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카카오, 제6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특별상 수상작
얇게 뽑은 물줄기가 글라스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검붉은 광채. 매혹적인 빛깔이다. 글라스를 가볍게 돌린다. 화려한 향이 콧속으로 날아든다. 갈증이 밀려온다.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간다. 천천히 기울인다. 혀 위로 와인이 흐른다. 달콤함과 매끄러움. 눈을 감고 이미지를 그려본다...[광화문덕] |
오늘 밤도 어딘가에서 가느다란 음이 실처럼 풀려나온다. 반도네온의 숨결이다. 서두르지 않는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 홀로 서 있는 거리의 등불처럼, 그 음색은 외롭고 쓸쓸하게 울린다. 탱고의 영혼이 깊은 한숨을 내쉬듯, 마디마디 절규하며 내 가슴을 두드린다. 마치 나의 죄를 나무라듯이, 과거의 그림자를 거칠게 휘감으며.
반도네온(bandoneon) : 아코디언 종류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대표적 악기
그런데, 문득 따뜻한 기운이 번져온다. 상처 입은 손을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처럼. 슬픔의 정점에서 피어나는 위로란 이런 것일까. 처음엔 날카롭게 파고들던 반도네온의 음이 점점 부드러워진다. 마치 힘들었던 날들의 무게를 덜어주듯, ‘이것이 삶이야’라고, ‘괜찮아’라고 속삭이듯.
결국 마지막 음이 흐를 때쯤이면,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젖어 눈시울을 붉히고 만다. 반도네온의 낮은 파동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비극적인 영화를 본 후처럼, 어딘가 먹먹하고 여운이 길다. 그리고 나는, 다시 듣기를 누른다. 탱고에 빠지고 난 후,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찾는 곡.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의 'Oblivion(망각)'.
망각. 내 삶에서 지울 수 없는 키워드.
사전적 정의로 ‘망각’이란 ‘어떤 일이나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참으로 모순적이다. 잊고 싶은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손끝에서 흘러내린다. 요즘 들어 점점 더 많은 것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사소한 물건, 중요한 약속, 그리고 어쩌면 나 자신마저도. 하지만 정작 가슴을 후벼 파는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움과 후회, 잃어버린 시간들이 짙게 남아 있다.
탱고는 19세기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라보카에서 태어났다. 타국에서 밀려온 가난한 이민자들은 이국의 땅에서 거친 노동을 마친 뒤, 술잔을 기울이며 한없는 외로움을 달랬다. 고향을 떠나온 설움,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온 아픔, 삶의 무게를 견디는 슬픔이 그들의 발끝에서 춤이 되고 음악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 탱고를 들을 때면,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피아졸라의 ‘Oblivion’을 듣고 있으면, 나의 아픈 기억들도 언젠가 저 멀리 흐려질 것만 같다.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내린 망각이란 정의다.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망각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의 생명에는 망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혀 잊히는 것뿐이다.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다.” |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다...
피아졸라의 음악도, 그의 말도 한 자 한 자 곱씹을 만하다. 망각이란 상처를 덮어주는 치유일 수도 있고, 때론 그 상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잔혹한 순간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망각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이 아닐까. 과거를 지우려 하지만, 결국 그 기억 위에 또 다른 기억을 쌓아 올리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와인을 마시는 순간도 그렇다. 기억을 지우려는 듯, 혹은 기억을 되새기려는 듯, 잔을 들고 향을 음미한다.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와인은 경험이다. 한 모금의 와인이 남기는 깊은 인상, 혀끝을 스치는 첫 향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안에 맴도는 여운. 이것이야말로 내가 와인을 사랑하는 이유다.
코르크 마개를 조심스레 돌려 ‘퐁’ 하고 따는 순간, 와인의 긴 시간이 해방된다. 병 입구에서 퍼져 나오는 향을 설레는 마음으로 들이마신다. 잔에 따르고, 천천히 돌린다. 너무 세차게 흔들면 와인이 놀랄까 조심스레, 부드럽게. 스월링과 함께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향기를 잡으려 코를 킁킁거린다. 후각이 예민하지 않아 여러 번 반복한다. 향이 복잡할수록 더 오래, 더 깊이 들이마신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순간. 하지만 나는 이런 과정이 즐겁다.
향을 맡고, 빛깔을 바라본다. 빛을 머금은 듯한 붉은 액체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색을 단어로 표현해 본다. ‘루비처럼 영롱하다’, ‘잘 익은 자두 같은 색감’, ‘햇살에 스며든 석양의 붉은 기운’… 어렵지 않은 말로, 내 감각 속에 있는 것을 언어로 풀어놓는다. 그리고 마침내 한 모금, 또 한 모금.
와인은 경험이다. 와인을 마시는 순간이 즐겁고 행복해야 다시금 그 순간을 찾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와인은 마시기 위해 태어났다. 아무리 근사한 배경 스토리가 있더라도, 향과 빛깔, 그리고 맛이 선택한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그건 단지 하나의 병에 불과하다. 와인의 이야기는 결국 혀끝에서 완성된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와인을 즐긴 지 얼마나 됐냐고.
나는 답한다. 와인은 암기과목이라고.
와인에 대한 지식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경험의 깊이에서 비롯된다. 무심히 마시는 한 잔과, 온 감각을 집중하여 음미하는 한 잔은 다르다. 와인은 나에게 기억을 되새기게도, 잊게도 만든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반도네온의 선율 속에서 한 모금의 와인을 마신다.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그 순간, 삶의 깊은 곳에서 잔잔한 울림이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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