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카카오, 제6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특별상 수상작
얇게 뽑은 물줄기가 글라스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검붉은 광채. 매혹적인 빛깔이다. 글라스를 가볍게 돌린다. 화려한 향이 콧속으로 날아든다. 갈증이 밀려온다.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간다. 천천히 기울인다. 혀 위로 와인이 흐른다. 달콤함과 매끄러움. 눈을 감고 이미지를 그려본다...[광화문덕] |
"지난해 연말에 우리가 뭐 했지?"
우리는 망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억하고자 하지만 대부분을 잊으면서 살아간다. 좋았던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아무리 잊지 않으려 애써도 흘러가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 글 등과 같은 수단을 활용해 기록이란 것을 남긴다.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기록하고자 하는 내면 욕구의 발현일지도...
이런 생각도 든다. '인간에게 기록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건 아닐까? 그 덕택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 우리 선조뿐 아니라 구석기, 신석기 인류의 삶도 엿볼 수 있는 것일지도...'.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끊임없이 기록하며 살아간다. 특히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디지털화된 기록'을 남기며 살아간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개인적인 블로그 등을 통해서. 우리는 '0'과 '1'로 표현되는 디지털 코드로 짜인 공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저장하고 있다. 사진이나, 동영상, 글자 형태로.
사실 와인의 세계에도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와인을 제조하는 와인 양조장이 아무리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만이 가진 역사적 가치를 입증해줄 이야깃거리가 없다면 그저 수많은 와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프랑스 와인이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와인 속에 녹아있는 무궁무진한 역사적 배경, 즉 기록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화에서는 미국 와인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아주 흥미로운 역사적 기록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파리의 심판'이다.
1976년 5월 24일 파리의 와인 바이어였던 영국인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와인 가게를 홍보하기 위해 이벤트를 기획하게 된다. 마침 1976년은 미국 독립 200주년이기도 해 프랑스인에게 미국에도 훌륭한 와인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랑스에서 미국 와인이 저질(Low quality)로 인식됐는데, 이 같은 편견을 깨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영국인은 미국 캘리포니아 와이너리 여러 곳을 방문해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선보일 와인을 손수 골랐다. 이 과정은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와인 미라클'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참고로, 위키트리에는 영국인 와인 평론가 스티븐 스퍼리어가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공정한 평가를 위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개최했다고 기록돼 있다. 블라인드 테스트의 개최 목적은 스퍼리어가 캘리포니아를 방문했다가 미국 와인들의 품질이 상당한 것을 보고, '미국도 괜찮은 와인들을 만드네? 그래도 프랑스 와인엔 안되겠지? 한번 비교해 볼까?' 였다고 한다. 그래서 스퍼리어 본인은 당연히 프랑스 와인이 이길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심사위원들도 모두 그랬다. 역사와 전통의 프랑스 와인이 미국의 와인 따위에게 질 리가 없다고 봤기에 기꺼이 시음회 심사단으로 응했다고 한다.
이벤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 와인도 프랑스 보르도 5대 샤또인 샤또 무똥 로칠드, 샤또 오브리옹을 비롯해 샤또 몽로즈 등을 준비했다. 모두 내로라하는 프랑스 와인들로, 화이트 와인은 부르고뉴 생산자의 그랑 크뤼와 1등급, 레드 와인은 보르도 그랑 크뤼 1, 2등급의 최고급 와인이다.
그렇게 엄선한 레드와 화이트 각각 10종(캘리포니아 와인 6종+프랑스 와인 4종)이 블라인드 테이스팅 무대에 올려졌다.
심사위원 역시 프랑스 와인 최고 전문가 9명을 초빙했다. 프랑스의 대표적 와인 생산자로 꼽히는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 소유주, 샤또 지스쿠르의 소유주를 비롯해 미슐랭 별 세개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 수석 소믈리에, 프랑스 최고 와인 전문지의 편집장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경악할 정도로. 화이트 와인 부문에서 미국 와인이 132점으로 2등 프랑스 와인(126.5점)을 압도적인 점수로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레드 와인 부문에서도 미국 와인이 프랑스 5대 샤또라고 불리는 샤또 무똥 로칠드, 샤또 오브리옹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사실 이 사건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와인 최고 권위자들이 당시 저질로 인식되던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우수하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공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 결과가 사회적으로 미칠 파장이 우려됐을 것이다. 실제로 이날 결과가 입소문을 타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 같게도 현장에는 미국 '타임(Time)'지 파리 특파원( 조지 M. 테이버)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봤고, 그로부터 2주 후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 세계로 찍혀 나갔다. 당연히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은 전 세계 와인 애호가와 업계의 집중 조명됐고, 지금까지도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은 와인 시장에서 고품질 와인으로 각광 받고 있다.
기록이 있었기에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상황이 세세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리라.
사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곤 한다. 아주 먼 옛날 연애 편지 또는 일기 등이 발견됐다며 이를 대중매체에서 대대적으로 기사화한 것을.
우리는 현재도 다양한 형태로 일기를 쓰기도 하고, 사랑에 빠진 이들은 SNS 및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수없이 사랑의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현재로서만 본다면 흔하디흔한 일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적인 것조차도 '기록으로서 가치'가 더해지면 후대에는 재조명받게 될 것이다. 기록이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더해지는 와인의 속성과도 맞물리니 말이다.
여담으로 2006년 파리의 심판 30주년 기념 시음회가 개최됐다. 파리의 심판 사건(?)을 기념하고 다시 재대결을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1976년 파리의 심판 행사를 주관했던 스티븐 스퍼리어가 행사를 다시 주관하면서 '정식 파리의 심판 재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30년 전 파리의 심판과 같은 날짜인 2006년 5월 24일에,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유통사이자 와인 교육기관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런던에 위치한 'Berry Bro's and Rudd'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 설립된 와인 및 음식관련 교육기관이자 비영리 박물관인 'Copia 박물관' 두 곳에서 정확히 같은 시간에 1976년 심판에서 사용되었던 와인을 그대로 다시 가져와 대결을 펼쳤다.
이번에 미국에서도 열린 것은 미국 측 와인이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옮겨지면서 맛이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프랑스 와인도 비행기에 태워 미국으로 보내고, 미국 와인도 비행기에 태워 프랑스로 옮긴 뒤 같은 시간에 맛보도록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과는 놀라웠다.

이번엔 1등부터 5등까지 모두 미국이 이름을 올렸다. 1976년 당시엔 1등만 미국이었고, 2,3,4등은 프랑스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여러 언론들은 이날을 '치욕의 날' 이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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