 아주 정성스럽게 닦았다. 마치 오래된 귀중품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나는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저 지나가는 여행객이 멋대로 상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게 됐다.
‘다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필 이곳은 요괴가 사는 마을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누군가 오랫동안 품어온 소망이 어느 날 기적처럼 현실이 되곤 한다. 어쩌면 밤이 되면 기타로와 눈알 아버지가 몰래 나와 저 스탬프 박스를 지켜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그런 상상을 해봤다.
그렇다고 지금의 사카이미나토를 ‘끝난 관광지’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열풍에는 높낮이가 있다. 사람이 몰려드는 시간이 있고, 잠잠해지는 시간이 있고,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도시도 사람처럼 살아 있다고 믿는다. 흥하는 시간이 있고, 가라앉는 시간이 있고, 또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
그 생각을 하다가 이상하게 회사에서 봤던 몇몇 얼굴이 떠올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높은 자리에 계셨던 분들이었다. 회의실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긴장했다. 그들의 한마디에 회의의 방향이 바뀌었다. 늘 반듯한 정장을 입었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걸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회사 주변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친 모습은 조금 달랐다. 백발이 늘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졌다. 칼주름 잡힌 정장 대신 편한 티셔츠를 입고, 예전보다 조금 굽은 등을 한 채 천천히 걸었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묘한 감정이 들었다.
‘안쓰럽다고 해야 할까.’
‘무상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시간이 흘렀다고 해야 할까.’
한때 그렇게 거대해 보였던 사람도 결국 시간 안에서는 한 사람일 뿐이었다.
도시에도 전성기가 있고, 회사에도 전성기가 있고, 사람에게도 전성기가 있다. 영원할 것 같은 순간도 결국 지나간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어깨가 예전 같지 않다. 무릎도 오래 걸으면 부담이 온다. 아마 그래서 전기자전거가 더 반가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전 같으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리와 언덕이 이제는 조금씩 몸에 부담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정장을 좋아한다. 잘 맞는 재킷을 입고, 셔츠를 고르고, 구두를 신는다. 거울 속에 조금이라도 멋진 내 모습을 오래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있다.아직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달리는 아들을 바라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동안, 아들은 조금씩 자기 삶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내가 앞장서서 길을 살피고 있지만 머지않아 아들이 나보다 더 빠르게 달릴 날이 올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아들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고, 내가 가보지 못한 곳까지 아들이 갈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마 따라잡으려고 애쓰기보다, 잘 달리고 있다고 박수를 쳐주는 일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어쩌면 부모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 무대의 조명이 조금씩 내려가는 동안 자식의 무대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서글픈 일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조금 섭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됐다.
아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갈지.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 때문에 좌절하고, 어떤 순간에 가장 환하게 웃게 될지.
내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잘 달리고 있다면 옆에서 박수를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가 평화롭게 흘러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오후에 작은 일이 하나 생겼다.
휴가 중인데도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계속 들어왔다. 회사 일은 아니었다. 좋은 뜻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부담 없이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커졌고, 상대방의 요구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휴대전화 화면 위로 메시지가 계속 올라왔다.
나는 하나씩 답했다. 답하지 않으면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상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계속 답했다. 내게는 그것이 책임감이었다. 여행 중이라도 내가 시작한 일이니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카레집으로 향하는 동안 아들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내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짧았다.
“왜 그래?”
“아니야.”
아니라고 하는데 분명히 아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태도가 못마땅했다. 나도 조금씩 기분이 나빠졌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아직 음식이 나오기 전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
“응.”
“기분 나쁜 게 있으면 그렇게 표현하지 말고 아빠한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아빠는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아빠랑 오롯이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깨졌어.”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나는 아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같은 자전거를 탔고, 같은 풍경을 봤고, 지금도 같은 식당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들은 내가 자기와 함께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몸은 아들 옆에 있었지만,내 마음의 일부는 계속 그 작은 화면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같은 장소에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한 달 동안 아들은 아빠를 거의 보지 못했다. 아들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회사에 있었고, 아들이 잠들 시간이 되어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2년 6개월 전의 약속을 다시 꺼냈던 아들이었다.
“아빠, 우리 둘이 노천탕에 가기로 했잖아.”
어쩌면 아들이 원했던 것은 노천탕 여행 자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온천도, 라멘도, 요괴도, 프라모델도 좋았겠지만, 그보다 더 원했던 것은 지난 한 달 동안 회사에 빼앗겼던 아빠를 며칠만이라도 온전히 돌려받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해.”
아들이 나를 바라봤다.
“아빠가 여행 와서도 계속 이러고 있었네.”
그날 처음 알았다. 아들을 여행에 데려오는 것과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카레가 나왔다. 나는 부드럽게 익힌 닭고기가 들어간 카레를 골랐고 가라아게를 추가했다. 생맥주도 한 잔 주문했다.
사실 우리는 조금 전 슈퍼마켓에서 이것저것 먹어서 그렇게 배가 고픈 상태도 아니었다. 그래도 카레를 먹었다.
조금 전의 대화를 굳이 계속 이어가지는 않았다. 아들도 말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서로 무엇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는 알았으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다투는 것보다 왜 다투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그것 하나는 알게 됐다.
숙소로 돌아온 뒤에는 휴대전화를 조금 멀리 두었다. 둘이 영화를 한 편 봤다.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냥 같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녁 무렵에는 다시 슈퍼마켓으로 갔다. 이번에는 편의점에 가지 않았다. 이미 배웠으니까.
가라아게. 할인 스티커가 붙은 튀김세트. 초밥세트. 다음 날 아침에 먹을 샐러드. 샌드위치. 데리야키 햄버거.
치즈버거. 사과주스. 그리고 아들이 먹고 싶다고 하는 '소고기덮밥'.
숙소로 돌아와 음식을 펼쳐놓았다. 나는 튀김세트와 초밥, 가라아게를 앞에 놓고 낮에 사둔 삿포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캔의 고리를 잡아당겼다.
칙.
캔이 열리는 소리가 좋았다.
화려한 식당도 아니었다. 미리 예약해둔 코스요리도 아니었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음식들을 객실에 펼쳐놓고 아들과 먹는 저녁이었다.
그런데 편했다. 오히려 이런 것이 휴가 같았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눕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배가 불렀다.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또 잠이 들었다. 이곳에 와서는 참 잘 잤다.
눈을 떠보니 밤 9시 30분이었다. 아들과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전날처럼 요나키소바를 먹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호텔 동선도 익숙했다. 어디로 내려가야 하는지,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 얼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다.
첫날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 하루가 지나자 조금씩 생활공간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낯선 공간도 몇 번 오가다 보면 자기 자리처럼 느껴진다.
라멘을 먹고 다시 사우나로 올라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하루가 천천히 정리됐다.
아침에는 삶의 속도를 생각했고, 낮에는 아들과 골목을 달렸다. 슈퍼마켓을 구경했고, 요괴가 사는 도시의 시간을 생각했다.
한때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늙어가는 얼굴도 떠올렸고, 내 옆에서 조금씩 커가는 아들을 바라봤다. 오후에는 그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슈퍼마켓에서 산 음식을 펼쳐놓고 맥주 한 캔을 마셨다.
대단한 관광지를 본 날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많은 것을 본 날이었다.
도시를 봤고, 시간을 봤고, 늙어가는 나를 봤고, 자라고 있는 아들을 봤다. 그리고 아주 조금,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도 본 것 같았다.
사카이미나토역 주변은 이제 꽤 익숙해졌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면 슈퍼마켓이 나오는지 알았다. 편의점 위치도 알았고, 거리 곳곳에 서 있는 요괴들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도시가 불과 며칠 만에 조금 편안해졌다. 그래서 다음 날에는 조금 더 멀리 가보기로 했다.
사카이미나토를 벗어나 요나고 시내로 가보기로 했다. 아마 가보면 별것 없을지도 모른다. 여느 일본 지방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궁금했다. 오늘 보지 못한 풍경이 있을 것 같았다.
여행은 참 이상하다. 처음에는 유명한 것을 보기 위해 움직인다. 유명한 관광지를 검색하고, 별점 높은 식당을 찾고, 남들이 찍은 사진 속 장소를 따라간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 유명하지 않은 것이 궁금해진다.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곳이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도 그렇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더 빠른 길을 찾았다. 더 많은 것을 보려고 했다. 하루 일정을 빈틈없이 채우는 것이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달랐다. 조금 덜 보고, 조금 천천히 움직이고, 아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남는 것이 더 좋았다.
오늘 전기자전거를 타면서 느꼈던 그 속도처럼.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속도. 바람을 느낄 수 있고, 옆을 바라볼 수 있고, 함께 달리는 사람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도 볼 수 있는 속도.
어쩌면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속도도 그 정도인지 모른다.
나는 그동안 빨리 가는 법을 배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옆을 보면서 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나이가 된 것 같았다.
속도를 늦추자 도시가 보였다. 한때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을 거리와 그 시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손이 보였다.
속도를 늦추자 나도 보였다. 여전히 젊고 싶어 하지만 조금씩 나이 들어가고 있는 내 몸과 마음이 보였다.
그리고 속도를 늦추자, 내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던 아들도 비로소 보였다.
어쩌면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단순히 천천히 움직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동안 너무 빨리 달리느라 지나쳐버린 것들을 다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카이미나토에서의 두 번째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 회사에서 이제는 꽤 멀리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던 나는, 꿈속에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